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의 명조선

만약 예의의 나라인 노(魯)나라와 위(衛)나라의 선비가 이 말을 듣는다면 신들을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믿음을갖자 2023. 11. 8. 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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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9년 계축(1733) 2월 26일(무인) 흐림

09-02-26[14] 중화의 사인 윤붕 등의 공적에 대해 아뢰고 금산 종용당 등에 사액을 허락할 것을 청하는 생원 김대하 등의 연명 상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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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도에 사는 생원 김대하(金大夏) 등이 연명으로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위험에 처했을 때 절개를 지켜 죽고 나라를 위해 어려움을 막는 것은 진실로 신하의 본분입니다. 그러나 먼 지방에서 빈한하고 평범하게 살아 임금이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천리와 인도가 중요하다는 이유만으로 그 충의(忠義)로운 기개를 격발하여 나라가 위태롭고 어지러울 때, 마치 대우받지 못하던 주여숙(柱厲叔)이 나라가 어려울 때 자신의 목숨을 바친 것과 임금이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던 안고경(安杲卿)이 창의(倡義)한 것처럼 자신의 힘을 바친다면 그 간절한 충성과 불굴의 절개는 진실로 하늘이 내려 준 천성을 저버리지 않은 것이니, 선유가 말한 그리되기를 바라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공로를 드러내 주지 않고 나라에서 기리고 드러내는 은전을 베풀지 않아 몸과 이름이 가려진 채 밝혀지지 않고 사적(事蹟)이 옅어져 전해지지 않는다면, 이 어찌 성세(聖世)의 한 가지 큰 결점이 아니겠으며 지사와 충신이 고금에 한탄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는 송(宋)나라 때 주변(朱弁)이 북방에서 절의를 지키다 죽은 사람을 반드시 기리고 수록하는 것을 남도(南渡)한 뒤에 나라의 중흥을 위하여 힘써야 할 한 가지 일로 여긴 까닭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성조(聖朝)에서는 절의를 숭상하고 장려하는 거조가 전고(前古)에 탁월하였는데 숙묘조에 이르러서는 그러한 은전이 더욱 컸습니다. 영청(永淸 평안남도 영유(永柔))에 있는 제갈 무후(諸葛武侯)의 사당에는 악 무목(岳武穆 악비(岳飛))을 나란히 배향하였고, 벽성(碧城)의 수양산(首陽山)에는 고죽군(孤竹君)의 아들들을 배향하여 시대를 달리하는 충신을 모두 기리고 드러내었으니 아, 정말 아름다운 일입니다. 이는 진실로 여러 임금 가운데 성대한 절조이며 천세 후에 전해질 미담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오늘날 우리 전하의 마음은 곧 숙묘의 마음과 같습니다. 충절을 기리고 장려하며 공로를 제향하고 보답하는 데 모두 지극한 노력을 기울였으니, 이 세상에 미미한 공훈과 작은 충절을 바친 자라 해도 그에 따라 기리고 장려하는 데 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신들이 살고 있는 고을 중화(中和)만은 탁월한 의열(義烈)이 있어도 표장(表章)하는 은전에서 누락되었으니, 이는 신들이 사는 고을의 민풍이 무지몽매하고 문헌이 부족하여 아직까지 위로 보고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의의 나라인 노(魯)나라와 위(衛)나라의 선비가 이 말을 듣는다면 신들을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신들은 너무도 부끄럽고 두려운 마음을 견디지 못하여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일의 전말을 우러러 아뢰니, 밝은 성상께서는 한번 살펴 주소서.

