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고는 우리나라와 가장 가까이 있는데 이미 문자도 통하지 못하고, 그 말도 화어(華語)와는 아주 다르다
활은 검은 물소 뿔로 삭(槊)을 만들고 자작나무 껍질로 쌌는데 길이는 우리나라 활보다 1장(丈) 반은 길지만 좀 약한 편이다. 자작나무 껍질은 영고탑(寧古塔) 지방에서 채취(採取)하고 궁태(弓胎)는 창평(昌平)ㆍ밀운(密雲) 두 곳에서 벌채하며 화살은 나무로 만드는데 황새 깃을 붙였다. 모두 활촉이 넓적하고 깃이 큰데, 깃은 반드시 비스듬히 붙였으니, 이는 다 호인의 제도다. 긴 활에 큰 살을 다 당기어 말 위에서 달리며 쏘는 것이 비록 그들이 잘하는 것이기는 하나, 활이 약하고 화살이 둔하며 쏘는 법이 심히 엉성하여 멀리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과규(科規)에 표적을 세우는데 말타고 쏘는 데는 30보에 불과하고 걸으며 쏘는 데는 50보에 불과하다. 중국의 경궁(勁弓)ㆍ죽전(竹箭)은 이와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환도(環刀)는 칼날이 길고 넓으며 그 갑(匣)은 심히 좁고 단단하다. 말 위에서 쏘는 총은 길이가 거의 1장(丈)이나 되는데, 그것을 등에 지고 말을 타고 간다. 그 자루가 몹시 짧아서 겨우 철통(鐵筒)을 달아 둘 정도이다. 철통은 길기는 하나 몸뚱이가 가늘고 작아서 만듦새가 심히 가볍고 예리하다. 통이 길기 때문에 탄환을 곧장 공중에 쏠 수 있어, 말을 달리며 나는 새를 쏘아 맞춘다. 납을 가늘게 썰어 많이 재고 쏘기 때문에 잡은 꿩이나 오리 등에 여기저기 납조각이 박혀 있어 어떤 것은 먹을 수가 없다. 보군(步軍)의 총은 우리 총과 비슷한데 철통 머리에 두 갈래로 된 작은 나무를 붙여 보통 때에는 철통의 좌우를 끼고 있고, 총을 쏠 적에는 두 갈래로 벌려 총 머리를 떠받친다. 경성의 팔기 포창(八旗砲廠)과 화약창(火藥廠)을 각각 5성 안에 설치하였는데, 경성 안에서는 때없이 총을 쏘거나 사사로 군기를 팔아 변방으로 나가게 하는 것은 모두 엄금한다.
한편 소ㆍ말ㆍ나귀ㆍ노새는 모두 붙잡아 매지 않고 항상 굴레를 벗겨 들판에 놓아 먹인다. 수백 마리를 작은 아이 하나가 몰아도 흩어지지 않게 한다. 돼지와 양도 또한 그러하다. 대개 축생(畜牲)은 우리나라에 비교하면 잘 길든 것 같다. 말은 마부가 고삐를 끌지 않고 뛰어 올라타고 달리는데 빠르기가 나는 것과 같다. 이것이 곧 호인의 장기(長技)이다. 비록 먼 길을 가더라도 노중에서는 먹이지 않고 자는 곳에 이르러서 안장을 벗긴 뒤에 밤이 깊기를 기다려서야 다만 풀을 주고 물을 먹인다. 그리고 7, 8일이 지나서야 비로소 익은 콩을 먹인다. 말을 부리는 방법은 대개 우리나라 북도와 같다. 서번(西蕃 티베트)의 말을 달마(㺚馬)라 하고 몽고의 말을 몽마(蒙馬)라고 하는데 지금은 몽마ㆍ달마를 논할 것 없이 모두 여위고 또 드물다. 심양 서쪽에서부터 관내(關內)에 이르면서 점점 귀해져서 만나는 것은 대부분 나귀와 노새를 탄 사람이다. 두 층의 등자(鐙子)를 단 큰 말은 볼 수가 없다. 또 들으니, 섬서(陝西) 지방에는 노새와 말이 더욱 드물다 한다. 말은 본래 철(鐵)을 붙이지 않고 나귀는 간혹 철을 붙인 것이 있으나 발 하나의 철이 6개에 지나지 않는다. 짐을 말에게는 싣지 않고 모두 나귀로 싣는데, 안장은 나뭇가지 둘을 휘어서 위로 향하게 하여 물건을 싣기에 편리하게 하였으며, 등자는 나무로 만들었는데 쳇바퀴같이 굽어 있다. 섬서의 나귀가 크기는 하지만 병이 잘 나고, 동팔참(東八站)의 나귀는 작으나 강하다. 면주(綿州) 이후부터 동팔참까지는 나귀가 가장 많다. 또한 주인이 먹여 기르지 않아서 이르는 곳마다 떼를 지어 들 가운데를 뛰어다니며 마른 풀만을 씹어 먹는데, 부리기는 호되게 하여 타기도 하고 싣기도 하며, 나무를 운반하고 매[磨]를 돌리고 수레를 끌고 밭을 가는 등 시키지 않는 것이 없다. 관내(關內) 사람들이 모두 여기에 와서 나귀를 무역하여 간다.
수레는 나귀뿐 아니라 말ㆍ노새ㆍ소 등이 모두 끈다. 말안장은 극히 편리하고 가볍다. 대개 안장이 심히 작아서 말 잔등만을 덮으며 다래[障泥]와 고삐는 모두 소가죽을 쓰지 않고 또한 허다한 장식도 쓰지 않는다. 소위 영롱안(玲瓏鞍)이라는 것은 금은으로 조각하고 꾸며서 휘황하다. 낙타는 본래 몽고산(蒙古産)인데, 몽고 사람들이 모조리 관외(關外)로 몰아내었기 때문에 낙타를 가지고 다니는 자는 아주 없고, 경사(京師)에 이르러야 간혹 있다. 소는 우리나라에 비하면 몸뚱이가 조금 작고 뿔은 매우 긴데 반드시 안으로 굽어져 있다. 우리나라 소는 코를 뚫어야 부릴 수 있는데, 청인들은 원래 코를 뚫는 일이 없고 다만 뿔에 노끈을 매어 제어한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소를 저 사람들에게 팔면 곧 코를 뚫은 나무를 없애고 뿔을 매어서 모는데 감히 달아나지를 못하니 제어하는 기술이 있음을 볼 수 있다.
큰 개는 망아지만 하여 노루와 사슴을 잡을 수 있는데 모양이 여위었다. 작은 개는 고양이만 하여 사람의 품속에 들어오는데 낯선 사람을 보면 반드시 짖고 물어서 사람들이 감히 가까이하지 못한다. 닭은 우리나라 닭과 같아서 알을 많이 품는데 보통은 3, 40개를 넘고 많은 것은 50개에 이른다. 저들에게 물으니 말하기를,
“알 껍질을 쪼아 깨뜨리는 대로 병아리를 계속 둥우리에서 내리기 때문에 많더라도 다 품을 수 있다.”
라고 한다. 닭의 몸이 매우 작고 털이 까칠하고 짧은 것을 우리나라 사람들이 당계(唐鷄)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촉계(蜀鷄)이지 실상 당계는 아니다.
고양이는 모두 빛이 누르고 닭을 잡아먹을 줄을 몰라서 닭과 함께 살며 또 병아리를 안고 잔다. 개와 고양이도 또한 서로 싸우지 않으니 심히 이상하였다. 중국의 가축이 예전부터 이와 같지 않았다면 동자(董子)의 집 닭이 강아지 품어 준 것을 한문공(韓文公)이 어찌 말하였겠는가? 또 집집마다 비둘기를 사랑하여 기르는데 물어보니,
“밤에 시각에 따라서 울고 또 잘 싸우기도 한다.”
라고 한다. 이 비둘기를 싸움시키는 풍속이 당 나라 때의 닭 싸움시키는 것보다도 심하였다. 대개 들으니, ‘중원 사람들이 가축 기르기를 잘하여 뱀이나 쥐까지도 모두 길들인다.’ 하니 괴이한 일이다. 공작은 털이 비록 고우나 실상은 매우 추하며, 뱀과 교접한다고 하는데 참으로 그러한지는 알 수가 없다. 북경 성안의 돼지는 귀가 대단히 크고 관동의 것은 조금 작은데 그래도 우리나라 돼지 귀보다는 크다.
수레는 우리나라 제도보다 작고 바퀴에는 살[箭]을 쓰지 않으며, 2개의 두꺼운 판자를 서로 어긋나게 놓아 십자(十字)로 만들고, 가운데에 구멍을 뚫어 바퀴통[轂]의 양쪽 머리를 꿴다. 수레의 두 다리를 바퀴통 위에 놓아 바퀴통과 서로 물리게 하고, 갈구리를 만들어 끌면 좌우 두 바퀴가 바퀴통을 따라 앞으로 나아간다. 동팔참의 수레는 더욱 작고, 몽고의 수레는 바퀴에 살을 써서 제도가 우리나라와 같은데 극히 날래다. 짐이 무거우면 말 4, 5필 혹은 10여 필로 끌고 가벼운 것도 혹 한두 필로 끄는데, 마소는 적고 나귀와 노새가 반이 넘는다. 또 작은 수레가 있는데 외바퀴로 만들거나 두 바퀴로 만들어 한 사람이 몰고 다닌다. 이것이 말 한 필에 싣는 짐을 싣는다. 거여(車輿)의 제도는 우리나라에서만 쓰지 않는데, 논하는 자가,
“우리나라는 산천이 험하여 다닐 수 없다.”
