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白頭山)을 형성한 산줄기는 대개 몽고(蒙古) 땅에서 시작되어 서북쪽으로부터 머리를 들이밀었는데, 동남쪽에서 대지(大池 천지(天池))에 이르기까지의 수천 리가 대간룡(大幹龍 여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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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시문집 제20권 / 서(書)
중씨께 올림 신미(1811, 순조 11년, 선생 50세)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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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론하신 9ㆍ6과 방(方)ㆍ원(圓)의 관계개념은 서로 맞지 않을 듯싶습니다. 8로 1을 에워싼 것이 9고 6으로 1을 에워싼 것이 7인데 9는 변음(變陰)이지만 7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6으로 1을 에워싼 것이 어떻게 6의 원(圓)이 된단 말입니까. 서법(筮法)에 나오는 7ㆍ8ㆍ9ㆍ6의 숫자는 따로 하나의 법칙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수리가(數理家)가 방(方)과 원(圓)을 추산(推算)하는 법과는 서로 꼭 같다고 할 수 없습니다. 다시 자세히 살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민(緡)이란 돈꿰미입니다. 자서(字書)나 운서(韻書)를 두루 고찰하여도 수목(數目)은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 북경(北京)에서 행해지는 화폐는 10냥(兩)을 1관(貫)으로 하니 1민(緡)도 역시 그렇습니다. 아마 다른 설은 없을 것입니다.
산골에서 산 지가 오래되어 시험삼아 풀잎이나 나무껍질을 채취해다가 즙(汁)을 내기도 하고 달이기도 하여 바림을 해보니 오색(五色 청(靑)ㆍ황(黃)ㆍ적(赤)ㆍ백(白)ㆍ흑(黑) 등의 정색)이나 자색(紫色)ㆍ녹색(綠色) 이외에도 이름지어 형용할 수 없는 여러 색깔이 튀어나와 기이(奇異)하고 아정(雅靜)한 것이 매우 많았습니다. 요즈음 중국에서 나오는 비단이나 지폐(紙幣)에 기이하고도 속기를 벗어난 색깔이 있는 것은 모두 평범한 풀이나 나무에서 뽑아낸 물감으로 바림한 것임을 비로소 알았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오색 이외에는 오직 자색과 녹색 두 색깔만을 알고는 이것 이외의 모든 물색(物色)은 다 버리고 사용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안동답답(安東沓沓 융통성이 없이 미련하다는 뜻)이라는 것입니다. 시험삼아 몇 조각의 종이를 버릴 셈치고 여러 가지 뿌리와 껍질을 섞어서 채취해다가 시험해보심이 어떨는지요. 다만 홍색을 우려낼 때에는 반드시 신맛을 함유한 물건이 있어야 되니 백반(白礬)ㆍ오매(烏梅)ㆍ오미자(五味子)와 같은 종류를 소홀히 취급해서는 안 됩니다. 검붉은 색깔을 낼 때에는 반드시 조반(皁礬) 속명(俗名)은 금금(黔芩)임 이 있어야 되는데, 이와 같이 서로 감응되는 물건의 성질들에 대해 모두 궁구할 길이 없는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읍내(邑內)에 있을 때 아전 집안의 아이들로서 배우러 왔던 사람이 4,5명 되었는데 거의 모두가 몇 년 만에 폐하고 말았습니다. 어떤 아이 하나가 단정한 용모에 마음도 깨끗하고 필재(筆才)는 상급에 속하고 글 역시 중급 정도의 재질을 가졌었는데 꿇어앉아서 이학(理學 성리학(性理學))을 공부하였습니다. 만약 머리를 굽히고 힘써 배울 수만 있었다면 청(𤲟 성은 이씨(李氏) 자는 학래(鶴來))과 더불어 서로 짝이 맞을 것 같았는데 어쩐 셈인지 혈기(血氣)가 매우 약하고 비위(脾胃)가 아주 편벽되어 거친 밥이나 맛이 변한 장(醬)은 절대로 목으로 넘기지 못했습니다. 이 때문에 저를 따라 다산(茶山 강진군 도암면에 있던 초당)으로 올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이미 폐학(廢學)한 지 4년이 되는데 서로 만날 때마다 탄식하며 애석해 합니다.
귀족 자제(子弟)들에 이르러서는 모두 쇠약한 기운을 띤 열등생들입니다. 그래서 정신은 책만 덮으면 금방 잊어먹고 지취(志趣)는 하류(下流)에 안주(安住)해 버립니다. 《시(詩)》ㆍ《서(書)》ㆍ《역(易)》ㆍ《예(禮)》 등의 경전 가운데서 미묘한 말과 논리를 가끔씩 한번 말해주어 그들의 향학(向學)을 권해 줄라치면 그 형상은 마치 발을 묶어 놓은 꿩과 같습니다. 쪼아 먹으라고 권해도 쪼지 않고 머리를 눌러 억지로 곡식 낟알에 대주어서 주둥이와 낱알이 서로 닿게 해주는데도 끝내 쪼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아, 어떻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곳의 몇몇 고을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온 도(道)가 모두 그러합니다. 근래 서울의 귀족자제들은 구경이나 하고 사냥이나 하면서 육경(六經)만 끼고 있으면 진사(進士)가 2백에 앵삼(鸎衫 연소자로 생원ㆍ진사가 된 자들이 입는 황색 예복)은 언제나 50명을 넘으며 급제(及第) 역시 이런 형편이니 세상에 다시 문학(文學)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대저 인재(人才)가 갈수록 묘연해져서 혹 두소(斗筲 작은 국량)의 재주로 조금쯤 이름이라도 기록할 줄 아는 사람은 모두 하천(下賤) 출신들입니다. 사대부들은 지금 말운(末運)을 당하였으니 사람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이곳에 내왕하는 소년이 몇 명 있고 배움을 청하는 어린이가 몇 명 있는데, 모두 양미간(兩眉間)에 잡된 털이 무성하고 몸 전체를 뒤덮은 것이 모두 쇠잔한 기운뿐이니, 아무리 골육(骨肉)의 정이 중하다 한들 어떻게 깊이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천운(天運)이 이미 그러하니 어찌할 길이 없습니다. 또 이덕조(李德操 덕조는 이벽(李檗)의 자임)가 이른바 ‘먹을 수 있는 물건'이라 독이 없음을 말함. 한 것과 같으니, 장차 이들을 어디에 쓰겠습니까.