아, 옛날 선묘조(宣廟朝) 임진년(1592, 선조25)에 섬나라 오랑캐가 정도(正道)를 위반하여 쳐들어와 제멋대로 날뛰며 팔도를 짓밟고 삼도(三都)를 함락하자 대가(大駕)가 바삐 서쪽으로 파천하여 의주(義州)에 주필(駐蹕)하였습니다. 당시 나라는 평화를 누린 지 오래되었으므로 백성들은 싸울 줄 모르고, 고을들은 와해되어 감히 적에게 맞서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중화 한 고을만은 의병장들이 세 곳에서 진을 친 뒤에 적의 뒤를 막고 목구멍이 되는 요해처를 움켜쥐고서 혹은 적의 손에 죽기도 하고 혹은 그 세력을 막기도 하여 명나라 군대가 기세를 증강하여 종묘사직이 다시 회복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충성을 바쳐 장렬히 목숨을 바친 공적이 사람들의 이목을 환히 비출 정도로 드러났는데 표창하고 성대하게 보답하는 일은 완전히 갖추어지지 않은 점이 있으니, 이것이 신들이 천 리 먼 길에서 찾아와 구중궁궐을 우러러 부르짖는 일을 그치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아, 중화의 사인(士人) 윤붕(尹鵬)은 바로 고려(高麗)의 시중(侍中) 고 윤관(尹瓘)의 후예입니다. 윤붕은 태어나면서부터 남들보다 빼어나 서가의 책을 아무것이나 뽑아도 척척 아는 장수양(張睢陽)과 같은 총명함이 있었고 식견이 높고 체력이 남보다 뛰어났으며 언제나 충의(忠義)로써 스스로를 권면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윤 시중의 풍모가 있다고 여겼습니다. 형 윤린(尹麟), 당숙 윤은형(尹殷衡), 족부(族父) 윤은로(尹殷老)와 더불어 두터운 효심과 화목한 우애를 쌓았고 또 경서와 사서에 능통하였습니다. 윤은형은 더욱 용모가 건장하고 깊고 넓은 지략을 지니고 있었는데, 함께 사서를 읽으며 충의를 바쳐 죽은 옛사람들의 일을 볼 때마다 책을 덮고 눈물을 흘리곤 하였습니다. 이때에 대가(大駕)가 파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윤붕 등 4인은 같은 고을의 김희룡(金希龍)ㆍ허사현(許士賢)ㆍ채수중(蔡守仲), 평양의 김덕렴(金德濂)과 함께 임중량(林仲樑)에게로 가서 의병을 도모하여 일으켰습니다. 임중량은 곧 고려조의 영동정(令同正) 임득재(林得材)의 후손이며 윤붕의 외형(外兄)입니다.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였고 또한 지략이 있어서 서로 도모하기를 ‘섬나라 오랑캐가 창궐하여 온 나라가 어지러운데 주상께서는 몽진(蒙塵)하셨고 군수 또한 달아났다. 우리가 비록 조정에서는 드러나지 못하였으나 모두 조정의 관직을 지낸 신하들의 후손이다. 지금 이런 난리를 만나 임금의 위태로움을 눈으로 보고도 어찌 차마 좌시하며 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더구나 이곳 중화는 적들의 요해처이다. 만약 이곳을 버리고 지키지 않는다면 적은 뒤를 살펴야 할 걱정이 없어져 의주(義州)가 위험해진다. 오늘날 우리가 의병을 규합하여 앞을 막거나 뒤에서 싸운다면 적은 반드시 감히 서쪽으로 가지 못할 것이니, 그렇다면 회복될 형세가 열에 여덟이나 아홉은 될 것이다.’라고 하고 이에 임중량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였습니다. 임중량은 이때 상중(喪中)이었으므로 사양하니, 윤붕이 말하기를 ‘지금 대가가 서쪽으로 파천하여 우리나라가 위태로운 지경인데 대장부로서 죽을 때가 되면 죽을 뿐이지 어찌 초야에서 구차스럽게 살아가는 귀신이 될 수 있겠습니까. 향리의 피난민들이 모두 나를 따르기를 원하지만 나의 기략이 형에게 미치지 못하여 사양한 것인데 어찌 사사로운 우환 때문에 사양하십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임중량이 허락하고 윤붕을 부장(副將)으로 삼아 분장(分掌)을 분명히 하고 향리의 연소한 자들을 불러 모아 400인을 얻었는데, 이때 같은 고을의 무인 임대춘(林大春)ㆍ임산려(林山麗)ㆍ김인경(金仁卿)ㆍ김예경(金禮卿)ㆍ유겸(劉謙)ㆍ손덕란(孫德蘭)과 평양의 김언형(金彦亨) 등이 이들을 따랐습니다. 