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명묘(明廟) 때에 남방의 죄수들을 석방하여 왜란을 피할 수 있게 하셨던 성대한 뜻입니다.

믿음을갖자 2023. 10. 31. 0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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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10년 무오(1618) 10월 10일(을축)

10-10-10[04] 호조가 양 경략이 군량을 요구할 때 충당할 방법을 아뢰자 윤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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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조가 아뢰기를,

양 경략(楊經略)이 교일기(喬一琦)ㆍ유(劉) 두 유격으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만포(滿浦)에서 오랑캐의 동태를 정탐하게 했습니다. 혹시라도 경략의 뜻이 우리 나라 땅을 통해서 병력을 진격시키기를 옛날 조충국(趙充國)이 말한 ‘자리 위를 밟고 지나듯이 군사들이 지나갔다.’고 한 것처럼 조용히 해서 얼음이 얼기를 기다려 의주(義州)로부터 만포에 이르러 강을 건너 공격해 들어간다면, 의주에서 만포까지가 8, 9일 거리이고 도리(道里)가 지극히 험난하므로 중국 조정에서는 군량을 수송하기가 어려울 듯하고 형세상 반드시 군량을 우리 나라에 요구할 것입니다. 그리고 만포로부터 오랑캐의 소굴까지가 4, 5일 거리여서 또한 군량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현재 우리 나라 군사가 바야흐로 굶주리고 있는데 만일 중국 병력이 군량을 요구하는 일이 뜻밖에 생긴다면 무슨 수로 마련해 낼지 모르겠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강변의 군량 운송은 형세상 지극히 어려우니, 수로(水路)로 말한다면 의주 이상의 압록강 상류는 배가 통행할 수 없으며, 육로는 중첩된 산마루를 사이에 두고 있어 지척의 거리도 천리와 같습니다. 그래서 내지(內地)에 비록 10만 석의 군량이 있다 하더라도 초미의 급함을 구제할 수 없습니다. 만약 평안도 내노비(內奴婢)로서 변경 지역에 가까이 있는 자 및 국경가에 사는 자들에 대해서 신공을 면제해 주고 그 대신으로 작미(作米)하여 바치게 한다면 운반하는 공력을 들이지 않고 수천 병력이 며칠 동안 먹을 수 있는 군량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니, 없는 것보다 낫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청천강 이북 지역으로 한정해서 특별히 작미하게 하여 군량을 보충하는 일을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 이러한 뜻을 도원수와 분호조 참판에게 하유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윤허한다. 내용(內用)의 경비는 내사(內司)의 노비 신공에 의존하고 있으니, 이것은 작미할 수 없다. 다시 형세를 살펴가면서 처리하라.”

하였다.

【원전】 33 집 174 면

【분류】 외교-명(明) / 외교-야(野) / 군사(軍事) / 재정-역(役) / 재정-국용(國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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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10년 무오(1618) 9월 22일(정미)

10-09-22[01] 호조가 양호의 조운ㆍ부세ㆍ녹봉 등의 일을 아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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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조가 아뢰기를,

“평상시 조운하는 일은 으레 늦가을까지 모두 경창(京倉)에 도달하게 하였는데, 금년은 7월 이후부터 양호(兩湖)에서 쌀을 전연 운반해 와 바치지 않고 있습니다. 혹은 쌀을 실을 배가 없다고 핑계대고, 혹은 병사를 뽑는 일로 소란스러워서라고 핑계 대다가 겨울이 깊어졌습니다. 이렇게 보름 정도가 그냥 지나게 되면 반드시 얼음이 얼게 될 것이니, 이미 출발한 중간에서 지체될 것이고, 아직 출발하지 않은 배는 실던 것을 멈추고 노를 돌릴 것입니다. 지방에 운반할 쌀이 없는 것도 아닌데 먼 곳에 아무리 많이 있더라도 가까운 곳의 어려움을 구제할 수 없으니, 참으로 민망스럽습니다.

그리고 황연도(黃延道)의 바다에 가까운 고을과 경기의 전세(田稅)와 삼수량(三手糧)은 으레 그 해 안에 본조가 취해다 쓰는 것이 이미 요즈음의 관례가 되었는데, 밭에 있는 곡식을 미리 계산하여 해를 이어갈 계획을 세우는 것을 10여 알의 염주를 헤아려 근근이 빼 쓰는 것과 같이 해왔습니다. 그러나 올해는 서쪽 변방의 일 때문에 황연도의 곡식을 취해 쓸 수가 없고, 강화(江華)의 경우는 나라의 방벽이 되는 지역이며, 파주(坡州)에는 산성이 있고, 광주(廣州)에는 남한 산성이 있으며, 영평(永平)과 포천(抱川)에는 진영을 설치하는 거조가 있고, 수원(水原)과 죽주(竹州)는 모두 중요한 지역에 관계되므로 모두 전세와 삼수량을 납부하지 않고 않습니다. 그러니 무슨 쌀로 녹봉을 나누어 주고 무슨 곡식으로 군사들에게 지급할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예전엔 경상비의 지출이 지금처럼 많지 않았는데도 독성(禿城)과 촉석(矗石) 등처에 여러 해 동안 저축해 놓은 양식을 모조리 운반해다가 서울의 비용에 제공했는데, 하물며 지금이 어느 때인데 일반적 부세까지 아울러 해당 고을에 남겨 두도록 허락한단 말입니까. 아마도 계속하기 어려운 정사가 될 것입니다.