고 한다. 그러나 청석(靑石)ㆍ회령(會寧)이 매우 가팔라서 우리나라 사행(使行)이 탄 수레는 여러 사람이 모는데도 오히려 가기가 어렵지만, 저들은 가득 실은 수레를 한 사람이 몰고 가는데도 달리기를 평탄한 길과 같이 한다. 또 중국의 태항산(太行山)의 양장(羊腸)과 촉도(蜀道)의 험함이 어찌 우리나라만 못하겠는가? 그런데도 모두 통행하지 않는가? 우리나라로 말하더라도 영남(嶺南)의 농거(農車)와 관북(關北)의 시거(柴車)를 잘 운용하는 것으로 보아 만일 수레를 만드는데 묘법을 다하고 수레를 기술 있게 몬다면 어찌 부릴 방도가 없겠는가?
무릇 각성(各省)의 큰길에는 모두 돈대(墩臺)를 설치하여 수자리 사는 병사[戌夫]를 두고 변두리 지방에는 몽고 병정이 입초를 서서 정찰을 하다가 긴급한 일이 있으면 봉화를 들어 신호한다. 도적이 이르면 자리[蓆]을 걸거나 포를 쏘는데 도적의 많고 적은 것에 따라서 자리를 걸고 쏘는 수를 가감한다. 그리고 긴급하면 역마를 교대하여 급히 보고하게 한다.
들으니, 공자의 고향 궐리(闕里)에 공성(孔聖)의 사당이 있는데, 제도의 장려한 것이 황성(皇城)의 국자감(國子監)보다도 배가 될 뿐만이 아니라 전명(殿名)ㆍ당호(堂號)ㆍ역대의 구적(舊蹟) 및 비갈(碑碣) 등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한다. 그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묘(廟) 앞에 규문각(奎文閣)이 있는데 곧 역대의 서적을 간직한 곳이고, 그 앞에 한(漢), 당(唐) 때의 비각(碑閣)이 있다. 각(閣)의 동서에 모두 문이 있는데 서쪽 문밖에는 영락(永樂 명 성조)ㆍ홍치(弘治 명 효종)의 비가 있고, 그 앞이 곧 동문문(同文門)인데 문의 좌우에 한(漢) 나라, 위(魏) 나라 때의 비를 늘어세웠다. 그 앞이 또 앙고문(仰高門)이며, 동쪽 문밖에는 송(宋) 나라, 금(金) 나라 때의 수묘비(修廟碑)를 늘어세웠다. 동으로 승성문(承聖門)에 들어가면 그 안에 시례당(詩禮堂)이 있다. 이는 공자가 홀로 서 있는데 백어(伯魚 공자 아들)가 뜰에 나와서 시례(詩禮)에 대한 말을 얻어 듣던 곳이고, 그 뒤에 공벽(孔壁)의 유허(遺墟)가 있는데 곧 공자가 조용히 거처하던 곳이다. 당(堂) 앞에는 태초석(太初石) 및 당괴(唐槐)ㆍ은행(銀杏) 나무가 있고, 당 뒤에는 공택(孔宅)의 유정(遺井)이 있다. 또 금사당(金絲堂)이 있는데, 벽 속에서 종[金]ㆍ경쇠[石]ㆍ거문고[絲]ㆍ퉁소[竹]의 소리가 들렸기 때문에 이름한 것이다. 정전(正殿)의 문은 대성문(大成門)이고 앞은 대성전(大成殿)인데, 선사(先師)의 신위(神位)를 봉안하였다. 그 소상(塑像)과 화상(畫像)이 고적 아닌 것이 없다. 신위 앞의 희준(犧樽) 예기(禮器)는 모두 한 장제(漢章帝) 때의 물건이다. 대성전 북쪽에는 성배신위전(聖配神位殿)이 있고 금사당 뒤에는 계성묘(啓聖廟)가 있다. 대성전의 편액은 곧 송 휘종(宋徽宗)의 비백서(飛白書)이다. 강희(康煕 청 성조)가 일찍이 친히 뵈올 적에 또 ‘만세사표(萬世師表)’란 네 글자를 써서 게시하였기 때문에 이 뒤로는 각처 문묘에도 모두 이 네 글자를 현판하였다. 또 행단(杏壇)에는 전자(篆字)로 ‘행단’ 두 글자를 쓴 비(碑)가 있고 단(壇) 앞에 금 장종(金章宗) 때에 돌로 조각한 용로(龍爐)가 있는데 극히 정묘하다. 그 앞에 또 송 나라 어제의 찬(贊)과 미불(米芾)이 쓴 회수(檜樹)를 찬양한 비와, 송 진종(宋眞宗) 때 군신(君臣)이 지은 부자(夫子 공자) 및 72제자를 찬양한 비가 있다. 대성문(大成門) 안 동쪽 뜰에 부자께서 손수 심은 회나무가 있는데, 홍치(弘治) 12년(1499)에 문(門)과 전(殿)이 화재를 당할 때 이 회나무도 가지와 잎이 타고 떨어져서 한 줄기만이 외롭게 남아 있다. 그런데 지금 또 수백 년이 되었지만 마르지도 않고 피어나지도 않은 채 단단하기가 쇠 같으므로 세속에서 철수(鐵樹)라고 이름했다 한다.
궐리묘(闕里廟)로부터 육수문(毓粹門)을 경유하여 연성공(衍聖公) 습봉(襲封) 받은 부문(府門)을 지나 북으로 누항가(陋巷街)를 지나서 곡부성(曲阜城) 북문으로 나가면 동쪽에 높은 토산이 있고 소나무와 잣나무가 울창하다. 이곳이 곧 주공(周公)의 사당이다. 1리를 가서 성림문(聖林門)에 이르면 모두 말에서 내린다. 또 조금 가서 수수교(洙水橋)를 지나면, 곧 부자(夫子)의 묘문(墓門)이다. 묘도(墓道)의 석물[石儀]로는 화표(華表)와 문표석(文豹石)을 설치하였고 묘 위의 초목을 공림(孔林)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모두 당시에 먼 곳의 제자들이 각 나라에 나는 것을 묘 옆에 옮겨 심은 것으로 가짓수가 많아서 다 분변할 수 없다. 오직 해목(楷木)ㆍ시초(蓍草) 두 가지가 가장 뚜렷한데, 해목(楷木)이란 것은 지팡이도 만들 수 있고 또 바둑판도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옹두리로는 표주박을, 잎으로는 채소 또는 차도 만들 수 있고, 열매는 즙(汁)을 내거나 기름을 짜면 초[膏燭]를 만들 만하다. 시초는 열매에서 특이한 향기가 나고 한 떨기에 50줄기가 난다. 또 문초(文草)가 있는데, 겨울에도 마르지 않으며 뿌리ㆍ잎ㆍ꽃ㆍ열매가 모두 5색(色) 5미(味)를 갖추고 있다. 남쪽에는 자공(子貢)이 손수 심은 해수(楷樹)가 있는데, 마르긴 하였어도 썩지 않았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이 그 옆에 정자를 세우고는 해정(楷亭)이라고 이름하였다. 그리고 서쪽에는 자공이 시묘(侍墓) 살던 곳이 있기 때문에 그 자손이 여기에서 자공에게 향화(香火)를 받든다. 그 동쪽에는 송 진종(宋眞宗)이 거가(車駕)를 멈추었던 정자가 있다. 묘문(墓門) 동쪽에는 봄가을 제사를 행한 뒤에 공씨[孔姓]들이 연회하던 당(堂)이 있다. 그 벽 사이에는 모두 송 나라, 원 나라 사람들의 이름이 씌어 있다. 공림(孔林)의 둘레는 18경(頃)이나 되는데, 2000여 년 동안 족당(族黨)이 날로 번성하여 틈도 없이 부장(祔葬)하므로 여러 무덤들은 무덤 위에 또 무덤을 쓰는 일을 면하지 못한다고 한다.
이것이 그 대략이다. 기타 빠진 것이 또한 얼마인지 알 수 없고 보면, 의연한 문물(文物)로 볼 만한 것이 수사(洙泗) 사이에 많을 것이다. 옹정(雍正) 초년에 궐리묘(闕里廟)가 불에 타니 옹정은 곧 조서를 내리어 몸소 자책했다. 그러나 그때 상중(喪中)에 있었으므로 다시 더할 수가 없어 감선(減膳)ㆍ철악(撤樂)하고 친히 국자감(國子監)에 나아가 제사를 올렸다. 그리고 관원을 보내어 궐리에 제사하고 새로 숭성사(崇聖祠)를 세워 성상(聖像)을 봉안했다. 또 조서를 내려 안팎으로 하여금 문묘(文廟)와 학궁(學宮)의 제기(祭器)를 모두 수리하게 하였다. 옹정 때에 부자(夫子)의 5세조를 추봉하여 공(公)을 삼았다가 뒤에 가봉(加封)하여 왕을 삼고, 고조 기보공(旗父公)은 유성왕(裕聖王), 증조 방숙공(防叔公)은 치성왕(治聖王), 조 백하공(伯夏公)은 창성왕(昌聖王), 계성공(啓聖公)은 또한 계성왕(啓聖王)으로 봉하여 소목(昭穆) 위차(位次)에 따라 각각 신패(神牌)를 계성사(啓聖祠) 안에 모셨다. 그리고 봄가을로 제향한다고 한다.