남자는 모름지기 맹조(猛鳥)나 맹수처럼 사납고 전투적인 기상이 있고 나서 그것을 부드럽게 교정하여 구율(彀率 법도를 가리킴)에 들어가게 해야만이 유용(有用)한 인재가 되는 것입니다. 양선(良善)한 사람은 그 한 몸만을 선하게 하기에 족할 뿐입니다.
또 그 중에 한두 가지 말할 만한 것이 있는 자라도 그 학문이 어려운 길로는 들어가지 않고 곧바로 지름길만을 경유하려 합니다. 그리하여 《주역(周易)》에는 다만 《사전(四箋)》만을 알고 《서경(書經)》에도 다만 《매평(梅平)》만을 아는데 그 여타의 것도 다 그런 식입니다. 대체로 노력하지 않고 얻게되면 비록 천지를 경동(驚動)시킬 만고에 처음 나온 학설이라 할지라도 모두 평범하게 간주하여 저절로 그렇게 이루어진 것으로 인정해 버리게 되므로 깊이 있게 몸에 와 닿는 것이 없게 됩니다. 이는 비유컨대 귀한 집 자제들이 태어나면서부터 고량 진미에 배불러 꿩이나 곰의 발바닥으로 요리한 맛있는 음식이라도 보통으로 여겨 걸인이나 배고픈 사람이 마치 목마른 말이 냇가로 기운차게 달려가는 것처럼 허겁지겁 먹으러 달려드는 기상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에 다른 학파의 주장을 만나면 너무 수월히 버리고 스승이 전수해주는 것에 대해서도 모두 상례로 간주해 버리며 심한 경우에는 진부한 말이라고 헐뜯기까지 하니 어찌 답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 살면서는 두 가지 학문을 겸해서 공부하지 않을 수 없으니, 하나는 속학(俗學)이요, 하나는 아학(雅學)입니다. 이는 후세의 악부(樂府)에 아악(雅樂)과 속악(俗樂)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곳 아이들은 아(雅)만 알고 속(俗)을 알지 못하므로 오히려 아(雅)를 속(俗)으로 여겨버리는 폐단이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허물이라기보다는 시세(時勢)가 그렇게 만들고 있다고 해야겠지요.
성경지도(盛京地圖)는 무릇 세 번이나 원고를 고친 뒤에야 다른 여러 글들과 거의 서로 맞게 되었는데, 참으로 천하의 기관(奇觀)인 동시에 우리나라의 더없는 보물입니다. 문인(文人)이나 학사(學士)가 이 지도를 보지 않고서는 동북 지방의 형세를 논할 수 없을 것이며, 장수(將帥)나 군주(軍主)로서 이 지도를 보지 않고서는 양계(兩界)의 방어를 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제 그것을 보건대, 이세적(李世勣)이 고구려를 공격했을 때에 의주(義州)를 경유하지 않고 곧장 흥경(興京)에서 남쪽 창성(昌城)으로 나왔는데 그 사이의 산천과 도리(道理)가 손바닥을 보듯이 명료합니다. 강홍립(姜弘立)이 북벌(北伐)할 때에도 창성에서 흥경으로 향하려 했는데, 그 연한 고깃덩이를 호랑이에게 던져주던 형세가 환하게 눈에 들어오니, 이것이 어찌 소홀히 여길 물건이겠습니까.
백두산(白頭山)을 형성한 산줄기는 대개 몽고(蒙古) 땅에서 시작되어 서북쪽으로부터 머리를 들이밀었는데, 동남쪽에서 대지(大池 천지(天池))에 이르기까지의 수천 리가 대간룡(大幹龍 여러 산맥 중 중심되는 주맥(主脈))이 됩니다.
대간룡 이서(以西)의 물은 모두 요수(遼水)로 모이는데, 요하(遼河)의 동쪽과 큰 줄기의 서쪽에 위치하는 지역이 곧 성경(盛京)과 흥경(興京)이 있는 곳으로 옛날 고구려의 강역(疆域)이었던 곳이며, 요하의 남쪽과 창해(滄海)의 북쪽 사이의 지역이 바로 요동(遼東)의 여러 군현(郡縣)이 있는 곳입니다. 대간룡 이동의 물은 모두 혼동강(混同江)으로 모여 북으로 흑룡강(黑龍江)에 들어가는데, 무릇 대간룡 이동의 지역을 삼대(三代)에는 숙신(肅愼)이라 불렀고 한대(漢代)에는 읍루(挹婁)라 불렀고 당대(唐代)에는 말갈(靺鞨)이라 불렀고 송대(宋代)에는 여진(女眞)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청(淸) 나라도 여기에서 일어났으니, 지금의 오라(烏喇)와 영고탑(寧古塔)이 바로 그 지역입니다. 다만 영고탑에서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는 3천여 리의 땅은 토지가 광원(廣遠)합니다.
무릇 지도를 제작하는 방법은 한결같이 지지(地志)의 축척법(縮尺法)을 준수해야 하니 지구가 둥글다는 올바른 이치를 모르면 비록 반걸음이라도 분명치 못하게 되어 필경 어찌할 줄 모르는 폐단이 있게 됩니다. 경위선(經緯線)을 곤여도(坤輿圖)처럼 만든다면 매우 좋습니다만 그렇게 하지 못할 경우에는 천 리를 그릴 때마다 그 사각형의 공간을 확정하고는 먼저 지지(地志)를 검토하여 4개의 직선이 서로 교차하는 지점의 축척을 바르게 해야 합니다. 만약 종횡으로 5천 리의 지도를 제작하는 경우 남북으로 5층(層) 동서로 5가(架)의 선을 그리고 먼저 그 층과 가가 경계를 이루는 선(線)에 네 직선이 교차하는 지점의 축척을 바르게 한다면, 그 사방 천 리 되는 한 구역 안에 군(郡)ㆍ현(縣)ㆍ산천(山川)을 나누어 배치함에 있어 융통성이 있게 되어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대는 폐단이 없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비록 지지(地志)를 그대로 따랐다 하더라도 끝내 지도를 완성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구가 둥글다는 이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어쩔 줄 모르는 경우를 당할 때마다 반드시 지지는 믿을 수 없다고 탓하게 되는데 이는 첫머리부터 역시 이 주의할 점을 범했기 때문입니다. 지구가 둥글다는 올바른 이치를 깨달은 뒤에야만이 비로소 지도를 제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의 호)께서 손수 베꼈던 일본지도(日本地圖) 1부를 보면 그 나라는 동서로 5천 리이고 남북으로는 통산 1천 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도의 너비는 거의 1장(丈)에 이르는데 군현(郡縣)의 제도와 역참(驛站)의 도리(道里), 부속 도서들, 해안과 육지가 서로 떨어진 원근, 해로(海路)를 곧장 따라가는 첩경(捷徑) 등이 모두 정밀하고 상세하였습니다. 이는 반드시 임진년ㆍ정유년의 왜란 때에 왜인(倭人)들의 패전한 진터 사이에서 얻었을 것일 텐데, 비록 만금(萬金)을 주고 사고자 한들 얻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1통을 옮겨 베껴놓았는데 일본의 형세가 손바닥을 보듯 환합니다.