임중량이 소를 잡아 군사들을 먹이고 단에 올라 사람들에게 맹세하였는데 갑작스럽게 일으킨 군대여서 군대에 군율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임중량이 명령을 따르지 않는 한 사람을 참(斬)하여 사람들에게 돌려 보이니, 이에 두려워하고 복종하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임중량이 사람들과 도모하기를 ‘오래 버티는 방법으로는 성을 쌓는 것이 가장 좋다.’라고 하고 이내 고을 서쪽의 직산(直山) 위에 토성을 쌓고 ‘서진(西陣)’이라 하였으니, 이는 중화에 동진(東陣)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는 인근에 거주하는 백성들을 효유하여 농사를 그르치지 않게 하면서 계획을 많이 세워 적의 흉봉(凶鋒)을 여러 차례 꺾었습니다. 서진은 기성(箕城 평양(平壤))과 매우 가까웠으므로 적의 동정을 모두 탐색하여 알 수 있었는데, 임중량은 계략을 세워 적을 꾀어 오게 하기를 잘하였고 윤붕은 몸소 사졸들의 선두에 서서 마르고 썩은 나무를 꺾어 내듯 왜노(倭奴)들을 격살하였습니다. 나머지 여러 의사(義士) 또한 협심하고 용기를 북돋워 여름부터 가을이 지나도록 왜적과 대립하며 기묘한 계략을 자주 내어 무수한 왜적을 죽였습니다. 당시에 왜적은 바다를 넘어온 후로 영(嶺)을 넘고 도성을 함락한 뒤 멀리 말을 달려 평양까지 내려오기를 마치 비어 있는 땅에 들어오듯 하며 멋대로 침략하였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서진이 갑자기 적의 배후에서 일어나고 또 동진의 의병장인 차은로(車殷輅), 조호익(曺好益) 등과 함께 좌우에서 협공하여 명성과 위세를 크게 떨치니, 약탈하는 왜적들이 감히 나오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군량을 보급하는 길도 끊기고 염탐할 길도 막히자 왜적이 크게 두려워하여 두 개의 목인(木人)을 만들어 참하며 ‘네가 임중량이냐? 네가 조호익이냐?’라고 하였으니, 왜적들이 이처럼 이들을 꺼려 이로부터 감히 평양을 한 발짝도 떠나지 못하였습니다.

세상에서는 모두들 명나라의 유격장 심유경(沈惟敬)이 왜인과 강화를 맺고 표목(標木)을 세우기로 약조하였기 때문에 왜노가 부산(斧山)을 넘어 서쪽으로 가지 않았다고 하지만, 사실은 중화의 의병이 적의 후미를 끊었기 때문에 왜노가 감히 움직이지 못한 것입니다. 11월에 임중량이 대동강 남쪽 기슭에 나무를 베어 세운 뒤 임금을 시해하고 이웃 나라를 괴롭힌 죄를 써서 왜적의 노여움을 도발하니, 왜적이 이윽고 군사를 지휘하고 크게 나아왔습니다. 임중량은 기묘한 계략을 많이 세우고 왜적을 험지로 들어오도록 유혹하여 거의 전부를 격살하였으니, 이때 흐른 피가 물가를 가득 채웠고 쌓인 적군의 시체가 성벽 높이와 나란하였습니다. 마침내 윤은로를 시켜 체찰사에게 승전보를 써서 보고하게 하니, 이에 서진이 잘 싸운다는 명성이 나라에 알려졌습니다. 집의 이호민(李好閔)이 이 소식을 가지고 장수와 군사들을 격려하고 명나라 군대를 권유하였는데 그 말이 《승정원일기》 및 《오봉집(五峯集)》에 모두 자세히 실려 있으니, 오봉(五峯)은 곧 고(故) 판서 이호민의 호입니다. 그 후에 임중량은 병에 걸려 집으로 돌아가고 윤붕이 대신 그 무리를 영솔하여 밤낮으로 성을 보수하고 무기를 고쳐 평양을 수복하고 가서 대가를 맞을 계획을 세웠는데, 왜적들이 이 말을 듣고 근심하여 반드시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12월 1일 밤에 대설(大雪)이 내리고 짙은 안개가 끼어 지척도 분간할 수 없었는데 왜적이 이 기회를 타고 모든 적병을 거느리고 쳐들어와 전력을 다해 우리 군을 공격하였습니다. 적군의 동정을 살피던 군졸이 그만 실명하여 보고하지 못하였는데, 닭이 두 홰 울 때 성이 함락되려 하자 윤붕이 형 윤린의 손을 잡고 울며 말하기를 ‘흉악한 왜적을 아직 없애지 못했는데 일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형제가 모두 죽는 것이 의리에 당연한 일입니다. 