백두산

별처럼 벌여 있는 저수지와 작은 성은 육진(六鎭)으로 견고하지 않은 곳이 없다.

믿음을갖자 2023. 6. 19.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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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5 기유(1729) 11 22(임진) 맑음

05-11-22[28] 함경 감사 윤양래에게 내린 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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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 감사 윤양래(尹陽來)에게 내린 교서에,

“왕은 이르노라. 생민의 기쁨과 슬픔은 방백과 관계되나 평소 적임자를 찾기 어려웠고 국가의 평안과 위태로움은 변방에 달려 있으니 더욱 이 선발을 중시하였다. 이에 공동의 천거를 따라 마침내 경의 재주에 부탁하노라.

이 함경도 한 지방을 돌아보면 해동(海東)의 가장 중요한 요충지이다. 산과 강은 분유사(枌楡社)를 끼고 있으니 왕업의 토대를 닦은 곳이요, 성과 해자는 오랑캐와 중국의 국경과 접하니 변방의 분쟁이 쉽게 일어난다. 천연적으로 생겨난 겹겹의 요새와 고개는 실로 우리나라의 울타리가 되었고 별처럼 벌여 있는 저수지와 작은 성은 육진(六鎭)으로 견고하지 않은 곳이 없다. 토지는 척박하여 백성이 수확한 곡식은 쉽게 바닥나고 구역이 먼 곳이라 왕의 교화가 젖어들기 어렵다.

더구나 올가을 일곱 고을의 수재(水災)는 옛날 우(禹) 임금 때 9년의 홍수보다 심하였다. 폭우로 바다처럼 변하여 수백 리의 농토가 더 이상 형체가 없고 거대한 물결과 물속에 잠긴 산은 삼천 년 만에 바다가 뽕밭으로 변한 일 정도가 아니었다. 풍패()의 옛터에는 한눈에 스산한 가옥들만 보이고 칠저(漆沮)의 남은 백성은 모두 도랑과 골짜기를 메우고 죽게 되었다.

다가 전염병이 떠돌아 참혹하게도 죽을병이 서로 이어지고 있다. 한(漢)나라 조정에서 어사를 파견한 것은 밤늦도록 근심하는 마음이 풀리기를 바라서였고 대량(大梁)에서 하동(河東)으로 곡식을 옮긴 정사는 오히려 후세의 근심이 될까 염려한다. 반드시 좋은 풍습을 계승하고 교화를 베푸는 인재를 의지하여야 어려움에 처한 백성을 구제하는 공적을 책임 지울 수 있을 것이다.

생각건대 경은 과거 시험으로 명성을 떨쳤고 무용(武勇)을 펼치게 되어서는 출중하였다. 민첩하고 넉넉한 문장은 사무에 숙달함을 겸하였고 솔직하고 소탈한 성품은 전범(典範)을 삼가 지킴을 이루었다. 마음가짐은 편안하고 한가하여 명망 있는 벼슬길은 이룰 생각을 끊었고 지론은 공평하고 너그러워 대간의 자리에서도 당동벌이(黨同伐異)하는 태도가 없었다. 생각건대 자질은 이쪽이든 저쪽이든 다 마땅하였고 돌이켜 보면 명성과 공적은 안팎에 다 드러났다. 충청 감사로 재직하다 사신에 제수되었을 에는 일 처리가 분명함을 앞다투어 추어올렸고, 안동 부사(安東府使)가 되었을 때는 실로 폐단을 개정하는 정사가 많았다. 국가의 요충지에서는 은혜와 사랑을 남겼고 승정원에서는 출납을 성실하게 하였다. 이미 당시에도 두루 시험받아 칭찬을 들었으니 마땅히 오늘 감사의 자리를 맡기고 효과를 거두기 바라노라.

이에 경에게 함경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순찰사 함흥부윤(咸鏡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巡察使咸興府尹)을 제수하니 경은 부디 왕명을 공경히 받들어 더욱 좋은 계책에 힘쓰라. 고삐를 쥐고 맑고 깨끗한 마음을 격려하며 탐욕스럽고 교활한 무리를 통렬히 징계하고 휘장을 걷어 올려 어질고 은혜로운 교화를 베풀어 쇠약하고 잔약한 무리를 은혜로 기르라. 남강군(南康軍)에서 진휼을 베풀었던 주자(朱子)를 본받아 잘 먹여 기르는 것이 시급하고 북쪽 관문의 빗장을 단단히 잠그고 어루만져 방어하는 일을 부지런히 해야 한다. 나는 바야흐로 일로(一路)의 행복을 기대하고 있으니 경은 큰 가뭄의 단비처럼 은혜를 쏟아야 한다.

더구나 지금 변방의 백성이 국경을 넘나드니 대비의 소홀함이 더욱 우려스럽다. 삼가 국가의 경계를 굳건하게 하여 뽕나무를 다투는 불화를 끊어 버리고 창문을 얽기 위해 모름지기 뽕나무 뿌리를 거둘 계획을 생각하라. 전례를 준행하여 때때로 내게 물어 재결하되 편의대로 할 것은 독단적으로 처리하라. 아, 저 천 리나 되는 황폐한 땅을 살피려면 어찌 맛난 음식을 대할 마음이 나겠는가. 이 한 고을의 백성을 구제하는 길은 오직 은혜로운 정사에 달려 있다. 우후(虞詡)의 날카로운 무기와 구별하는 것은 지금이 적당한 때이며 엄무(嚴武)가 세심하게 정성을 기울였던 일을 되돌아보고 이전의 하교를 생각하라. 나는 많은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니 경은 부디 가서 임무를 공경히 수행하라. 그러므로 이렇게 교시하니 잘 알아들었으리라 생각한다.”