대체로 공재께서는 성현의 재질을 타고나시고 호걸의 뜻을 지니셨기에 저작하신 것에 이러한 종류가 많습니다. 애석하게도 시대를 잘못 만났고 수(壽)까지 짧으시어 끝내 포의(布衣)로 세상을 마치셨습니다. 내외(內外) 자손 중에서 그분의 피를 한점이라도 얻은 자라면 반드시 뛰어난 수기(秀氣)를 지니고 있을 것인데 역시 불행한 시대를 만나 번창하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운명이 아니겠습니까. 그분의 잔고(殘稿)와 유묵(遺墨) 중에는 후세에 표장(表章)할 만한 것들이 많을 텐데 안방 다락에 깊이 숨겨진 채 쥐가 갉아먹고 좀이 슬어도 구제해 낼 사람이 없으니 또한 슬픈 일이 아니겠습니까.
성옹(星翁 이익(李瀷)을 가리킴))의 저작은 거의 1백 권에 가깝습니다. 스스로 생각해보면 우리들이 천지의 웅대함과 일월의 광명함을 알 수 있게 된 것은 모두 이 선생님의 힘이었습니다. 그분의 저작을 산정(刪定)하여 책으로 만들 책임이 제몸에 있는데도 이몸은 이에 돌아갈 날이 없고 후량(侯良)은 서로 연락하기 좋아하지 않으니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사설(僿說)》을 지금의 소견대로 임의로 산정하여 발췌하게 해준다면, 아마 무성(武成)과 서로 같게 될 것인데 한 줄에 20자짜리 10행으로 7,8책을 넘지 않는 선에서 끝마쳐질 것 같습니다.
질서(疾書) 또한 반드시 그런 정도일 것입니다. 지난번 《주역》을 주석할 때에 《주역질서(周易疾書)》를 가져다 보았더니 역시 채록(採錄)하지 않을 수 없는 것들이 많았는데, 만약 가려 뽑아 기록한다면 3,4장(張) 정도는 얻을 수 있습니다. 다른 경서(經書)에 대해서도 반드시 이보다 열 배의 분량은 나올 것입니다. 다만 예식(禮式)에 대한 부분은 지나치게 간소하게 한 결함이 있을 뿐만 아니라 지금의 풍속에도 위배되고 고례(古禮)에도 근거할 수 없는 것들이 수두룩합니다. 이 책이 만약 널리 유포되어 식자(識者)의 눈에 들어간다면 대단히 미안할 텐데 이를 장차 어쩌면 좋겠습니까.
○ 연전에 중상(仲裳)에게 편지를 보내어 그 가정(家庭)의 저작들을 수습할 방도에 대해 언급하였으나 답서를 받지 못했고 또 창명(滄溟)에게 편지를 했었지만 답서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용렬함이 이런 정도이니 다시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중상은 홀연히 죽었으며 금년 봄에 풍병(風病)으로 갑자기 죽었음. 창명은 아직 정계(停啓)되지 못했으니, 그들이 어떻게 가마솥 밑 그을음으로써 세발 솥 밑 그을음을 탓할 수 있겠습니까. 대체로 가련한 인생들입니다.
옛날 장기(長鬐)에 있을 떄에 남고(南皐 윤지범(尹持範)의 호)께서 시 한 수를 보내왔었습니다. 그 격정어린 음조가 더없이 비장하였는데, 몇 년 뒤 초천(苕川 다산의 고향마을)에 이르러 제 시를 읽으며 눈물을 흘렸답니다. 그 뒤 여러 차례 시와 글을 보내왔기에 역시 수답(酬答)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 인백(仁伯 강이원(姜履元)의 자)은 전에 남산(南山)에서 꽃버들 만발하던 때 성재(聖在) 등과 술을 마시고 매우 취하여 우리 형제를 찾으면서 방성대곡(放聲大哭)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소식의 왕래는 영영 끊겼습니다.
○ 수태(受台) 이익운(李益運)께서 주신(周臣) 이유수(李儒修)을 만나 이 몸에 말이 미치자 눈물을 흘리셨답니다. 그 뒤에 윤상현(尹尙玄) 즉 규백(奎白)임. 이 올라가자 역시 이곳에 대하여 연연해 하는 말이 많더랍니다. 해보(徯父 한치응(韓致應)의 자) 역시 소식이 있었습니다.
