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몽고(蒙古)에 사는 다은타(多隱他)ㆍ어사(於沙) 등의 집은 4식(息) 2일정(日程)인데, 그 길은 상보을하(上甫乙下)를 거쳐서 비로소 여진 땅에 들어가며, 서가사(西家舍)를 지나서 작은 고개 둘과..

믿음을갖자 2023. 6. 13.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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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2 신묘(1471) 9 11(경진)

02-09-11[05] 변경 침입자들에 대한 영안북도 병마 수군 절도사 선형의 보고와 대책 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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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안북도 병마 수군 절도사(永安北道兵馬水軍節度使) 선형(宣炯)이 치계(馳啓)하기를,

“지난 번에 유시(諭示)하는 글을 받들건대, ‘지금 아하(阿下) 등이 까닭없이 떼지어 모여서 우리의 백성들을 죽이니, 이것은 스스로 멸망을 부르는 짓이어서 징계하지 아니할 수가 없다. 아하(阿下)는 어떤 사람이며, 그가 모은 자는 어떤 종족이며, 그 거주(居住)하는 곳은 어디인가? 그 도로(道路)의 멀고 가까움과 험하고 평탄함과 도둑질하는 원인을 자세히 조사하여 아뢰어라.’고 하셨으므로, 신(臣)이 유시(諭示)하신 글의 사의(事意)를 가지고 각진(各鎭)을 찾아가서 물었더니, 회령진(會寧鎭) 성(城) 밑에 사는 야인(野人)들이 말하기를, ‘도둑질한 자는 하박가별라(下朴加別羅)에 사는 자리(者里)ㆍ무두(無豆)와, 서가사(西家舍)에 사는 조오주(照吾主)ㆍ구음부가(仇音夫可)ㆍ보리(甫里)ㆍ수음부가(愁音夫可)ㆍ모다후(毛多厚)ㆍ여수(余愁)와 몽고(蒙古)에 사는 다은타(多隱他)ㆍ어사(於沙)와, 하을주강(下乙注江)에 사는 아하(阿下)ㆍ유농가(劉弄可)ㆍ아하의 아들 거화(車和)와, 오치안(吾治安)에 사는 도라(都羅)ㆍ상가(尙家)ㆍ두보(豆甫)ㆍ비가(非可)와, 상가하(尙家下)에 사는 벌을허(伐乙虛)ㆍ무징거(無澄巨) 등 18인입니다.