하였다. 보덕 박필기(朴弼琦)가 지어 올렸다.

[-D001] 분유사(枌楡社) : 

분유는 느릅나무의 일종으로 한 고조(漢高祖)의 고향에 분유사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로 인해 제왕(帝王)의 고향을 뜻하게 되었다. 여기서는 조선 왕조의 발상지인 함흥(咸興)을 가리킨다.

[-D002] 풍패() : 

한 고조의 고향이다. 여기서는 함경도가 태조의 고향임을 뜻한다.

[-D003] 칠저(漆沮) : 

칠과 저는 모두 강 이름이다. 주 문왕(周文王)이 기산(岐山) 아래로 도읍을 옮기기 전에 주(周)나라 백성이 살던 지역으로 그때까지만 해도 주나라는 규모가 매우 작았다. 여기서는 조선 왕조가 세워지기 전의 상황을 주나라가 아직 미약하였을 때의 상황에 빗대어 함경도가 조선의 발상지임을 말한 것이다.

[-D004] 대량(大梁)에서 …… 정사 : 

기근이 들어 구황(救荒)할 곡식을 보내는 정사를 이른다. 전국 시대 양 혜왕(梁惠王)이, 하내(河內) 지방에 흉년이 들면 젊은이들은 하동(河東) 지방으로 옮기고 늙은이와 아이들에게는 하동에서 곡식을 가져다 나누어 주며, 하동에 기근이 들면 그와 반대로 한다고 하였다. 《孟子 梁惠王上》

[-D005] 당동벌이(黨同伐異) : 

일의 옳고 그름은 따지지 않고 자신과 뜻이 같은 무리는 비호하고 그렇지 않은 무리는 공격하는 것을 말한다.

[-D006] 충청 감사로 ……  : 

윤양래(尹陽來)는 1721년(경종1) 4월 충청 감사에 제수되었으나, 그해 10월 왕세제인 연잉군(延礽君)의 책봉을 주청(奏請)하기 위한 주청 부사에 제수되었으며 그달에 형조 참판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다음 해에 청(淸)나라에서 돌아온 뒤, 자문(咨文)에 경종의 몸이 약하다고 한 표현으로 인해 군부를 무고하였다 하여 갑산(甲山)에 위리안치되었다. 《承政院日記 景宗 1年 4月 29日, 10月 16日ㆍ20日, 2年 6月 19日》

[-D007] 국가의 요충지 : 

광주(廣州)를 가리키는 듯하다. 윤양래는 1718년(숙종44) 6월 광주 부윤에 제수되어 그해 7월에 하직하였다. 《승정원일기》에는 1719년 1월 15일까지 광주 유수로 이름이 실려 있고 그해 7월 좌부승지에 제수되었다. 《肅宗實錄 44年 6月 7日》 《承政院日記 肅宗 44年 7月 7日, 45年 7月 6日》

[-D008] 남강군(南康軍)에서 …… 주자(朱子) : 

송(宋)나라 때 주희(朱熹)가 남강군에 제수되었을 때 그 고을에 큰 흉년이 들자 다방면으로 흉년 구제 정책을 실시하여 많은 인명을 구제하였다. 《宋史 卷429 道學列傳 朱熹》

[-D009] 뽕나무를 다투는 불화 : 

춘추 시대 초(楚)나라와 오(吳)나라는 국경을 접하고 있었는데, 초나라 변방 고을에 사는 비량씨(卑梁氏)의 처녀가 오나라 변경에 사는 여자와 뽕잎을 다투었다. 이 일로 두 집안이 서로 다퉈 죽이는 사건이 벌어지자, 두 나라 변경의 수령들이 이 말을 듣고 노하여 서로 공격한 결과 오나라의 변경 고을이 멸망하였다. 이에 오왕(吳王)도 노하여 결국 초나라를 쳐서 두 도읍을 점령하고서야 떠났다. 《史記 卷31 吳太伯世家》 여기서는 변경에 분쟁이 일어나는 것을 이른다.

[-D010] 창문을 …… 생각하라 : 

《시경》 〈치효(鴟鴞)〉에 나오는 말로, 새가 화자(話者)가 되어 “내가 하늘이 흐리기만 하고 아직 비가 오지 않을 때 뽕나무 뿌리를 가져다가 둥지의 틈과 구멍을 메워 튼튼하게 만들어 비가 올 때의 환난을 대비한다면 누가 나를 업신여길까.”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닥칠 환란에 미리 대비하라는 뜻이다.

[-D011] 우후(虞詡) : 

후한 무평(武平) 사람으로, 영초(永初) 4년(110)에 조가현(朝歌縣)의 장(長)이 되어 그곳에 다년간 출몰하며 약탈과 살상을 일삼던 도적 영계(寗季) 등 수천 명의 적을 죽이는 공을 세웠다. 그의 계책 중에는 바느질하는 사람을 도적의 소굴로 들여보내 색실로 옷깃을 기워 표시하게 하여 시장이나 마을에 출현하는 도적을 보는 대로 사로잡은 방법이 있었다. 《後漢書 卷88 虞詡列傳》

[-D012] 엄무(嚴武) : 

당(唐)나라 중서시랑(中書侍郞) 엄정(嚴挺)의 아들이다. 대종(代宗) 때인 광덕(廣德) 2년(764) 성도윤(成都尹)이자 검남 절도사(劍南節度使)로서 토번(吐藩)의 7만 여 군대를 격파하고 당구성(當狗城)을 함락하며 염천성(鹽川城)을 탈취하였는데, 그 공로로 검교이부상서(檢校吏部尙書)에 가자되고 정국공(鄭國公)에 봉해졌다. 《舊唐書 卷117 嚴武列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