날마다 악학(樂學)에 마음을 두어 점차로 12율(律)은 본래 척도(尺度)이지 관성(管聲)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황종(黃鐘)의 관(管)은 길이가 9촌(寸)이고 지름이 3푼(分)이다.’ 한 이하의 설은 모두가 제동야인(齊東野人)의 설(說)인데 이를 장차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기력은 이미 쇠약해졌는데 이렇게 큰 상대(相對 악학 연구를 가리킴)를 만났으니 접전(接戰)할 길이 없을 듯싶습니다. 근래 혀마저 피곤하고 붓마저 모자라졌으니, 어찌 쇠약한 병자가 해낼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10권이야말로 10년 동안 모아 비축했던 것을 하루아침에 쏟아놓은 것입니다. 삼한(三韓)을 중국 사책(史策)에서는 모두 변진(弁辰)이라 하였고 변한(弁韓)이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 선비들은 혹 평안도를 변한이라고도 하고 혹 경기를 그곳에 해당시키기도 하였으며 혹 전라도가 거기에 해당된다고도 하였습니다. 근래 처음으로 조사해 보았더니 변진이란 가야(迦那)였습니다. 김해(金海)의 수로왕(首露王)은 변진의 총왕(總王)이었으며, 포상팔국(浦上八國) 함안(咸安)ㆍ고성(固城)ㆍ칠원(漆原) 등임 및 함창(咸昌)ㆍ고령(高靈)ㆍ성주(星州) 등은 변진의 12국(國)이었습니다. 변진의 자취가 이처럼 분명한데도 우리나라 선비들은 지금까지 어둡기만 합니다. 우연히 버려진 종이를 검사했더니, 오직 한구암(韓久菴 구암은 한백겸(韓百謙)의 호)이 ‘변진은 아마 수로왕이 일어났던 곳일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현도(玄菟)는 셋이 있습니다. 한 무제(漢武帝) 때에는 함흥(咸興)을 현도로 삼았고, 소제(昭帝)때에는 지금의 흥경(興京) 지역으로 현도를 옮겼고 그 뒤 또 지금의 요동(遼東) 지역으로 옮겼습니다. 이들 사적(事蹟)이 모두 등나무와 칡덩굴이 뻗듯 이리저리 얽히고 설켰으니 이에 앞선 이른바 우리나라의 역사란 것이 어떠했는지 알 만합니다. 의당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三國史記)》를 가져다가 한 통을 개작(改作)하여 태사공(太史公 사마천(司馬遷))이 《사기(史記)》를 지어서 했던 것처럼 이름 있는 산에 감추어 두어야 하는 것인데, 나 자신 연수(年壽)가 오래 남지 않았으니 이 점이 슬퍼할 일입니다. 만약 십수 년 전에만 이러한 지견(知見)이 있었더라도, 한 차례 우리 선대왕(先大王 정조(正祖))께 아뢰어 대대적으로 서국(書局)을 열고 사(史)와 지(志)를 편찬함으로써 천고의 비루함을 깨끗이 씻어내고 천세의 모범이 될 책으로 길이 남기는 일을 어찌 하지 않았겠습니까. 정지흡(丁志翕)의 시에,
꽃 피자 바람 불고 / 花開風以誤
달 뜨자 구름 끼네 / 月圓雲以違
하였습니다. 천하의 일이 서로 어긋나 들어맞지 않는 것이 모두 이런 식이니, 아, 또 어찌하면 좋습니까. 이 10권의 책만은 역시 우리나라에서는 결코 업신여길 수 없는 것인데, 그 시비를 분별할 수 있는 사람조차도 전혀 찾을 수가 없으니 끝내는 이대로 진토(塵土)로 돌아가고 말게 생겼습니다. 분명히 이럴 줄을 알면서도 오히려 다시 고달프게 애를 쓰며 그만두지 못하고 있으니 또한 미혹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점차로 하던 일을 거둬들여 정리하고 이제는 치심(治心) 공부에 힘쓰고 싶은데 더구나 풍병(風病)은 이미 뿌리가 깊어졌고 입가에는 항상 침이 흐르고 왼쪽 다리는 늘 마비증세를 느끼고 머리 위에는 두미협(斗尾峽 한강 상류의 강 이름) 얼음 위에서 잉어 낚는 늙은이의 솜털 모자를 쓰고 있습니다. 근래에는 또 혀가 굳어져 말이 어긋나 스스로 연수(年壽)가 길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한결같이 바깥일에만 마음을 치달리니, 이는 주자(朱子)께서도 만년(晩年)에 뉘우쳤던 바였습니다. 어찌 두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고요히 앉아 마음을 맑게 하고자 하고 보면 세간의 잡념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어지럽게 일어나 무엇하나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으니, 오히려 치심(治心) 공부가 저술(著述)하는 것만 같지 못함을 느낍니다. 이 때문에 문득 그만두지 못하는 것입니다.
도인법(導引法)은 분명히 유익한데 게으르고 산만하여 할 수 없을 따름입니다.
보내주신 편지에서 짐승의 고기는 도무지 먹지 못하고 있다고 하셨는데 이것이 어찌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 도(道)라 하겠습니까. 도중(島中)에 산개[山犬]가 천 마리 백 마리뿐이 아닐 텐데, 제가 거기에 있다면 5일에 한 마리씩 삶는 것을 결코 빠뜨리지 않겠습니다. 도중에 활이나 화살, 총이나 탄환이 없다고 해도 그물이나 덫을 설치할 수야 없겠습니까. 이곳에 어떤 사람이 하나 있는데, 개 잡는 기술이 뛰어납니다. 그 방법은 이렇습니다. 식통(食桶) 하나를 만드는데 그 둘레는 개의 입이 들어갈 만하게 하고 깊이는 개의 머리가 빠질 만하게 만든 다음 그 통(桶) 안의 사방 가장자리에는 두루 쇠낫을 꼽는데 그 모양이 송곳처럼 곧아야지 낚시 갈고리처럼 굽어서는 안 됩니다. 그 통의 밑바닥에는 뼈다귀를 묶어 놓아도 되고 밥이나 죽 모두 미끼로 할 수 있습니다. 그 낫은 박힌 부분은 위로 가게 하고 날의 끝은 통의 아래에 있게 해야 하는데 이렇게 되면 개가 주둥이를 넣기는 수월해도 주둥이를 꺼내기는 거북합니다. 또 개가 이미 미끼를 물면 그 주둥이가 불룩하게 커져서 사면(四面)으로 찔리기 때문에 끝내는 걸리게 되어 공손히 엎드려 꼬리만 흔들 수밖에 없습니다.
5일마다 한 마리를 삶으면 하루 이틀쯤이야 해채(鮭菜)를 먹는다 해도 어찌 기운을 잃는 데까지야 이르겠습니까. 1년 3백 66일에 52마리의 개를 삶으면 충분히 고기를 계속 먹을 수가 있습니다. 하늘이 흑산도(黑山島)를 선생의 탕목읍(湯沐邑)으로 만들어주어 고기를 먹고 부귀(富貴)를 누리게 하였는데도 오히려 고달픔과 괴로움을 스스로 택하다니, 역시 사정에 어두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호마(胡麻 들깨) 한 말을 이 편에 부쳐드리니 볶아서 가루로 만드십시오. 채소밭에 파가 있고 방에 식초가 있으면 이제 개를 잡을 차례입니다.