그 도로의 멀고 가까움과 험하고 평탄함은, 하박가별라(下朴加別羅)에 사는 자리(者里)ㆍ무두(無豆) 등의 집은 회령진에서 거리가 4식(息) 2일정(日程)인데, 그 길은 상보을하(上甫乙下)를 거쳐서 비로소 여진 땅에 들어가며, 서가사(西家舍)를 지나서 작은 고개 둘과 강 여울 셋을 거치며, 그 사이의 길이 상당히 험(險)합니다. 서가사(西家舍)에 사는 조오주(照吾主)ㆍ구음부가(仇音夫可)ㆍ보리(甫里)ㆍ수음부가(愁音夫可)ㆍ여수(余愁)ㆍ모다후(毛多厚) 등의 집은 4식(息) 2일정(日程)인데, 그 길은 상보을하(上甫乙下)를 거쳐서 비로소 여진 땅에 들어가며, 두 고개와 세 여울을 거치며, 그 사이의 길이 평이(平易)합니다. 몽고(蒙古)에 사는 다은타(多隱他)ㆍ어사(於沙) 등의 집은 4식(息) 2일정(日程)인데, 그 길은 상보을하(上甫乙下)를 거쳐서 비로소 여진 땅에 들어가며, 서가사(西家舍)를 지나서 작은 고개 둘과 강 여울 셋을 거치며, 그 사이의 길이 평이합니다. 하을주강(下乙注江)에 사는 아하(阿下)ㆍ유농가(劉弄可)ㆍ아하의 아들 거화(車和) 등의 집은 4식(息) 2일정(日程)인데, 두 길이 있으니, 소로(小路)는 하다가사(下多家舍)를 거쳐서 비로소 여진 땅에 들어가며, 중사지(中斜地)ㆍ무을계(無乙界)를 지나서 보통 고개 둘과 작은 고개 셋과 권두(權豆)의 집 앞 강 여울 하나를 거치는데, 그 사이 길이 험악(險惡)하며, 중로(中路)는 하다가사(下多家舍)를 거쳐서 중사지(中斜地)ㆍ구라(仇羅)를 지나서 큰 고개 하나와 작은 고개 넷과 권두(權豆)의 집 앞 강 여울 하나를 거치는데, 그 사이의 길이 평이합니다. 오치안(吾治安)에 사는 도라(都羅)ㆍ상가(尙家)ㆍ두보(豆甫)ㆍ비가(非可) 등의 집은 6식(息) 3일정(日程)인데, 그 길은 고라이동(古羅耳洞)을 거쳐서 비로소 여진땅에 들어가며, 하나의 고개와 하나의 여울을 거치는데, 그 사이의 길이 평이합니다. 상가하(尙家下)에 사는 벌을허(伐乙虛)ㆍ무징거(無澄巨)의 집은 4식(息) 2일정(日程)인데, 그 길은 고라이동(古羅耳洞)을 거쳐서 비로소 여진땅에 들어가며, 하나의 고개와 하나의 여울을 거치는데, 그 사이의 길이 평이합니다. 하이란(下伊亂)에 사는 박가대(朴加大)의 집은 5식(息) 2일 반 일정(日程)인데, 고라이현(古羅耳峴)을 거쳐서 비로소 여진 땅에 들어가며, 강 여울 하나를 거치는데, 그 사이의 길이 평이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도둑질한 원인은, 회령(會寧)의 성(城) 밑에 사는 야인(野人) 고을고(高乙古) 등이 말하기를, ‘자리(者里)가 이르기를, 「지난번에 조선(朝鮮)에 있을 때에 접대(接待)하는 것이 매우 야박하였고, 또 우리 종이 도망하여 국경(國境)으로 들어갔는데 나에게 돌려주지 않고 요동(遼東)으로 보냈고, 매년 변장(邊將)을 알현(謁見)하여도 또한 상경(上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원망을 하여 허수라(虛水羅)에 들어가서 인물(人物)을 살해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무두(無豆)가 이르기를, 「경진년에 조선(朝鮮)에서 우리 아버지를 불러다가 죽이고 의복과 말을 모두 빼앗았다. 이 때문에 원망을 하여 자리(者里)와 더불어 결당(結黨)하여 도둑질하였다.」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마천리(馬千里) 등이 말하기를, ‘아하(阿下)가 이르기를, 「지난 경진년에 중국[中原]으로 갔을 때 조선(朝鮮)에서 나의 처자(妻子)를 다 죽였다. 그 후에 이시애(李施愛)의 병란(兵亂)을 틈타 무령(茂寧) 지방에서 도둑질하여 우마(牛馬)를 창탈(搶奪)해 왔는데, 말은 곧 고실(故失)하여 버리고 그 피장(皮張)과 초피(貂皮)를 가지고 회령 절제사(會寧節制使)를 알현(謁見)해서 전의 죄(罪)를 사과하고 인하여, 상경(上京)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갈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원망을 하여 벌을허(伐乙虛)ㆍ자리(者里) 등과 더불어 도둑질하였다.」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가홍(李家紅) 등이 말하기를, ‘벌을허(伐乙虛)ㆍ무징거(無澄巨) 등이 이르기를, 「지난 경진년(庚辰年)에 낭보아한(浪甫兒罕)을 정벌(征伐)하였을 때 우리 동생(同生)과 족류(族類)가 까닭 없이 피살(被殺)되었고, 심지어 안마(鞍馬)와 의복(衣服)까지도 빼앗겼다. 그 후에 비록 왕래하면서 상경(上京)할 것을 청(請)하였지만 또한 허락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비록 신분이 미천(微賤)하더라도 모두 높은 관작(官爵)과 후한 녹(祿)을 얻었으나 우리들만이 홀로 은혜를 입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원망을 하여 아하(阿下)ㆍ벌을허(伐乙虛)ㆍ무징거(無澄巨)ㆍ자리(者里) 등과 더불어 결당(結黨)하여 도둑질하였으나, 지금에 이르러 회한(悔恨)이 실로 많고 황공하고 두려움이 또한 깊다.」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저들이 비록 그럴 듯하게 말하였다고 여겨지지만, 그러나 적변(賊變)을 추측하기가 어려우며, 또 전일의 범죄를 징계하지 아니할 수가 없으므로, 신이 삼가 입공(入攻)할 기구(機具)를 준비하고서 변(變)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원상(院相)에게 회부하여 이를 의논하게 하였다. 정인지(鄭麟趾)는 의논하기를,