대개 저들은 경서를 대단히 중하게 여겨 문과(文科)에만 사서(四書)ㆍ오경(五經)의 시험을 내는 것이 아니라 무과[武擧]에도 또한 사서의 논을 시험하기 때문에, 비록 천한 사람이라도 경서는 숙독하지 않는 이가 없다. 그리하여 향리 아이들도 배운 것을 물어보면 모두 경서이고 다른 글은 배우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과거에 응하는 사람이면, 사서 문자는 문무공생(文武貢生)을 막론하고 모두 강독하였으며, 말을 모는 사람이나 상점을 차리고 돈벌이를 하는 사람도 이것을 하지 않는 이가 없으니, 문무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으랴? 이미 등과(登科)를 하고 나면 문무가 원래 구별이 없어 모두 진사(進士)라고 칭한다.
역로에서 만나는 사람은 제가 꼭 공생(貢生)이라고 하는데 학술과 문장이 있는 선비는 볼 수가 없어 더불어 말할 만한 자가 하나도 없다. 이것으로 미루어 본다면 모두가 무공생(武貢生)인 모양인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들의 과거에 응한 문자를 보거나 공생이라고 칭하는 것을 들으면, 문무(文武)를 분별하지 않고 문득 선비[士子]로 생각하여 반드시 더불어 강론을 하니 우리나라 사람들의 고루한 것이 또한 가소롭다. 남방의 문공사(文貢士)는 과연 어떠한지 알 수 없으나, 들으니, 제자를 거느리고 글이나 학문을 강론할 뿐 과거에 응하는 것을 대부분 깨끗하게 여기지 않는다 하니, 명 나라 말기의 여유량(呂留良) 같은 선비들이 반드시 다 망하지는 않았을 터인데 만나 볼 수가 없으니 한스럽다.
대개 시는 명 나라 말년 이래로 진자룡(陳子龍)에게서 변하였고 청 나라 초년에 또 전목재(錢牧齋)에게서 변하였는데, 그 근본인즉 오로지 송 나라를 숭상하였다. 그러나 도리어 그 골자는 내버리고 그 털과 가죽만 뽑아 취했으며 정밀 심오한 것은 버리고 비루 용렬한 것만 본받았으니, 곧 송 나라 사람의 썩은 냄새뿐인 것이다. 학문은 강희(康煕 청 성조)와 옹정(雍正 청 세종)이 모두 주자를 극히 높이고 숭상하였기 때문에 모두 주자학이라고 말하지만 그 도(道)는 불교 아닌 것이 없고 그 예는 만주(滿洲) 풍속 아닌 것이 없다. 북방은 원래가 볼 것이 없는 곳이나 남방은 혹 그렇지 않았으리라. 저들 중에 큰 선비라고 일컫는 자라도 그 문자를 상고해 보면, 경서(經書)나 백가(百家)에서 편장(篇章)을 훔쳐다가 유취(類聚)하여 책을 만든 데 불과하고, 따로 입언(立言)하여 의리를 천명한 것은 보지 못하겠다. 사서(四書)에 이르러서는 과장(科場)에서 표절하기 위하여 각양으로 모아 만든 것이 더욱 많다.
대개 강희 때에 여러 글을 편집하는 데 참여한 자로는, 문한(文翰)에는 우통(尤侗)이고, 역학(易學)은 호후(胡煦)로 모두 남방의 거벽(巨擘)이며, 장정옥(張廷玉)도 반드시 그 가운데에 참여하였을 것이다. 지금은 각로(閣老) 우민중(于敏中)과 전 한림학사(翰林學士) 박명(博明)이 또한 칭송을 받는데, 박명은 몽고 사람이기 때문에 저들이 꽤나 배척한다. 필법들은 모두 동기창(董其昌)을 모방한 것인데 안목이 극히 졸렬하다.
그리고 과거(科擧)는 순치(順治) 2년에 자(子)ㆍ오(午)ㆍ묘(卯)ㆍ유(酉)년으로 정하여 시행하고, 제목은 사서 오경의 문장과 책(策)ㆍ논(論)ㆍ표(表)를 낸다. 그리하여 초장(初場)에는 경서ㆍ팔고(八股)의 문장 7편을 짓다가 지금은 7편이 너무 많다 하여 3편은 감하고 다만 사서 문장 2편과 경의 문장 2편을 짓는다. 2장에서는 하사표(賀謝表)ㆍ책(策)ㆍ성리론(性理論)이나 혹 효경론(孝經論) 1편을 짓는데, 만일 묵은 말을 주워 모아 표절[雷同]로 답안[試券]을 바치는 자는 합격시키지 않는다. 초장에는 문장이 매편에 650자를 넘지 못하고, 2장ㆍ3장에서 표(表)는 1000자(字), 논(論)ㆍ책(策)은 2000자를 넘지 못한다. 그리고 답안[試券] 가운데에는 행서(行書)나 초서(草書)를 쓰지 못하며 지우고 고치거나 제내(題內)의 자구를 조잡하게 쓰지 못한다. 전시(殿試)에는 시무책(時務策) 한 편[道]을 짓는다.
대개 청인의 제도는 한결같이 명 나라를 따랐기 때문에 식년(式年) 및 경사로 인하여 과거를 시행하는 규정, 시지(試紙)에 도장을 찍고 문에 들어와서 답안을 거두고 봉미(封彌)하는 관원과, 심지어 간사한 짓을 방지하는 법, 서책 휴대, 외장(外場)에서 베껴 보내는 것을 적발하는 등의 일이 우리나라와 비슷하다. 과장에는 비슷한 글을 모은 유취(類聚)가 많이 출제되므로 책사의 서적은 유취가 반을 차지한다고 한다.
무릇 한어(漢語)에 있어서도 각각 같지 않다. 봉성(鳳城)의 말은 관내(關內)와 다르고 관내의 말은 산서(山西)와 다르며 강남(江南)의 말은 북경과 현저하게 다르다. 그리하여 들으니, 강남 사람은 말을 배운 뒤에 입시(入侍)하게 한다고 한다. 대체로 남북의 발음이 본래 같지 않은데, 북경에서도 원래의 순수한 화어(華語)를 쓰는 것이 아니고 태반이 청어(淸語)를 섞어 쓰고 보면, 아주 남쪽 지방인들 어찌 남만(南蠻)의 말이 없으리라고 보장할 수 있겠는가? 청인ㆍ몽고인은 모두 한어(漢語)를 쓰는데, 한인은 청어를 쓰지 않는다. 그러나 대궐 안과 아문(衙門)에서는 반드시 청어를 쓰게 하므로 한인도 벼슬길에 나오는 자는 청어를 학습하지 않을 수 없다 한다. 한인은 곰배 정(丁) 자를 모르는 무식한 자라도 그 말 자체가 모두 문자이기 때문에 말이 간단하고 음이 느려 청탁(淸濁)이 분명한데, 청어와 몽고어는 쓸데없이 길고 의미가 없으며, 우리나라 말은 번쇄하고 곡절이 많다.
청인은 근본은 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청서(淸書)의 모든 문자는 반드시 한자와 병서(並書)하고, 임금이 보는 문서도 또한 모두 청어로 번역하여 아뢴다. 그러므로 특별히 청서산관 한림(淸書散館翰林)과 서길사(庶吉士)를 설치하여 나이 40이 되지 않은 자에게 청서를 익히게 하나 매양 없어져 가는 것을 근심한다. 그리하여 옹정(雍正 청 세종)은 조서를 내려 거듭 명령하여 만주 관원과 함께 번역하게 하였다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또한 조사(朝士)로 하여금 한어를 강습하게 하는데, 지금은 문장의 형식으로 보아 넘기니 전연 법을 설시한 본의가 없는 것이다. 대개 황명(皇明) 때에는 통역이 일을 많이 알 뿐 아니라 수식하는 말도 한어로 익히기 때문에 사신이 연경에 가면 중조(中朝)의 사대부와 서로 왕래하였다. 그리하여 종계(宗系)의 변무(卞誣)와 임진란의 청병 때 많이 여기에 힘입었다. 어찌 통역배만을 믿어서 뇌물을 준 것이었으랴?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일변으로는 상국(上國)으로 섬기고 일변으로는 오랑캐로 대접하여 비록 봉명전대(奉命專對)는 하지마는 사신이 실상은 저들과 접하여 말할 길이 없고 비록 서로 대하더라도 통역이 중간에 끼지 않으면 의사를 통할 수가 없다. 한번 연관(燕館)에 들어가면 곧 그 문을 잠근 다음 제독(提督)이 엄하게 지키고 역관이 꾸짖어 금한다. 그래서 한 사람도 서로 접하지 못하고 한 걸음도 자유롭게 다니지 못한다. 오로지 주선하고 응대(應對)하는 것을 한결같이 통역의 손에 맡기고 비록 문자로 사정을 통하고자 하더라도 반드시 제독에게 빌어 예부(禮部)에 품하게 하여 그 허락을 얻은 뒤에야 비로소 하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어찌할 도리가 없으니, 곧 나무로 만든 장승과 같아서 하나도 손을 놀릴 곳이 없다.