또 삶는 법을 말씀드리면, 우선 티끌이 묻지 않도록 달아매어 껍질을 벗기고 창자나 밥통은 씻어도 그 나머지는 절대로 씻지 말고 곧장 가마솥 속에 넣어서 바로 맑은 물로 삶습니다. 그리고는 일단 꺼내놓고 식초ㆍ장ㆍ기름ㆍ파로 양념을 하여 더러는 다시 볶기도 하고 더러는 다시 삶는데 이렇게 해야 훌륭한 맛이 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박초정(朴楚亭 초정은 박제가(朴齊家)의 호)의 개고기 요리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병풍의 글씨는, 비록 채양(蔡襄)이나 미불(米芾)이라 하더라도 이처럼 오래도록 폐기된 상태에 있었다면, 어떻게 글씨를 잘 쓸 이치가 있겠습니까. 게다가 눈은 어두워지고 어깨는 아프니 빈풍(豳風 《시경》의 편명)의 시(詩) 8장(章)을 어떻게 쓸 수 있겠습니까. 마지못하여 산거(山居) 8수(首)로 대신할 따름입니다.
혜성(彗星)의 이치는 정말로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만, 조용히 그 빛을 살펴보건대 이것은 얼음덩이가 분명합니다. 생각건대 수기(水氣)가 곧장 올라가 차가운 하늘에 이르러 응결한 것이 이것인데, 그것이 해를 향한 쪽으로 빛나고 밝은 곳을 머리라 부르고 햇볕이 차단되어 희미한 곳을 꼬리라 부르는 것이니, 유성(流星)이 더운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것과 그 이치는 서로 유사합니다.
보내주신 글에서는 이것을 지구가 움직이는 확실한 증거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혜성은 지난 7,8월에는 두병(斗柄)의 두 번째 별과 서로 밀접히 붙어 있었는데 다산의 북쪽 봉우리는 매우 높기 때문에 8월 이후에는 북두칠성 일곱 개의 별이 모두 산밑으로 들어가 컴컴하여 보이지 않음. 8월 그믐쯤에는 점점 높이 떠서 점점 서쪽으로 갔습니다. 지금은 초저녁 처음 보일 때에 그 높이가 거의 중천(中天)에 가깝고 그 방위는 점점 유방(酉方 서쪽)에 이르고 있으니, 7,8월경과는 아주 같지 않습니다. 이것으로 본다면 분명히 별이 움직인 것이지 지구가 움직여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가령 지구가 운행한다 하더라도 별 역시 옮겨가고 있으니, 또 토기(土氣)가 모여서 맺힌 것이라면 붙박히면 붙박히고 떨어지면 떨어질 일이지 어떻게 돌 수가 있고 옮길 수가 있단 말입니까.
일식(日蝕)과 월식(月蝕)이 일어나는 것은 명백히 궤도상 그렇게 되게 되어 있는 것이니 이것은 재앙이 아닙니다. 이 혜성에 이르러서는, 이것이 상례(常例)를 벗어난 아주 특별한 형상(形象)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길흉(吉凶)에 대한 응험은 분명하게 말할 수 없으나 요컨대 무심(無心)히 보아넘길 것은 아닙니다. 전에 외사(外史)를 보았더니 옛날 어떤 사람이 푸른 하늘을 쳐다보다가 칼[刀劍]의 형상이 있는 것을 보고서는 그 지방에 큰 흉년이 있을 것을 알았는데 과연 백성들이 다 죽었다고 합니다. 생각건대 그 사람이 보았던 것도 역시 이런 종류로서 백성들의 피해를 일괄적으로 말할 수는 없겠으나 그 규모가 큰 것만도 세 곳이나 되었다니, 어찌 근심할 것이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무진년(1808, 순조 8)에도 이 혜성이 있었는데 기사년(1809, 순조 9)ㆍ경오년(1810, 순조 10)에 과연 백성들이 죽는 참상이 일어나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할 수 없이 소란스러웠으니 매우 걱정스럽습니다.
금년 3월 18일에 있었던 우속(雨粟 곡식비)의 이변도 괴이합니다. 이 지방에 내린 것은 백편두(白扁豆) 같은 것도 있고 청상자(靑箱子) 계관자(鷄冠子) 같은 것도 있고 교자(蕎子) 같은 것도 있고 적두(赤豆) 같은 것도 있어 모두 네 종류였습니다. 이곳 산에서 주웠던 것은 백편두와 청상자 두 종류뿐이었습니다. 이것의 이치는 혜성과 비교하여 더욱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생각건대, 본래 깊은 산이나 큰 섬에 이러한 초목의 열매가 있기 마련인데, 그것이 일시 바람에 날려서 하늘에 흩어졌다가 땅에 퍼지는 것은 바로 귀물(鬼物)의 소행으로 애오라지 사람을 놀라게 하니, 이 역시 상서롭지 못한 것입니다.
지난 갑자년(1804, 순조 4) 4월에는 강진(康津) 읍내에서 뿔이 난 말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모양은 견율(繭栗) 같았는데, 칼로 베어내고 불로 지졌으나 하룻밤 사이에 그전처럼 다시 돋았습니다. 바로 백도방(白道坊)에 사는 노씨(盧氏)의 말이었음. 이 몸이 돌아가지 못한 상태에서 이 두 가지 것 하늘에서 내린 곡식과 말에서 나온 뿔 을 보았으니 오랫동안 돌아가지 못할 것임을 알겠습니다. 따라서 옛말은 모두 근거한 바가 있는 것임을 비로소 알았습니다.
《소학주천(小學珠串)》은 어린아이들을 위하여 지었습니다. 사람들의 말을 들으니 선생님께서도 이러한 문자(文字)를 편집하신 것이 있다 하던데, 한 집안에서 따로 두 개의 문호(門戶)를 세울 필요는 없습니다. 이쪽 것으로 사용하는 것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그 문례(文例)가 비록 쓸데없이 긴 듯하나 어린아이들에게 외도록 하려면 이와 같이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그 방법은 10단위로 한도(限度)를 삼았기 때문에 혹 구차스럽게 채운 것도 있고 혹 억울하게 빼놓은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 세상에서 통행되는 문자란 이렇게 하지 않으면 행해지지 않습니다. 선생께서 지으신 《몽학의휘(蒙學義彙)》가 왜 정엄(精嚴)하지 않겠습니까마는, 제가 편집한 《아학편(兒學編)》2권은 2천 글자를 한도로 하여 상권(上卷)에는 형태가 있는 물건의 글자를, 하권에는 물정(物情)과 사정(事情)에 관계되는 글자를 수록하였으며, 여덟 글자마다 《천자문(千字文)》의 예(例)와 같이 1개의 운(韻)을 달았습니다만 어떨는지 모르겠습니다.