대체로 몇 년 이래로 경비가 늘어나는 것이 나날이 심해졌는데, 금년 4월에 이르러서는 군직 체아(軍職遞兒)를 증설했고, 무겸 수문장과 부장을 추가로 차출했으며, 요즈음은 또 줄였던 동반(東班)의 관원을 다시 설치했습니다. 왜란이 지난 후 30년간 있지 않았던 일을 금년에 갑자기 시행하였으니, 부득이 금년 정월 이전 준행하던 규례에 의거하여 각항의 추가로 설치했거나 다시 설치한 관원을 도로 감하거나 없애야 합니다.

그리고 백관의 녹봉 지급은 임자년 봄 분기부터 비로소 매품마다 미(米) 2석과 태(太) 1석을 추가해 주었습니다. 그러다 계축년에 갑자기 재정이 떨어져 정9품 이상에 대해서는 도로 1석을 감하고 서너 분기가 지나서야 비로소 규정대로 다시 지급했습니다. 지금도 또한 이 한계 규정에 의거하여 앞으로 10월과 1월 두 분기에 대해서는 정9품 이상은 각기 미 1석을 감한 뒤에라야 거의 재정을 지탱할 길이 있게 될 것입니다.

군대를 일으키는 것은 큰 재앙이며, 재앙을 만나 사치를 경계하는 것은 나라를 소유한 이가 의당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위로 쓸데없는 비용을 줄이고 아래로 녹봉을 감하는 것은 또한 시대를 구원하는 계책이 되는데 해롭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해조가 감히 독단으로 처리할 바가 아니니,〉 이 모든 것들을 대신들과 아울러 의논해서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원전】 33 집 167 면

【분류】 교통-수운(水運) / 재정-전세(田稅) / 재정-국용(國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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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10년 무오(1618) 9월 21일(병오)

10-09-21[01] 전교하여 기청제를 지내라고 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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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하였다.

“요즈음 눈이 계속 내리고 있는데 비록 갠다 하더라도 대례가 줄줄이 있으니, 속히 기청제(祈晴祭)를 지내라고 〈해조에 말하라.〉 ”

【원전】 33 집 167 면

【분류】 과학-천기(天氣)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왕실-의식(儀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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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10년 무오(1618) 8월 10일(병인)

10-08-10[01] 의금부에서 서북에 정배된 사람들을 타도로 이배하는 일로 아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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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금부가 아뢰기를,

“서북에 정배된 사람들을 그 거리의 원근을 헤아려 양남 및 영동 지방으로 옮겨 정배하였습니다. 다만 서북의 극변 지방은 혹 24, 5일이 걸리는 거리도 있는데 삼도는 먼 지역도 10여 일 거리에 불과하므로 위리 안치의 죄라도 그 거리가 먼 곳부터 옮겨 정배했습니다. 지금 변방에 경보가 있자 성상께서 서북에 귀양간 사람들을 불쌍하게 여기어 특별히 병화를 피할 수 있는 땅으로 옮기라고 명하셔서, 목숨이 붙어 있는 죄인들이 모두 다시 살려주는 큰 은혜를 입도록 하였으니, 이는 바로 명묘(明廟) 때에 남방의 죄수들을 석방하여 왜란을 피할 수 있게 하셨던 성대한 뜻입니다. 삼가 이들의 명단을 가져다 그 죄상을 살펴보니 더러 억울하여 용서해 줄 만한 자가 없지 않았는데, 예컨대 법 외에 연좌되었거나 죄명이 뚜렷하지 않은 자 같은 유입니다. 설사 모두 죄가 있다 하더라도 이렇듯 조서를 반포하는 날을 당하여 인심을 위로하여 기쁘게 하고 스스로 새로워지는 길을 널리 보이는 거조로 이보다 급한 일은 없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풀어줄 만한 사람은 대신이 출사한 뒤에 대신과 양사가 함께 모여서 의논해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원전】 33 집 141 면

【분류】 사법-행형(行刑)

ⓒ 한국고전번역원 | 김성애 (역) |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