설사 시 300편을 다 외우고, 구변이 흘러내리는 물처럼 거침이 없더라도 그 누가 들어줄 것이며 비록 진정칠일(秦庭七日)의 통곡을 본받더라도 누가 알아줄 것인가? 지금은 교린(交隣)ㆍ사대(事大)가 사신의 전대(專對)에 있지 않고 실로 역관(譯官)과 은화(銀貨)에 있다. 소위 역관이라는 것이 원래 성실하지 못한 데다가 보통 쓰는 말도 또한 통하지 못하는 데가 많다. 다만 서반(序班)ㆍ역관들에게 의지하는데, 그 통로마저 더욱 허술하여, 통역배가 접촉하는 것도 고작 이런 유에 지나지 못한다. 그 나머지는 모두가 무식한 장사꾼이며, 조정에 있는 사람은 실로 같이 손잡을 만한 형세가 없다. 이것도 이미 걱정스러운데, 또 저들의 기강(紀綱)이 해이되어 우리들의 출입에 농간을 부리는 자가 많아 죄인을 잡아들이는 쇄졸(刷卒)들의 폐단이 몹시 많다. 그리고 우리 원역(員譯)이 또한 너무 많아 한두 수역(首譯) 외에는 모두 한때의 모리배들이 되어 원래 공가(公家)를 위하여 일을 보겠다는 계책은 없다. 그들은 이 다음에 다시 이곳에 오는 것을 기약하기 어렵다고 여겨서인지 이익을 도모하는 길이라면 갖은 방법을 다한다. 그리고 본래 안면이 없는데도 갑자기 저들에게 생색을 내고자 하면 가지고 있는 물건으로 인정을 써야 하는데 그렇게 할 수 없을 때는 반드시 우리나라 사정을 저들에게 다 말하여 친밀한 뜻을 보인다. 곧 저들에게 잘 보일 수만 있다면 못하는 말이 없으므로 사행의 처소에 일어나는 일동 일정과 우리나라의 은밀한 일이나 또 자잘한 얘기까지도 저들이 자세히 알도록 알려 준다. 앞으로 취해야 하는 방도로서는 쇄졸(刷卒)들을 잘 요리하고 원역(員譯)의 수를 줄이고 행리(行李)를 극히 간단하게 한 뒤라야 우리들이 지켜야 할 일이 엄하게 단속될 수 있을 것이다.
또 서쪽으로 강변(江邊) 사람과 북쪽으로 육진(六鎭) 백성은 모두 저들의 심복이고, 의주[灣上]와 봉성(鳳城)은 한집과 같이 강을 격한 것뿐이어서 모두가 조석으로 서로 만나므로, 일찍이 강변 사람과 이야기해 보니, 심양ㆍ흥경(興京)에서 백두산 지방까지 산천과 도로를 환하게 알지 못하는 자가 없었다. 다른 일도 이와 같을 것이니 얼마나 마음 아픈 일인가? 또 역원(譯院)에 사학(四學)을 베풀어놓기는 하였으나 근래에는 모두 버려져서 왜학(倭學)은 거의 없고, 한학(漢學)은 훈상(訓上) 두어 사람 외에는, 인재의 많고 적음은 그만두더라도 말도 통하기가 어렵다. 교린(交隣)과 사대(事大)에는 말 잘하는 것이 중한데 이러한 인물, 이러한 언어를 가지고 장차 어떻게 손을 써서 응접(應接)하겠는가? 청학(淸學)ㆍ몽학(蒙學)은 더욱 버려 두었는데 몽학이 가장 심하여 비록 배우고자 하나, 우리나라에는 실로 그 말을 자세히 아는 자가 없다. 청인은 이미 문자를 해득하고 또 한어를 할 줄 알므로 청학은 폐하더라도 오히려 말을 통할 길이 있지마는, 몽고는 우리나라와 가장 가까이 있는데 이미 문자도 통하지 못하고, 그 말도 화어(華語)와는 아주 다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이렇게 몽학에는 전혀 신경쓰지 않아 한 사람도 입을 열어 말 한마디 할 자가 없으니, 만일 혹시 몽고에 일이 있으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참으로 한심하다.
태의원(太醫院)의 여러 의원들은 모두 사환(仕宦)하는 사람이다. 방서(方書)에는 극히 해박하나, 약방문은 모두가 공운림(龔雲林)의 유법(遺法)이어서, 재료는 심히 많은데 푼수[分數]는 극히 경하였으니 실은 의리(醫理)를 깊이 연구한 자가 없는 듯했다. 약을 칼로 써는 것이 얇고 또 가늘어서 조제하는 법이 정밀한 것 같으나, 향재(鄕材)는 묵어서 썩지 않는 약재가 없으며 침술(鍼術)은 더욱 좋은 솜씨가 없다. 침은 우리나라 것에 비교하면 심히 무디기 때문에 침을 맞는 자가 더욱 괴로워한다. 이것을 우리나라 사람들은 비웃지만 우리나라 침은 너무 가볍고 또 뾰족하다. 이것은 실상 본 푼수에 맞추어서 그러한 것이다. 전하는 자가 말하기를,
“원(院) 안에 옛날 동인(銅人)이 있었는데, 이것은 처음에 바다 조수에 밀려 솟아 나온 것으로, 물을 그것에 부으면 관절 구멍마다 물이 통해 나온다. 그래서 침구(針灸)를 시험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침맞은 자국에 빛이 푸르러 환하게 햇빛에 빛났다.”
라고 한다.
약왕묘(藥王廟)는 천경사(天慶寺) 옆에 있는데 전(殿) 위에는 삼황(三皇)과 10개 명의(名醫)의 소상(塑像)을 만들어 앉혔다. 모두 의약(醫藥)에 유공한 사람들로 매달 초하루 보름이면 남녀가 모여들어 사당 안에서 절하고 빈다고 한다.
관동(關東)에서 북경까지 모두 만주의 예를 써서, 서로 보는 데에 읍(揖)만 하고 절은 하지 않으며, 공경할 때는 국궁(鞠躬)을 하고 감사할 때는 고두(叩頭)를 한다. 그리고 꿇어엎드려 손을 짚고 머리를 조아리는 것은 곧 배례(拜禮)이다. 만일 친절한 사람을 만나면 손을 잡아 흔들고 웃으며 ‘호호(好好)’라고 기쁜 뜻을 표한다. 사람이 만일 병들어 죽으면 집 가운데에 두지 않고 물억새풀[薍蕈]로 집을 만들어서 초빈(初殯)한다. 부모의 상(喪)에도 발인(發靷)한 뒤에는 곧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는다. 그러기 때문에 입관 후 즉일로 발인한다. 널[柩]은 모두 잡목으로 쪽을 붙여서 만드는데, 소나무ㆍ삼나무는 극히 귀할 뿐 아니라 그것을 택할 만한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그 제도는 배[舟]와 같은데 심히 크다.
시체는 염(斂)하여 묶지 않고 옷과 이불만 갖추어 널 가운데에 눕힌다. 지판(地板)이 심히 넓어서 협판(挾板) 밖으로 나가고 그 아래에는 구름 모양을 그린다. 그리고 양 모서리에는 수복(壽福) 글자를 새기며 사치하는 자는 금벽(金碧)을 바른다. 여러 날 기한을 정해서 승려[僧]들을 불러모아 경(經)을 외고 풍악을 울려 크게 불사(佛事)를 베푼다. 조문하는 자가 오면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면 영접한다. 그러면 손은 다만 들어와서 분향(焚香)하고 상주의 손을 잡을 뿐이다. 상여는 우리나라의 유거(柳車)와 비슷한데, 메는 인부가 대단히 많고, 영거(靈車) 위에는 반드시 흰 수탉 한 마리를 싣는데 그 의미를 알 수가 없다. 명정(銘旌)은 매우 길다.
승려들이 종이돈[紙錢]을 흩고 피리ㆍ바라를 울리며 앞에서 인도한다. 반혼(返魂) 때에도 또한 그러하다. 발인부터 장사 때까지의 일반 제구를 모두 승려들을 시켜 준비하고 상주의 집에서는 그 값만 계산하여 준다. 그리하여 승려들은 이것으로 생활을 한다. 죽은 뒤 전(奠)을 드리고, 장사 지낸 뒤에 우제(虞祭)ㆍ졸곡(卒哭)ㆍ부제(祔祭)를 올리는 것은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 반드시 칠(七)과 살(煞)을 닦아서 명복(冥福)을 빈다. 소위 ‘칠’이라는 것은 불사이고, ‘살’이라는 것은 무사(巫事)를 말한다. 상복(喪服)의 제도는 대강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모방하였는데, 생포(生布)를 쓰지 않고 면포(綿布)로 장의(長衣)를 만든다. 그는 우리나라 도포(道袍)의 제도와 같은데 넓은 소매가 없고, 검은 옷 위에 입었다가 장사 지낸 뒤에는 반드시 길복을 입으므로 복색이 보통 사람과 구별이 없다. 혹은 겉옷 속에 작은 포대(布帶)를 띠는 자도 있다. 들으니 그 제복(祭服)에는 벽령(辟領)과 부판(負版)은 있으나 수질(首絰)은 없고, 소위 요질(腰絰)이라는 것은 대단히 크고 길어서 흐트러져 늘어진 끝이 땅에 끌리며 상장(喪杖)은 심히 짧다고 한다.