“조그마한 분노(憤怒)로써 가볍게 거병(擧兵)하는 것도 미편(未便)하고, 모욕을 받고 묻지 않는 것도 또한 미편(未便)합니다. 저들이 성심으로 허물을 뉘우치고 비록 ‘알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마땅히 변장(邊將)의 글로써 저들에게 유시(諭示)하기를, ‘너희들이 응인(鷹人)을 살했하였으니, 죄가 진실로 작지 않다. 국가에서 거병(擧兵)하여 죄를 물으면 너희가 장차 어떻게 도망하겠는가? 너희가 만약 성심으로 얼굴을 바꾸고 창탈(搶奪)한 물건을 다 돌려주며 친히 와서 복죄(服罪)하면, 거의 죄를 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소서.”

하고, 정창손(鄭昌孫)ㆍ한명회(韓明澮)ㆍ최항(崔恒)ㆍ윤자운(尹子雲)은 의논하기를,

“야인(野人)들이 변방의 백성들을 창탈(搶奪)하여 사로잡아간 것은 오로지 변장(邊將)이 방비를 소홀히 한 까닭입니다. 조그마한 좀도둑은 족히 개의(介意)할 것이 없으나, 만약 큰 군사를 일으켜 적(賊)의 소혈(巢穴)로 깊이 들어갔다가 만에 하나라도 차질(蹉跌)이 있으면 후회하여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경진년(庚辰年)의 일은 귀감(龜鑑)이 될 만한 것입니다. 적(敵)이 자기에게 가해(加害)하면 부득이 이에 대응(對應)하는 것이 옳지마는, 어찌 반드시 가볍게 거병(擧兵)하여서 예측할 수 없는 험지(險地)에 들어가겠습니까? 삼가고 조심하여 방비해서 변방 주위를 튼튼하게 지키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하고, 신숙주(申叔舟)는 의논하기를,

“간악한 적(賊)이 우리를 넘보는 것은 따질 것이 없고, 조그마한 적구(賊寇)에게는 문득 무육(撫育)하기를 더하면, 실제로 이러한 음모(陰謀)를 일으켰다고 하더라도 자중(自重)하려고 할 것입니다. 지금 만약 징계하지 않으면 작은 것이 쌓여서 큰 것이 될 것인데, 더구나 근년에 국가에 일이 많으니, 저들은 우리가 군사를 징발하여 토죄(討罪)할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만약 징계하지 않으면 이것은 계략(計略) 가운데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6진(六鎭)의 군사를 가만히 계산하니, 4천 명에서 내려 가지 않는데, 정기(精騎) 수백 명을 뽑아서 적(賊) 가운데 국경 가까이 길이 평탄한 데에 사는 자를 공격하게 하며, 그 입공(入攻)할 때에는 매양 험(險)한 요해처(要害處)를 만나거든 반드시 군사 수십 명을 남겨 두어서 이를 지키게 한다면, 돌아올 때에도 또한 적이 맞아서 공격할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도로(道路)의 멀고 가까움과 험하고 평탄함을 듣건대, 저쪽 지방에서도 의심하고 두려워하니, 늦추어 두고 공격하지 않을 듯이 하여 저들이 마음을 놓기를 기다렸다가 돌입(突入)하여 그들을 공격한다면, 이른바 ‘빠른 천둥 소리에는 미처 귀를 막을 겨를이 없다.’는 것입니다. 백에 하나라도 실수가 없어야 할 것입니다. 또 지금부터 모든 입구(入寇)하는 자들을 마땅히 자세히 물어서 상세하게 장부에 기록하였다가, 다른 공(攻)을 세우는 자 이외에는 비록 그들이 노략질해 간 사람과 가축(家畜)을 돌려주는 자라 하더라도 접대(接待)하여 서울로 올려 보내는 것을 허락하지 말아서 그들의 음모를 꺾도록 하소서.”