○ 2천 글자를 다 읽고 나면 곧바로 국풍(國風 《시경》의 편명)을 가르쳐 주어도 저절로 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재주가 없는 자는 비록 먼저 1만 글자를 읽더라도 역시 유익됨이 없습니다.
학기(學箕 다산의 족질(族姪)) 자는 희열(希說)임. 가 그의 아들을 집 아이들에게 의탁하여 글을 배우도록 하였는데, 그 아이들의 얼굴 모습이 준수하여 형수씨가 보고서는 학초(學樵)의 후사로 세우고 싶어하였습니다. 무장(武牂 다산의 큰아들)과 문장(文牂 둘째 아들) 두 아이들도 큰 욕심이 생겨 그를 끌어다가 당질(堂姪)로 삼고 싶어서 학기와 서로 의논하였더니, 학기가 말하기를,
“자산(玆山 정약전을 가르킴)과 다산(茶山)의 뜻이 데려가고 싶으시다면 나는 당연히 바치겠다.”
고 하였답니다. 두 아이들이 다산으로 편지를 보내왔기에 답하기를,
“일로 보아서는 매우 좋으나 예(禮)로 보아서는 매우 어긋난다. 예를 어길 수는 없다.”
라고 하니, 두 아이들은,
“예의 뜻이 이미 그러하다면 마땅히 계획을 파하렵니다.”
라고 했었습니다. 백씨(伯氏 정약현(丁若鉉))께서는 편지를 주시어,
“내가 이런 말을 듣고 마음으로 무척 그르게 여겼는데, 그대의 말이 이와 같으니 정말로 나의 뜻과 합치된다.”
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형수께서 편지를 보내어,
“아주버니여, 저를 살려주시오. 아주버니여, 저를 불쌍히 여기시오. 저를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어찌하여 저에게 차마 그렇게 하십니까. 자산(玆山)은 아들이 있으나 저는 아들이 없습니다. 저야 비록 아들이 있다손 치더라도 청상과부인 며느리는 아들이 없으니, 청상의 애절한 슬픔에 예가 무슨 소용이겠소. 예에는 없다 하더라도 저는 그를 데려오겠소.”
라고 하여, 천 마디 만 마디 말이 원망하는 듯 사모하는 듯 우는 듯 호소하는 듯하여 읽자니 눈물이 흘러내리고 답변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답하기를,
“예에 비록 어긋난다 하더라도 일로 보면 매우 좋습니다. 저는 차마 저지하지 못하겠으니 그냥 누워 있겠습니다. 자산(玆山)과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그 처분에 전적으로 따르십시오.”
라고 했습니다. 몸져 누운 제 아내의 편지에,
“한마디 말이 떨어지자마자 환희가 우레처럼 울리고 비참한 구름과 처연한 서리가 변하여 따뜻한 봄이 될 것입니다. 다시는 예를 말하지 말고 조금이라도 인정을 살피십시오. 만약 다시 금지시킨다면 시어머니와 며느리 두 사람이 한 노끈에 같이 목을 맬 것입니다. 어떻게 다시 예를 언급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이 일에 있어서 감히 흑백(黑白)을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급히 두 통의 편지를 쓰셔서 하나는 무(武 다산의 큰아들)에게 보내고 하나는 형수께 보내어 속히 완정(完定)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삼가 예(禮)를 살펴보니 무릇 조부를 제사지내는 선비 곧 이묘(二廟)가 있는 선비 는 모두 입후(立後)하였습니다. 한유(漢儒)들은 계별대종(繼別大宗)이라야 입후할 수 있다 하였는데, 이는 한유들의 해석일 뿐입니다. 평소 예(禮)를 배우면서 저 역시 오직 공자(公子)나 왕손(王孫)의 대종(大宗)만이 입후할 수 있다고 여겼었는데, 금년 여름ㆍ가을 사이에 상기별(喪期別) 즉 《상례사전(喪禮四箋)》의 제4함(函) 을 저술하면서 고례(古禮)를 조사해 보았더니 본래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무릇 제사가 이묘(二廟)에 미치고 장자(長子)를 위해 참최복(斬衰服)을 입는 자는 모두 입후할 수 있습니다.
다만 아버지를 계승하는 사람은 형제의 아들을 데려오고, 할아버지를 계승하는 사람은 형제의 아들을 데려오되 없는 경우는 4촌형제의 아들을 데려오니, 증조나 고조를 계승하는 사람도 법은 다 이러합니다. 다만 서성(庶姓)의 종(宗)은 5세(世)면 묘(廟)에서 옮깁니다. 따라서 5세가 지나면 조종(祖宗)이 바뀌기 때문에 5세를 계승하는 사람은 아들이 없더라도 10촌형제의 아들을 아들로 삼을 수 없습니다. 오직 계별지종(繼別之宗)만은 비록 백세(百世)에 이르더라도 별자(別子)의 후예는 모두 데려다 후손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고법(古法)입니다.
만약 서자(庶子)로서 아버지를 계승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비록 왕자(王子)나 공자(公子)라 해도 입후(立後)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관숙(管叔)은 후사가 없어서 나라가 없어진 것이 《사기(史記)》에 보입니다. 만약 죄 때문에 제(除)하여졌다면 채중(蔡仲)이 수봉(受封)될 이치가 없음. 한 문제(漢文帝)와 경제(景帝)의 아들들도 모두 후사가 없으면 나라가 제하여졌으니 이는 고법(古法) 중에서도 더욱 지엄한 것입니다. 이같이 한 뒤에야 소후부(所後父)를 위해 참최복을 입어도 명분이 있게 되고, 자신의 부모에게 강복(降服)을 하여도 명분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학초(學樵)는 아버지를 계승하지도 못하고 죽었으니, 만약 어머니를 같이하는 아우가 있었다면 법으로는 마땅히 아우가 대를 이어야 하는 것이요, 학초를 위해서 입후하는 일은 온당하지 않습니다. 서제(庶弟)는 비록 동복(同腹)은 아니지만 옛날의 경(經)이나 지금의 법에 모두 적출(嫡出)의 아들과 털끝만큼도 차이가 없는데 어떻게 학초를 위해서 입후할 수 있겠습니까. 학초에게 비록 친형제의 아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입후하는 것이 부당한데, 더구나 아득히 먼 족자(族子)에 있어서이겠습니까.