상인(喪人) 외에 오복친(五服親)이 삼베옷을 입는 것은 보지 못하고, 오직 상(喪)이 있으면 친소(親疎)를 막론하고 상인 이하 남녀가 모두 흰 베로 머리를 두르는데 방관(方冠)의 모양과 같다. 이것은 문포(免布)의 제도인 듯한데 몇 촌(寸)의 친족에 한하는지 알 수가 없다. 상제(喪制)는 모두 이일역월제(以日易月制)를 쓰는데, 한인은 간혹 백 일 동안을 시묘(侍墓)하거나 심상 삼년(心喪三年)을 하는 자도 있다. 벼슬이 있는 자는 백 일이 지난 뒤에는 모두 기복(起復)하는데 혹 상제를 지키고자 하면 조정에서 그대로 들어준다. 청인은 백 일이면 제복(除服)하고, 한인도 팔기하(八旗下)와 하천(下賤)은 청인의 풍속을 따른다고 한다.
이번 사행(使行) 때에 주막 주인이 우리들의 복색이 흰 것을 보고, 역배(譯輩)에게 물으므로 대답하기를,
“국상(國喪) 중이어서 화려한 의복을 입지 않는다.”
하니 말하기를,
“우리 한인도 명 나라의 옛 제도를 써서 모두 삼년상을 입고, 벼슬하는 사람 역시 상이 끝나기를 기다려서 벼슬하는데, 청인(淸人)은 그렇지 않다.”
고 하였다. 그 말을 믿기는 어렵지만 혹 예전 풍습을 준행하는 것이 아닐까?
장사 지내는 예는 혹은 널[柩]을 떠메다가 들판에 놓고 큰 돌로 그 위를 눌러 놓는다. 그리고는 멋대로 썩게 둔다. 혹은 불에 태우는데 타고 남은 뼈를 추려서 사기 항아리에 담아 묻고 흙 두어 줌을 가져다가 덮어 놓는다. 그것을 성분(成墳)이라고 한다. 또는 불에 태우지 않고 관곽(棺槨)을 갖추어 묻는 자도 있다. 대개 청인은 모두 화장을 하고 한인도 그러한데 혹 화장을 하지 않는 자도 있다. 화장한 무덤은 그 모양이 한 삼태기 흙 위에 두어 주먹 돌을 쌓아 놓은 듯하고, 시체 전부를 장사한 봉분은 모양이 크기는 하나 위가 심히 뾰족하며 백회로 바르고 사초(莎草)를 덮지 않는다. 더러는 봉분 위에 나무를 심을 뿐 당(堂)ㆍ부(斧)와 같은 무덤의 제도는 끝내 볼 수가 없었다. 영역(塋域)이 모두 길옆에 있는데, 원래 땅을 잡아 쓰는 법이 없다. 부호(富豪)의 집은 다만 화표(華表)와 비갈(碑碣)을 세운다. 그리고 반드시 하얀 담으로 두르고 담 안에는 향당(享堂)을 설치하며, 혹 잡목을 심는다. 이 점에 있어선 황명(皇明) 때의 예전 분묘도 모두 이와 같다.
그 국제(國制)를 상고하여 보면, 분묘가 왕공(王公)부터 두르는 담의 크기나 그 향당(享堂)의 칸 수가 모두 정한 한계가 있다. 비석은 이수(螭首)ㆍ용두(龍頭)ㆍ구부(龜趺)가 또한 각각 정한 제도가 있고, 망주(望柱)ㆍ석인(石人)ㆍ양마석(羊馬石) 등도 대소 장단이 모두 품등(品等)에 따라 같지 않다. 그런데 석인과 양마석은 세운 곳을 보지 못하였고 상석(床石)도 모두 없었으며 묘제(墓祭)를 행하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듯하다.
대개 화장은 석씨(釋氏)에서 시작되었는데, 금 나라와 원 나라가 중국에 들어와 지배하면서 풍속이 된 것이다. 연경(燕京)의 풍속은 청명날에 주인 없는 널을 모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불태워 버린다. 그리고 동자의 시체는 10여 세 된 아이의 시체라도 들 밖에 버려 모두 개 돼지에게 먹인다. 내가 관사 사람에게 묻기를,
“어찌해서 매장하지 않고 차마 이런 일을 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우리 풍속은 으레 이와 같다. 이런 동자들은 죽은 뒤에 곧 개 돼지를 시켜 남김없이 먹어치우게 하는 것이 깨끗하다. 무엇 때문에 매장을 하고 불태우랴?”
하였다. 이른바 어른과 어린이를 막론하고 엄토(掩土)하여 장사하는 예를 폐지한 지가 이미 오래다. 이것은 다만 청인의 죄가 아니라 실은 금 나라, 원 나라로부터 이미 그러한 것이다. 그리하여 연경(燕京)에서 동쪽만 그러할 뿐이 아니라, 지금은 남방이 더욱 심하다 한다. 청인ㆍ한인이 모두 예에 어긋나고 좋지 못함을 알기 때문에 원 세조(元世祖)가 일찍이 시체를 불태우는 것을 엄하게 단속하여 법전[典章]에 싣기까지 하였고, 강희(康煕 청 성조)는 가난하여 장례를 주선하지 못하는 자와 객사하여 고향에 돌아와 장사하지 못하는 자 외에는 화장ㆍ수장(水葬)을 하거나 죽은 시체를 버려 여러 해가 되도록 뒹굴리는 것은 일체 엄금하였다. 저들의 문자 중에도 불사(佛事)를 배척하고 화장을 경계하는 말이 많아, 여러 번 간절히 강조한 정도뿐만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끝내 금하지 못하였다.
상가에서 북치고 피리 불고, 조객을 대접하는 것이 역시 원 나라의 유풍(遺風)이다. 청인은 말할 것도 없지마는, 명 나라에서도 오히려 이어받았으니 무슨 까닭인가? 5, 6장(丈)이 되는 명정(銘旌)과 100여 필이나 되는 송백(送帛), 출빈(出殯)하는 절차와 성분(成墳)하는 제도가 황명 때 그릇된 풍습이 아닌 것이 없다. 또 들으니, 명 나라 때에 기복ㆍ공복[朞功] 이하 상인은 효모(孝帽)의 꼭대기에 모두 붉은 융(絨) 한 떨기를 달고 ‘화효(花孝)’라고 하였다 한다. 명 태조(明太祖)가 비록 중화(中華)의 옛 제도를 다 회복하였다 하나 실상은 금 나라, 원 나라의 호풍(胡風)을 바로잡아 고치지 못하여 선왕(先王)의 제례(制禮)가 문득 없어지고 말았으니, 이것은 이천(伊川)에 가서 피발(披髮)한 것을 보지 않고도 백 년 뒤에는 오랑캐가 될 것을 점칠 수 있는 것이다.지금에 이르러서는 청인이 도리어 금하고 경계하여, 송빈(送殯)할 때에 한인이 잔치를 베풀어 조객을 대접하고 노래하고 희롱하며 풍악을 울리는 일을 본받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상여를 메는 인부도 품등에 따라 한계를 정하고, 명정은 9척을 넘지 못하게 한다. 또 상을 입고 종사(從仕)하는 것과 상을 벗기 전에 길복을 입는 것과 상중에 장가드는 것을 금하는데, 이것을 어기지 않고 그대로 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금법을 베푼 것만은 엄격하였다.
그 풍속이 이미 모두 화장을 하며 혹 매장하는 자가 있더라도 분묘가 또한 평지에 있으므로 풍수(風水)의 법을 논할 것이 없을 듯한데, 가항(街巷) 사이에는 지술(地術)을 잘 안다고 문지방에 방을 붙인 자가 의원, 점쟁이와 서로 동등하였다. 또 풍수에 혹하여 때가 지나도 장사 지내지 않는 것이나, 지사(地師)의 꾐에 빠져서 개장하는 것이나, 강족(强族)이 남의 장사 지내는 것을 막는 것은 모두 금하는 법령이 있으니, 저들 중에서도 풍수의 폐단이 있어서 그러한 것일까?
제례(祭禮)는, 관동(關東)에서는 모두 만주의 예를 쓰기 때문에 무지하기가 특히 심하다. 그래서 소위 사당(祠堂)이라는 것은 저들의 중당(中堂)으로 들보 사이에 감실 하나를 설치하고서 3대(代) 혹은 4대의 조상 화상과 아울러 기명(器皿), 축물(畜物)을 그린다. 그리고 향로ㆍ향합을 그 앞에 놓고 때로 분향(焚香)하며 머리를 조아릴 뿐이다. 내가 일찍이 지적하여 관사 사람에게 묻기를,
“이것이 과연 너의 사당인가? 나귀ㆍ말ㆍ닭ㆍ개가 사람과 아울러 있으니 누가 너의 조상이냐?”