하고, 홍윤성(洪允成)은 의논하기를,

“경성(鏡城)의 인민(人民)이 적(賊)의 소혈(巢穴)에 깊이 들어갔다가 해(害)를 입었는데, 허물은 변장(邊將)이 방비하여 지키는 일을 삼가지 아니한 데 있을 뿐입니다. 군사를 일으켜 깊이 들어갔다가 만약 혹시라도 차질(蹉跌)이 있으면 후회하더라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신이 경진년(庚辰年)에 친히 적(賊)의 지경을 밟았는데, 눈으로 본 지세(地勢)는 모두 귀로 듣던 바와는 같지 않았습니다. 오익창(吳益昌) 등 수백 명의 군사와 말이 적(賊)에게 함몰(陷沒)된 것은 오로지 지세를 잘못 들었기 때문에 그러하였습니다. 옛사람이 이른바 ‘백 번 들어도 한 번 보는 것만 같지 못하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더구나 도로(道路)의 요해처(要害處)를 심문(審問)한 자는 모두 적류(賊類)였으니, 어찌 저들의 말을 믿고서 곧이 들어 가볍게 큰 군사를 일으킬 수가 있겠습니까? 적(賊)이 자기에게 가해(加害)하면 군사를 내어서 항거(抗拒)하여 싸우는 것이 옳지만, 먼저 스스로 가볍게 움직여서 우리 백성들을 수고롭게 할 수는 없습니다. 변장(邊將)을 위한 계책으로써는, 성문(城門)을 나가는 것을 적(敵)을 보는 것같이 하고 군사를 길러서 스스로 강(强)해지고 때로는 적에게 무수(撫綏)를 더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하고, 조석문(曹錫文)ㆍ김국광(金國光)은 의논하기를,

“적이 오면 방어하고 적이 가면 쫓지 않는 것이 진실로 만세(萬世)에 제왕(帝王)이 오랑캐를 방어하는 훌륭한 방책(方策)이었으니, 크게 거병(擧兵)하기가 어렵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명하여 다시 의논하게 하니, 여러 사람들이 의논하여 아뢰기를,

“야인(野人)들이 곳곳에 흩어져 거주(居住)하니, 그들이 소소하게 도둑질하는 것은 반드시 공모(共謀)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비록 거듭거듭 일일이 타이르더라도 일에는 무익(無益)할 것이고, 다만 모욕과 업신여김을 받을 뿐일 것입니다. 지금 아하(阿下) 등이 범한 죄는 야인들이 다 같이 모의에 참여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같이 모의하지 않은 자는 옛날과 같이 그들을 대접하고 아하(阿下) 등의 도둑질한 것을 말하지 말며, 꼬여서 말하지도 말며, 초유(招諭)하여 오지 말아서, 저들로 하여금 헤아리지 못하게 하소서. 만약 아하(阿下) 등이 스스로 온다면 견고하게 가두어 놓고 계문(啓聞)하여 취지(取旨)할 것이요, 만약 아하(阿下) 등이 다른 사람을 시켜 와서 귀순(歸順)할 뜻을 말하거든, 대답하기를, ‘아하(阿下) 등이 까닭 없이 도둑질하였으므로 바야흐로 군사를 보내어 잡아 오려고 하나, 너희 여러 종족(種族)이 놀라서 술렁일까봐 걱정하여 즉시 가볍게 움직이지 않는다. 너희가 오고 안오고는 너희에게 달렸으니, 우리가 어찌 초유(招諭)하여 오겠는가?’라고 이와 같이 대답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전지(傳旨)하기를,

“이것을 절도사(節度使)에게 유시(諭示)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원전】 8 집 596 면

【분류】 외교-야(野) / 군사-군정(軍政)

[-D001] 하박가별라(下朴加別羅) : 

여진어로 빌라(Villa)는 강(江)을 의미하는데, 박가별라(朴加別羅)는 박가의 성씨를 가진 사람이 살던 강이란 뜻임. 여진에서는 지역을 상(上)ㆍ중(中)ㆍ하(下)로 나누어 잘 불렀음.

[-D002] 서가사(西家舍) : 

여진어로 가샤(Gasha)는 구자(口子)나 참(站)을 말하는데, 서가사(西家舍)는 옛날 원대(元代)에 설치하였던 역참(驛站)의 이름에서 나온 것인 듯함.

[-D003] 권두(權豆) : 

동맹가첩목아(童猛可帖木兒)의 아들 동권두(童權豆)를 말함. 부자가 함께 내지 올적합(兀狄哈)에게 세종 15년(1433)에 피살되었음.

[-D004] 경진년 : 

1460 세조 6년.

[-D005] 고실(故失) : 

실수로 말을 죽이는 것.

[-D006] 동생(同生) : 

동복 형제.

[-D007] 안마(鞍馬) : 

안장 갖춘 말.

[-D008] 응인(鷹人) : 

매 잡는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