○ 비록 그렇다고는 하나 지금의 사세(事勢)가 이미 어찌할 수 없는 데까지 이르렀으니, 고경(古經)만을 굳게 지켜 화기(和氣)를 잃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나라 풍속에는 양자법(養子法)이 있으니 양자법은 비록 성씨가 다르더라도 구애를 받지 않습니다. 《대전(大典)》에도 ‘양부모(養父母)를 위해서 삼년복을 입는다.’라고 하였습니다. 국법이 이와 같은데 이 나라의 국민으로서 그것을 따르는 것이 무슨 죄가 되겠습니까. 또 지금은 문호(門戶)가 무척 쇠미한데, 이러한 준골(俊骨)을 얻어다가 서로 의지하도록 하는 데에 무슨 불가함이 있겠습니까. 깊이 생각해 주신다면 다행이겠습니다.
《상서고훈(尙書古訓)》6권은 복생(伏生) 이하와 마융(馬融)ㆍ정현(鄭玄) 이상의 구양(歐陽)ㆍ하후(夏侯)ㆍ왕도(王塗)ㆍ반고(班固)ㆍ유향(劉向)의 제설(諸說)과 《좌전(左傳)》이하 한(漢)ㆍ위(魏) 이상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서경(書經)》에 관한 학설들입니다. 이 책은 청(𤲟 이청(李𤲟))이 편집하였는데 또한 안설(案說 저자의 학설)은 없습니다.
16냥(兩)이 1근(斤)이 된다는 설은 바로 장기(長鬐)에서 지었던 것입니다. 4상(象)과 8괘(卦)도 역시 1배(倍)를 더해가는 법입니다만 그러한 설에는 병통이 있습니다. 문자에 대한 병통은 끝내 다 고치지 못하고 죽을 줄 저 자신이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자(孔子)는 ‘조술(祖述)만 하고 창작은 하지 않았다.’ 했고, 또 ‘나는 말하고 싶지 않노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대둔사(大芚寺 해남에 있는 대흥사)에 어떤 승려가 있었는데 나이 40에 죽었습니다. 이름은 혜장(惠藏), 호는 연파(煙波), 별호(別號)는 아암(兒菴), 자(字)는 무진(無盡)이라 하는데, 본래 해남(海南)의 한미한 사람이었습니다. 27세에 병불(秉拂)이 되자 제자가 1백 수십 명에 이르렀으며, 30세에는 둔사(芚寺)의 대회(大會) 이 대회는 오직 팔도의 대종장(大宗匠)이 된 뒤에야 개최하는 것임. 를 주재했습니다. 을축년(순조 5, 1805) 가을에 만덕사(萬德寺)에 머물렀는데 그때 저와 만났었습니다. 서로 만나던 저녁에 곧 《주역》을 논했는데, 그는 하도(河圖)ㆍ낙서(洛書)의 학문에 대해 횡설수설(橫說竪說 자유자제로 설명함)하면서 자기의 말처럼 외었습니다. 또 주 부자(朱夫子)의 《역학계몽(易學啓蒙)》을 익숙히 보고서 대중없이 여러 조목을 뽑아내어 세차게 흐르는 강물처럼 거침없이 말하였으므로 바라보기에 겁날 정도였습니다. 제가 묻기를,
“건(乾)의 초구(初九)는 왜 구(九)라 하는가?"
라고 했더니, 그가,
“구(九)란 양수(陽數)의 극(極)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곤(坤)의 초륙(初六)은 왜 곤의 초십(初十)이라고 하지 않는가?"
라고 했더니, 그는 말이 떨어지자 곧 깨닫고 몸을 일으켜 땅에 엎드리며 가르침을 청했습니다. 그는 배웠던 것을 모두 버리고 깊이 구가(九家)의 학(學)을 연구하였습니다. 그는 또 불법(佛法)을 독실히 믿으면서도 《주역》의 원리를 들을 때부터는 몸을 그르쳤음을 스스로 후회하여 실의(失意)한 듯 즐거워하지 않다가 6,7년 만에 술병[酒病]으로 배가 불러 죽었습니다. 지난해 내게 보내준 시에,
백수 공부로 누가 득력했나 / 柏樹工夫誰得力
연화세계는 이름만 들었네 / 蓮花世界但聞名
하였고, 또,
외로운 읊조림 매양 근심 속에 나오고 / 孤吟每自愁中發
맑은 눈물 으레 취한 뒤에 흐르네 / 淸淚多因醉後零
했습니다.
그가 죽을 무렵에 여러 번 혼잣말로 ‘무단(無端)히, 무단히.’ 방언으로 ‘부질없이’라는 뜻임. 라고 했답니다. 제가 지은 만시(輓詩)에,
중의 이름에 선비의 행위여서 세상이 모두 놀랐거니 / 墨名儒行世俱驚
슬프다, 화엄의 옛 맹주(盟主)여 / 怊悵華嚴舊主盟
《논어》한 책 자주 읽었고 / 一部論語頻盥手
구가의 《주역》상세히 연구했네 / 九家周易細硏精
찢긴 가사 처량히 바람에 날려가고 / 淒涼破衲風吹去
남은 재 비에 씻겨 흩어져 버리네 / 零落殘灰雨洒平
장막 아래 몇몇 사미승 / 帳下沙彌三四五
선생이라 부르며 통곡하네 / 哭臨猶復喚先生
하였고, 근래 《논어》ㆍ《맹자》를 독실히 좋아하였으므로 중들이 미워하여 김 선생이라고 불렀음. 또,
푸른 산 붉은 나무 싸늘한 가을 / 靑山紅樹颯秋枯
희미한 낙조 곁에 까마귀 몇 마리 / 殘照傍邊有數烏
가련타 떡갈나무 숯 오골(傲骨) 오만 방자한 병통이 있다는 뜻임. 을 녹였는데 / 柞炭可憐銷傲骨
종이돈 몇 닢으로 저승길 편히 가겠는가 / 楮錢那得買冥塗
관어각(觀魚閣) 위에 책이 천 권이요 다산(茶山)을 가리킴. /觀魚閣上書千卷
말 기르는 상방(廂房)에는 술이 백 병이네 진도(珍島)의 감목관(監牧官) 이태승(李台升)은 곧 이서표(李瑞彪)의 아들인데 한번 만나서는 곧 벗이 되어 밤낮으로 싫도록 술을 마셨다. / 養馬廂中酒百壺
지기(知己)는 일생에 오직 두 늙은이 / 知己一生惟二老
다시는 우화도(藕花圖) 그릴 사람 없겠네 / 無人重作藕花圖
맺음말에서 소동파(蘇東坡)의 참료(參寥)에 관한 일을 인용하였음.