하니, 그 사람도 또한 웃었다. 상가에서 장사 지낸 뒤에 전(奠)을 올리는 절차는 없는데, 소위 궤연(几筵)이라는 것을 탁자 위에 만들어 온돌방 안에 모신다. 그리고 향로와 향합을 그 앞에 놓고서 조석으로 분향하며 머리만을 조아린다. 신주(神主)는 그 제도가 한결같지 않아 혹은 위판(位板) 같고 혹은 거전(居前)ㆍ거후(居後)도 없이 신혈(神穴)만 뚫었다. 대소 장단과 제주(題主)의 규격이 또한 각각 같지 않은데, 모두 머리는 둥글게 하고 부방(跗方)은 심히 작고 방제(傍題)는 쓰지 않는다. 혹은 시조(始祖)와 증조(曾祖) 이하만 제사하고, 혹은 신주를 만들지 않고 두루마리 한 폭을 만들어서 자기 성씨의 시조(始祖)부터 열서(列書)하여 방친(傍親)에게까지 미친다. 대개 일정한 예가 없고 각각 제 뜻에 따라서 쓰는 것 같다
위장(慰狀)도 또한 규식(規式)이 없어 가례(家禮)와 다르다. 기제사는 행하지 않으며, 분향하고 머리를 조아리는 외에 기타의 예절 찬품(饌品)은 모두 볼 것이 없다. 청명날 무덤에 가면 흰 종이로 작은 기를 만들어 분묘 위에 꽂는데 역시 그 뜻을 알 수 없다.
관례(冠禮)에 있어서는, 출생하여 털이 마르기도 전에 다 깎으므로, 모자를 쓰는 것은 다시 논할 것도 없고, 남녀의 분별은 실로 명 나라 제도를 따랐기 때문에 그 법이 또한 엄하다. 무릇 동성혼(同姓婚)ㆍ존비혼(尊卑婚)ㆍ상피혼(相避婚)ㆍ양천혼(良賤婚)이나 처첩(妻妾)이 차서를 잃은 것, 사위를 쫓고 딸을 시집보내는 것은 모두 금하고, 남편이 비록 갑자기 죽더라도 3년이 된 뒤 관가에 고하여야 개가하는 것을 허락한다. 사위를 맞는 예는 채붕(綵棚)을 맺어서 행하는 것에 불과하며, 원래 전안(奠雁)과 신랑 신부가 맞절하는 등의 예절이 없고 신부가 시부모를 뵐 때는 3배를 우리나라 신부와 같이 3배를 행한다고 한다.
이것은 모두 오랑캐 풍속이므로 다 고례(古禮)로써 책망할 것은 없으나, 육침(陸沈)된 지가 이미 오래되어 황명(皇明)도 바로잡아 고치지 못하였으니, 대개 중원의 풍속이 이 습관에 많이 물들었을 것이다. 한인은 청인과 결혼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데 빈궁한 자는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를 수치로 여긴다. 무릇 그 혼취(婚娶)하는 것은 중매를 쓰지 않고 부자는 은으로 처첩을 사고 가난한 자는 죽을 때까지 짝을 얻지 못했다. 한인이나 사환하는 자는 그렇지 않다고 하지만 참인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다. 일찍이 들으니, ‘강남(江南)의 유식한 선비는 간혹 주 문공(朱文公)의 ‘가례(家禮)’를 강구하여 행하는 자가 많이 있다 한다. 그리고 수빙(受聘)한 여자가 예를 지켜 신랑이 죽은 데에 분곡(奔哭)을 하면, 문에 들어가서 영연(靈筵)에 절하고는 시체에 기대지 않고 주인에게 조상만 한다고 한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아녀자가 변에 임하여 예를 차리는 것이 오히려 이와 같으니, 강남의 혼상(婚喪) 제도는 과연 북방의 전연 예절이 없는 것과는 같지 않은가 보다.
호속(胡俗)은 꺼리는 것이 특히 심하다. 원 나라는 건국(建國)ㆍ건원(建元)ㆍ궁문(宮門)의 이름을 대부분 《주역》의 건괘(乾卦)ㆍ곤괘(坤卦)의 글에서 취했다. 그리하여 둔(屯)ㆍ몽(蒙)ㆍ사(師)ㆍ박(剝)ㆍ이(离)ㆍ곤(困)ㆍ규(睽)ㆍ혁(革)ㆍ점(漸)ㆍ승(升)ㆍ무망(無妄)ㆍ대과(大過)ㆍ소과(小過) 등의 괘(卦)를 군신(群臣)의 전(箋)ㆍ표(表)에 쓰지 못하도록 금하고, 혹 쓰면 즉각 논박한다. 무릇 회피(回避)하는 글자가 179자인데, 선(仙)ㆍ영(靈)ㆍ귀(歸)ㆍ화(化)ㆍ천(泉)ㆍ능(陵) 등의 글자도 모두 금하여 전장(典章)에 실려 있다. 오직 주현(州縣)의 이름은 고친 것이 없다.
청인이 꺼리는 것이 무슨 무슨 글자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대개 들으니, ‘사(死)ㆍ종(終) 등의 글자를 몹시 꺼린다. 그러므로 연종(年終)의 종(終) 자를 반드시 문자에는 연말(年末)로 고쳐 쓰고, 옹정(雍正 청 세종)의 생일(生日)이 10월에 있기 때문에 그때에는 감히 사(死) 자를 말하지 못한다.’고 한다. 또 축원(祝願)ㆍ기송(祈頌)에 갖은 방법을 다하여 문미(門楣)에는 반드시 송도(頌禱)하는 말을 쓰고, 복(福)ㆍ녹(祿) 등의 글자는 어느 곳이나 다 쓴다. 그래서 기명(器皿)ㆍ음식(飮食)ㆍ관곽(棺槨)의 위에까지도 두루 쓰지 않는 곳이 없으니, 이것도 또한 원 나라, 명 나라의 유풍인지 모른다. 명 나라 말년에 츰적(闖賊)이 복왕(福王)을 죽이고 그 피를 취하여 사슴의 피에다가 타서 장사들에게 먹이면서 이름을 복록주(福祿酒)라 하였고, 유적(流賊) 이자성을 죽였을 때에도 이런 글자를 썼으니 참혹한 일이다. 중국에서는 요순(堯舜) 이래로 모두 천명을 받은 땅으로써 천하를 차지한 칭호를 삼았었는데 호인은 혹 방언(方言) 혹 자의(字義)를 택하여 그 나라의 이름을 정하였다. 거란(契丹) 이전에는 하나하나 두루 들 것도 없고 금 나라ㆍ원 나라ㆍ청 나라도 또한 이러했다. 황명(皇明)은 비록 중국이라고는 하지만 ‘일월병명(日月幷明)’이라는 비결을 인용하여, ‘명(明)’ 자로 별달리 국호(國號)를 만들었으니 이 뒤 중원에 다시 왕자(王者)가 일어나더라도 장차 이 제도를 답습하고 다시는 지명으로 국호를 삼지 않을 것인가? 명 나라 말년에 동요(童謠)가 있었는데, ‘소매 위에서 말이 달리고[袖上走馬] 입 속에서 연기가 나는[口中生煙] 자가 천자가 된다.’고 하였다. 청인의 의복은 소매 가에 모두 말 발굽 형상을 만들고, 담배[南草]를 피우기 좋아하기 때문에 입 속에서 과연 연기를 낸다. 그래서 비결이 맞았다고 한다. 지금 노구교(蘆溝橋)의 삼문(三門)이 명 나라와 청 나라에서 모두 맞았기 때문에, 태극문(太極門)을 장래의 비결로 삼는다 하는데 혹 그러할는지 모르겠다.
나라의 대상(大喪)에는 이일역월(以日易月) 제를 써서, 왕 이하 문무관(文武官) 그리고 경사(京師)에 있는 군민 모두가 흰 옷을 입어, 27일 만에 제복(除服)하는데, 기도도 하지 않고 제사도 지내지 않고 혼인[嫁娶]도 하지 않고 음악도 듣지 않는다. 제복하기 전에는 표본(票本)에 남색 물감으로 글씨를 쓰고, 각 아문(衙門)의 공문에는 남인(藍印)을 쓴다. 그리고 15일 후에는 진주(陳奏)하는 글에 주인(硃印)을 쓴다. 경성 안의 여러 사관(寺觀)은 대상(大喪) 날로부터 시작하여 각 종을 30만 번 쳐서 소리내는데, 그 뜻을 알지 못하겠다. 청인이 모두 명 나라의 전례(典禮)를 따랐으니, 이것도 또한 명 나라의 제도인지? 왕공 대신의 상제(喪制)까지도 모두 의절이 있어 사전(祀典)에 실려 있다. 대개 순치(順治 청 세조)가 원, 명 이래의 의주(儀註)를 가지고서 일대의 제도를 고정(考定)하였다고 한다.
무릇 제사일(祭祀日)은, 예부(禮部)에서 매년 9월에 흠천감(欽天監)에 통지를 보내어 날을 택하여 태상시(太常寺)에 알린다. 재계[致齋]하는 것은 대사(大祀)가 3일, 중사(中祀)가 2일인데, 태상시는 하루 앞당겨서 재계동인패(齋戒銅人牌)를 낸다. 천지단(天地壇)ㆍ기곡단(祈穀壇)ㆍ태묘(太廟)ㆍ사직(社稷)이 대사(大祀)로, 모두 황제가 친히 제사하거나 혹 관원을 보내어 대행(代行)하고, 조일단(朝日壇)ㆍ석월단(夕月壇)ㆍ역대 제왕묘(歷代帝王廟)ㆍ문묘(文廟)ㆍ선농단(先農壇)이 중사(中祀)로, 조일단은 갑(甲)ㆍ병(丙)ㆍ무(戊)ㆍ경(庚)ㆍ임(壬)년에 친히 제사하거나 혹 섭행(攝行)하고, 석월단은 축(丑)ㆍ진(辰)ㆍ미(未)ㆍ술(戌)년에 친히 제사하거나 혹 섭행하며, 역대 제왕묘ㆍ문묘ㆍ선농단은 특히 친제(親祭)한다. 그리고 그 나머지는 관원을 보내어 대행한다. 태세(太歲)ㆍ신기(神祇) 등의 단과 선의(先醫)ㆍ동악(東岳)ㆍ성황(城隍) 등의 묘가 소사(小祀)로, 역시 모두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한다.
그리고 제수(祭需)는, 술ㆍ젓[醢]은 광록시(光祿寺)에서 가져다 쓰고, 과일ㆍ물고기ㆍ죽순ㆍ납촉(蠟燭) 등 물건은 태상시(太常寺)에서 가져다 쓰고, 희생(犧牲)은 양생소(養牲所)에서 가져다 쓰고, 갖가지 향(香)ㆍ폐(幣)ㆍ축판(祝版)과 악생(樂生)이 입는 물건이나 가지는 물건은 모두 공부(工部)에서 가져다 쓰고, 자성(粢盛)ㆍ소채(蔬菜)는 선농단묘(先農壇廟) 안에서 취하여 쓴다.
매년 동짓날 자시에 원구(圜丘)에서 하늘에 제사하고 태조(太祖)ㆍ태종(太宗)ㆍ세조(世祖) 및 일월(日月)ㆍ성신(星辰)ㆍ풍운(風雲)ㆍ뇌우(雷雨)를 사종단(四從壇)에 배향하는데, 단은 정양문(正陽門) 남쪽에 있다.
제례(祭禮)의 악장(樂章)은 영신(迎神)ㆍ번시(燔柴)에는 시평장(始平章)을 연주하고, 전옥백(奠玉帛)에는 경평장(景平章)을 연주하고, 진조(進胙)에는 함평장(咸平章)을 연주하고, 초헌(初獻)에는 수평장(壽平章)을 아뢴다. 축판(祝版)은 푸른 종이에 주서로 쓰는데, 그 축문(祝文)에 이르기를,
“사천자 신(嗣天子臣)은 감히 밝게 황천상제(皇天上帝)께 고합니다. 때는 동지(冬至)로서 육기(六氣)가 시작하기에, 공경히 전례(典禮)를 따라서 삼가 신하들을 거느리고 옥백(玉帛)ㆍ희생(犧牲)ㆍ자성(粢盛)ㆍ서품(庶品)으로 이 인료(禋燎)를 갖추어 공경히 상제께 제사하고 태조ㆍ태종ㆍ세조를 받들어 배향합니다. ……”
했고, 아헌(亞獻)에는 가평장(嘉平章)을 아뢰고, 종헌(終獻)에는 옹평장(雍平章)을 아뢰고, 음복[受胙]에는 희평장(煕平章)을 아뢰고, 송신(送神)에는 태평장(太平章)을 아뢰고, 망요례(望燎禮)에는 안평장(安平章)을 아뢰고, 환궁하여서는 우평장(祐平章)을 아뢴다.
하짓날 묘시에는 방택단(方澤壇)에서 땅에 제사하되, 배향(配享)은 하늘에 제사하는 의식(儀式)과 같았다. 그리고 오악(五岳)ㆍ오진(五鎭)ㆍ사독(四瀆)ㆍ사해(四海)를 사종단(四從壇)으로 나눈다. 제례는 악장(樂章)이 각각 다르고 축판은 누런 종이에 먹으로 쓴다. 그 축문에 이르기를,
“사천자 신은 감히 후토 황지신기(后土皇地神祇)에게 밝게 고합니다. 때는 하지를 당하여 여러 물건이 점점 형통하고 생장 발육하여 생명 있는 것 모두가 힘입으니, 공덕이 지극히 두터워서 위로 상제(上帝)와 같습니다. 삼가 옥백ㆍ생례(牲醴)ㆍ자성ㆍ서품으로 공경히 제사하고 삼제(三帝)인 태조ㆍ태종ㆍ세조를 받들어 배향합니다. ……”
하였다. 정월 상신일(上辛日) 자시에 상제께 제사하고 기곡례(祈穀禮)를 대향전(大享殿)의 황궁우(皇穹宇)에 행한다. 모든 제의(祭儀)는 원구(圜丘)와 같은데 악장은 그 식이 각각 다르고 축판은 방택단(方澤壇)과 같다. 축문에 이르기를,
“사천자 신은 감히 황천상제(皇天上帝)께 빌며 아룁니다. 신이 권명(眷命)을 이어받아 만방(萬方)을 무육(撫育)하므로 생각이 민생(民生)에 간절하여 평안하게 기르기를 도모합니다. 이에 절후가 상신(上辛)에 미치어 봄 농사가 시작됩니다. 성곤(誠悃)을 다해 위로 넓은 은총을 맞으려고, 삼가 신하들을 거느리고 옥백ㆍ생례ㆍ자성ㆍ서품으로 공손히 상제께 제사하오니, 엎드려 빌건대 밝게 조감(照鑑)하시어 때맞추어 비 오고 볕나서 백곡이 이루어지고 삼농(三農)이 힘입게 하소서. 삼제(三帝)를 받들어 배향합니다. ……”
하였다. 태묘(太廟)는 오문(午門) 좌편에 있는데 정전(正殿)의 소목(昭穆)은 예전 제도와 같다. 동무(東廡)는 왕위(王位)이고 서무(西廡)는 공신배위(功臣配位)이다. 시향(時享)은 맹춘(孟春)에는 상순(上旬)의 길일(吉日)을 쓰고, 여름ㆍ가을ㆍ겨울의 삼맹월(三孟月)에는 모두 삭일(朔日)을 쓰며, 섣달 그믐에는 대협례(大祫禮)를 행한다. 4월에는 천지를 대향전(大享殿)에서 합하여 제사하고, 6월 상무일(上戊日) 자시에는 사직단(社稷壇)에 제사하는데, 단은 오문(午門) 우편에 있다. 태사(太社)는 후토 구룡씨(后土句龍氏)로 배향하고 태직(太稷)은 후직씨(后稷氏)로 배향한다. 사(社)의 신주는 돌을 쓰고, 직(稷)은 신주가 없이 나무로 신패(神牌)를 만들어서 신고(神庫)에 간직해 두었다가 제사 때에 단 위에 모신다. 축판은 흰 종이에 먹으로 쓰고 누런 종이로 가를 둘렀다. 축문에 이르기를,
“사황제(嗣皇帝)는 감히 사직의 신에 고합니다. 아름다운 곡식을 내시어 우리 많은 백성에게 먹이시매 만세토록 길이 힘입고 있습니다. 이에 중춘(仲春)을 당하여 삼가 옥백ㆍ생례ㆍ자성ㆍ서품으로 제사하고 후토 구룡씨, 후직씨로 배향합니다. ……”
하였다. 춘분(春分) 날 묘시에는 조일단(朝日壇)에 제사하는데, 단은 조양문(朝陽門) 바깥 동교(東郊)에 있다. 제례는 악장이 각각 다르고 축판은 붉은 종이에 주서로 썼다. 축문에 이르기를,
“사천자는 삼가 대명지신(大明之神)께 고합니다. 신은 양정(陽精)의 종(宗)이요 열신(列神)의 수(首)입니다 신광(神光)이 아래로 비치어 사극(四極)에 빠뜨림 없이 공이 고금에 드리우고 있어, 온 천하가 우러러 힘입고 있습니다. 이에 중춘을 당하여 전례에 따라 삼가 옥백ㆍ생례의 의식으로 공손히 신께 제사하오니, 엎드려 바라건대 흠향하고 굽어살펴 백성들에게 복을 주소서. ……”
하였다. 추분(秋分) 날 묘시에는 석월단(夕月壇)에 제사하는데, 단은 부성문(阜城門) 바깥 서교(西郊)에 있다. 제례는 악장이 각각 다르고, 축판은 흰 종이에 누렇게 쓰며 검은 종이로 선을 둘렀다. 축문에 이르기를,
“사천자는 삼가 야명지신(夜明之神)께 고합니다. 신은 양(陽)의 덕(德)을 짝하고 음정(陰精)을 모아 온 구야(九野)에 밤에는 해를 이어 만방에 널리 비추어 천하가 힘입습니다. 이에 중추를 당하여 예전 전례를 따라 삼가 옥백ㆍ생례ㆍ서품의 의식으로 제사를 드리오니, 신은 흠향하고 조감하여 우리 조민(兆民)에게 복을 주소서. ……”
하였다. 산천단(山川壇)은 천지단(天地壇) 서쪽에 있는데 담으로 둘러 주위가 6리나 되고, 가운데에는 전우(殿宇)가 있어 산천과 성황(城隍)의 신을 제사한다. 좌편은 기둑묘(旗纛廟)이고 서남은 선농단(先農壇)이며 그 아래는 모두 적전(籍田)이다. 중춘에 선농(先農)에게 제사하고 황제가 친히 경적례(耕籍禮)를 행한다. 단은 황명(皇明) 영락(永樂) 연간에 설치한 것으로 남경의 제도와 같다.