하였습니다.
신주(薪洲)에 귀양와 있던 심생(沈生)이 금년 가을에 죽었습니다. 슬프다, 선생의 옛날 술벗이 죽었습니다. 바다를 격해 있던 탓으로 옛날 좋아하던 사이를 계속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나와 친한 사람을 향하여 ‘나의 벗 정공(丁公 정약전을 가리킴)이 전에 「나의 아우(정약용을 가리킴)는 문학(文學)이 나보다 낫다.」고 하였는데, 그 흉회(胸懷)가 끝없이 광탕(曠蕩)한 것은 그의 형보다 못하다.’라고 하더랍니다. 그 말이 증험되었으니, 이는 저를 원망해서 한 말 일 것입니다. 그가 20에 아내와 이별하였는데 금년 9월에 아내가 내려와서 서로 만나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1개월을 남겨두고 부음(訃音)이 갔으니 아, 슬픈 일입니다.
[주-D001] 읍내(邑內)에 …… 되었는데 : 다신계안(茶信契案)이라는 다산의 제자록(弟子錄)에는 읍중제생안(邑中諸生案)이라 하여 손병조(孫秉藻)ㆍ황상(黃裳)ㆍ황취(黃聚)ㆍ황지초(黃之楚)ㆍ이청(李𤲟)ㆍ김재정(金載靖) 등 6인을 열거하고 있는데 이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주-D002] 강홍립(姜弘立) : 자는 군신(君信), 호는 내촌(耐村). 선조 22년(1589)에 진사, 선조 30년(1597)에 알성문과에 급제한 뒤, 검열(檢閱) 등을 거쳐 한성우윤에 이르렀음. 광해군 10년(1618) 진영군(晉寧君)에 봉해짐. 이해에 명(明)의 지원군으로 1만 3천의 군사를 이끌고 요동 정벌에 나섰다가 후금(後金)에 항복하였음. 인조 5년(1627) 정묘호란에 후금 군대의 선도(先導)로 입국하여 화의를 주선함. 역신으로 삭탈 관작되었다가 뒤에 복관됨.[주-D003] 무성(武成) : 신빙성이 없다는 뜻으로 《서경》의 편명임.《맹자(孟子)》 진심(盡心) 하에, “나는 무성편에서 두세 가지 정도만 신빙성이 있다고 본다.” 한 데서 온 말.[주-D004] 질서(疾書) : 성호 이익의 경전연구에 관한 저서에 붙인 이름. 사서(四書)ㆍ오경(五經)에 관하여 맹자질서(孟子疾書)와 같이 경서 이름에다 ‘질서'라는 명칭을 붙였음.[주-D005] 제동야인(齊東野人)의 설(說) : 근거가 없는 허황된 말이라는 뜻. 맹자의 제자인 함구몽(咸丘蒙)이, 순(舜)이 천자가 되자 요(堯)와 고수(瞽瞍)가 순을 섬겼다는 말이 사실이냐고 묻자, 맹자가 이는 제동야인의 말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온 말이다.《孟子 萬章 下》[주-D006] 도인법(導引法) : 몸을 굴신하고 신선한 공기를 체내에 끌어넣는다는 도가(道家)의 양생법(養生法).[주-D007] 탕목읍(湯沐邑) : 그 읍(邑)에서 거두는 구실로 목욕의 비용에 충당하는 읍이라는 뜻으로 천자나 제후의 사유(私有) 영지(領地), 곧 채지(采地)를 말한다.[주-D008] 채양(蔡襄)이나 미불(米芾) : 모두 글씨와 그림에 뛰어난 사람임. 채양은 송(宋) 나라 선유인(仙遊人)으로 자는 군모(君謨). 시문에 뛰어나고 역사에 밝았으며 글씨를 잘 썼다. 시호는 충혜(忠惠). 저서로는 《채충혜집(蔡忠惠集)》 등이 있다.《宋史 卷320》 미불은 역시 송 나라의 양양인(襄陽人)으로 오(吳) 지방에 우거(寓居)했다. 자는 원장(元章), 호는 해악외사(海嶽外史)ㆍ녹문거사(鹿門居士). 글씨와 그림에 뛰어났으며 예부 원외랑(禮部員外郞)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음.《서사(書史)》ㆍ《화사(畫史)》 등 많은 저서가 있다.《宋史 卷四百四十》[주-D009] 서성(庶姓) : 일반 백성이라는 뜻.《시경(詩經)》 소아(小雅) 벌목(伐木)의 주에, “예(禮)에 동성(同姓)ㆍ이성(異姓)ㆍ서성(庶姓)이 있는데, 서성은 왕과 친척 관계가 없는 자이다.” 하였음.[주-D010] 병불(秉拂) : 선종(禪宗)에서, 절에서 불법(佛法)을 가르치는 수좌(首座)가 되는 것을 말함.[주-D011] 구가(九家)의 학(學) : 《주역》을 주석했던 9인의 연구가를 구가라 하는데, 경방(京房)ㆍ마융(馬融)ㆍ정현(鄭玄)ㆍ송충(宋衷)ㆍ우번(虞翻)ㆍ육적(陸績)ㆍ요신(姚信)ㆍ적자현(翟子玄)ㆍ순상(荀爽) 등 9인을 지칭함.[주-D012] 백수 공부 : 참선하며 화두를 참구하는 것. 당(唐) 나라 때 어떤 중이 조주(趙州)에게,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하니, 조주가, “뜰 앞에 있는 잣나무다.” 하였다 한다.[주-D013] 참료(參寥) : 송(宋) 나라의 승려 도잠(道潛)의 호가 참료자(參寥子)인데 시를 잘 지었다. 항주(杭州)의 지과사(智果寺)에서 지냈음. 소동파(蘇東坡)가 황주(黃州)에 있으면서 꿈속에서 그를 만나 시를 읊었는데 7년 뒤에 항주 태수(杭州太守)가 되어 그곳을 방문, 상면하여 즐겼던 고사(故事)를 인용하였다는 뜻.
ⓒ 한국고전번역원 | 박석무 (역) | 19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