춘추(春秋) 중월(仲月) 상정일(上丁日) 자시에 문묘(文廟)에 석전대사(釋奠大祀)를 행하고, 공자의 아버지 계성왕(啓聖王)을 후전(後殿)에서 나누어 제사하는데, 만일 일이 있으면 차정일(次丁日) 혹은 하정일(下丁日)에 행한다. 제례는 악장이 각각 다르다. 그 축문에 이르기를,
“황제(皇帝)는 친히 지성선사(至聖先師) 공자께 제사합니다. 스승께서는 덕이 천지를 짝하시고 도가 고금에 으뜸이십니다. 육경(六經)을 산삭(刪削)하고 기술(記述)하시어 법을 만 년에 남기셨습니다. 이에 중춘 가을에는 중추(仲秋) 을 당하여 공경히 구장(舊章)을 받들어서 삼가 생백(牲帛)ㆍ주과(酒果)로 제사를 드리고 사성(四聖)으로 배향합니다. ……”
하였다. 계성전(啓聖殿)에는 그 축문에 이르기를,
“황제는 계성왕에게 치제(致祭)합니다. 왕은 지성(至聖)을 탄생하여, 만세 왕자(王者)의 스승이 되게 했으니 공덕이 가장 현저합니다. 이에 중춘을 당하여 삼가 서품의 의식으로 치제하고, 선현(先賢) 모씨(某氏)로 배향합니다. ……”
하였다.
춘추 중월에 길일을 택하여 자시에 역대 제왕의 사당에게 제사하는데, 사당은 서부성문(西阜城門) 안에 있다. 정전에는 복희(伏羲)ㆍ신농(神農)ㆍ황제(皇帝) 등 3위(位)로 실(室) 하나를 만들고 소호(少昊)ㆍ전욱(顓頊)ㆍ제곡(帝嚳)ㆍ제요(帝堯)ㆍ제순(帝舜) 등 5위로 실 하나를 만들고, 하우(夏禹)ㆍ성탕(成湯)ㆍ주 무왕(周武王)ㆍ한 고조(漢高祖)ㆍ한 광무(漢光武) 등 5위로 실 하나를 만들고, 당 태종(唐太宗)ㆍ요 태조(遼太祖)ㆍ금 태조(金太祖)ㆍ세종(世宗) 등 4위로 실 하나를 만들고, 송 태조(宋太祖)ㆍ원 태조(元太祖)ㆍ세종(世宗)ㆍ명 태조(明太祖) 등 4위로 실 하나를 만들었다. 풍후(風后)ㆍ고요(阜陶)ㆍ용(龍 순 임금의 신하)ㆍ백익(伯益)ㆍ부열(傅說)ㆍ소공 석(召公奭)ㆍ소목공 호(召穆公虎)ㆍ장량(張良)ㆍ조참(曹參)ㆍ주발(周勃) 등을 동무(東廡) 제1단에, 역목(力牧 황제(皇帝)의 장수)ㆍ기(夔)ㆍ백이(伯夷)ㆍ이윤(伊尹)ㆍ주공 단(周公旦)ㆍ태공 망(太公望)ㆍ방숙(方叔)ㆍ소하(蕭何)ㆍ진평(陳平)ㆍ등우(鄧禹) 등은 서무(西廡) 제1단에, 풍이(馮異)ㆍ방현령(房玄齡)ㆍ이정(李靖)ㆍ이성(李晟)ㆍ허원(許遠)ㆍ한세충(韓世忠)ㆍ곡라(斛羅)ㆍ알리불(斡里不)ㆍ왕백안(汪伯顔)ㆍ유기(劉基) 등은 동무(東廡) 제2단에, 제갈량(諸葛亮)ㆍ두여회(杜如晦)ㆍ곽자의(郭子儀)ㆍ장순(張巡)ㆍ조빈(曹彬)ㆍ악비(岳飛)ㆍ점몰홀목(粘沒忽木)ㆍ화려(華黎)ㆍ서달(徐達) 등은 서무(西廡) 제2단에 모셨다. 제례는 악장이 각각 다르고 축판은 백지에 먹으로 쓰며 누런 종이로 선을 둘렀다. 축문은 복희 이하 명 태조까지 열서(列書)하고 이르기를,
“생각건대 제제(諸帝)께서는 예전에 모두 천명을 받들어, 세상 다스림을 창시했습니다. 그리하여 백성을 편안히 하였으니 덕 깊음을 잊을 수 없습니다. 이에 중춘 가을에는 중추 을 맞아 삼가 생백(牲帛)ㆍ주례(酒醴)ㆍ서품(庶品)의 의식으로 제제에게 치제(致祭)합니다. ……”
하였다.
2월ㆍ12월의 상신(上申) 자시에는 삼황묘(三皇廟)에 제사하는데, 구망(句芒)ㆍ축융(祝融)ㆍ역목(力牧)ㆍ풍후(風后)와 역대 의사(醫師) 28인을 서무(西廡)에 배향한다. 정월 초순과 세제일(歲除日) 자시에는 태세단(太歲壇)에 제사한다. 8월에는 길일을 택하여 자시에 성황묘(城隍廟)에 제사하고 혼동강(混同江)은 따로 치제한다. 성절(聖節)에는 동악(東岳)ㆍ진무(眞武)ㆍ성황(城隍) 세 사당에 따로 치제한다. 화덕진군(火德眞君)의 사당은 경성(京城) 북쪽에 있다. 당 나라 정관(貞觀) 무렵부터 시작하여 원 나라, 명 나라에 이르러 더 수축하였는데, 별전(別殿)은 융은(隆恩)이라 하고 후각(後閣)은 만세경령(萬歲景靈)이라 하며 각(閣)의 좌우에는 또 보성(輔聖)ㆍ영필(靈弼) 등 여섯 전각이 있다. 구적(舊蹟)을 상고하면 원 나라, 명 나라부터 영이(靈異)한 일이 많았다 하나 사전(祀典)은 자세히 알 수 없다.
3월 11일 묘시에는 역대 제왕의 능침(陵寢)과 공부자의 궐리묘(闕里廟)와 오악(五岳)ㆍ사독(四瀆)에 제사하는데, 황명(皇明)의 여러 능(陵)은 따로 태감(太監) 두세 명을 두어 지킨다 한다. 당자(堂子)는 옥하교(玉河橋) 동쪽에 있는데 숭봉(崇奉)하는 것이 무슨 신(神)인지 알 수 없으나 저들이 말하기를, ‘등 장군(鄧將軍)의 사당’이라 한다. 대개 들으니, ‘청인이 처음 일어날 때에 명조(冥助)가 있었기 때문에 향사한다.’고 한다. 매년 정월 초하룻날이면 황제가 먼저 당사에 가서 제사를 행한 뒤에 돌아와서 조참(朝參)을 받는다. 제례는 다른 의절(儀節)은 없고 제찬과 제주만을 올리고 삼궤 구고두(三跪九叩頭)를 행할 뿐이며 악장은 우평장(佑平章)을 아뢴다. 한인 당관(堂官)은 제사하는 곳에 따라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날은 친왕(親王) 이하가 당자에 이르러 지전(紙錢)을 걸고, 3월ㆍ9월 초하룻날에는 또 장대를 세운다. 황제가 친히 제사하는 것은 그 뜻을 알 수 없으나 이것이 청인의 사신(私神)이기 때문에 한관(漢官)으로 하여금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 예도 다른 사전(祀典)에 비하면 또 자별(自別)한 것이다. 무릇 재계(齋戒)는 원조(元朝)에는 전후 3일, 상원절(上元節)에는 14ㆍ15ㆍ16 무릇 3일 동안을 형살(刑殺)을 다스리지 않고, 일도 역시 처리하지 않는다. 단오(端午)ㆍ중추(仲秋)ㆍ중양(重陽)ㆍ칠석(七夕)과 3월 3일, 4월 8일, 매달 초하루ㆍ초이틀, 만수절(萬壽節)의 전후 3일과 태자(太子) 천추절(千秋節) 하루, 대ㆍ중ㆍ소 제사, 국기(國忌) 등 치재일(致齋日)에는 모두 형살을 다스리지 않고, 다만 일은 평상대로 처리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