다만 부모님이 모두 연로하고 난리를 만나 달아나 숨어 계신데 돌아가 의지할 곳이 없으니, 형은 가서 부모님을 보호하고 아우는 남아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합니다. 이 어찌 일가에 충과 효를 모두 온전히 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자, 윤린이 말하기를 ‘이것이 무슨 말인가. 돌아가 부모를 보호하는 데에는 동생이나 형이나 차이가 없다. 아우는 젊고 형은 늙었으니, 젊은이가 돌아가야 하고 늙은이는 죽어야 한다.’라고 하자, 윤붕이 ‘형은 종자(宗子)이고 저는 주장(主將)이니, 형은 돌아가 종사를 계승하고 저는 남아서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이 의리로 볼 때 진실로 당연한 일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윤린이 할 수 없어 겨우 성을 나오자 성은 이미 함락되었습니다. 윤붕의 군관이 윤붕의 손을 잡으며 어둠을 타고 성을 나가 피할 것을 청하니, 윤붕이 검을 휘두르며 꾸짖기를 ‘사람들과 함께 죽기로 약속하였는데 나만 홀로 살 수 있겠는가. 다시 말하는 자는 반드시 먼저 참하리라.’라고 하며 몸을 떨치고 나가 이리저리 다니며 싸우는데 조금도 두려운 기색이 없었습니다. 이로써 사람들이 그 용맹에 탄복하고 죽음에 이를 때까지 배반하려는 뜻이 없었으니, 400명의 의사들이 어지러운 군중(軍中)에서 함께 죽었으며 윤붕 홀로 격살한 왜적 또한 몇 명이나 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처음에 왜적이 매번 윤붕을 생포하고자 하였는데 윤붕이 죽음에 처하였을 때에는 칼을 어지러이 맞은 나머지 몸이 남아나지를 않았습니다. 윤은형 또한 주먹을 휘두르며 나가 무수한 왜적을 격살하였는데 누군가 피할 것을 권하자 성을 내며 꾸짖기를 ‘대가가 파천한 뒤 내가 이미 한 목숨을 바치기로 약속하였는데 어찌 성을 버리고 살기를 도모하겠는가. 죽음으로 이곳을 지켜 의(義)에 부끄럽지 않고자 할 뿐이다.’라고 하고 드디어 몸에 어지러이 칼을 맞고 죽었습니다. 김덕렴은 성이 함락되려 할 때에 집에서 돌아왔는데 그의 처가 옷소매를 잡고 말리니, 김덕렴이 소매를 자르고 나가며 말하기를 ‘내가 벗들과 함께 죽기를 약속하였는데 어찌 부인의 말을 들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는 끼고 있던 토시[套手] 한 짝을 풀어 던지며 말하기를 ‘내가 죽으면 이것을 내 혼이라 여기고 장사 지내시오.’라고 하면서 돌아가 왜적의 손에 죽었습니다. 그리고 허사현, 김희룡, 김언형, 임산려, 유겸, 김인경, 손덕란 등은 모두 죽고 임중량, 임대춘, 윤은로만 병으로 집에 돌아가 죽음을 면하였으며, 김예경은 거의 죽었다가 도로 살아났습니다. 성이 함락되자 임중량이 행재소(行在所)로 말을 달려 가서 패전한 일로 대죄하자, 상이 불러 만나 보고 한참을 가상하게 여기고 감탄하며 모두를 정표(旌表)하고 증직하였습니다. 윤붕은 첨정에 증직하고, 김인경은 정략장군(定略將軍)으로, 윤은형과 김덕렴은 주부로, 허사현은 부장(部將)으로, 김희룡은 수문장으로, 임산려는 직장(直長)으로, 김언형은 참봉으로 증직하였습니다. 그리고 윤린은 주부에 제수되었고 윤은로는 직장으로, 김예경은 부정으로 삼았습니다. 또 하교하시기를 ‘중화의 사인 등이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였으니, 그 충의가 가상하다. 그 고을을 부(府)로 승격시키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성이 함락된 후로 항시 이상한 기운이 진지(陣地)에 은은하게 마구 맺혀 있어 달이 뜬 밤과 비가 내리는 저녁에는 마구 내치는 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길 가던 사람이 나타난 혼령을 보고 놀라 병을 얻기도 하였습니다. 이에 문사(文士)인 읍재 이극성(李克珹)이 한식(寒食)에 글을 지어 제사를 지냈는데 그 후에야 그쳤으니, 《초사(楚辭)》에 ‘혼백은 굳세어 귀웅이 되었네.[魂魄毅兮爲鬼雄]’라는 말이 과연 거짓이 아니었습니다.

동진은 곧 중화 만호 차은진(車殷軫), 차은로 형제의 진이었는데 두 사람은 재주와 용맹이 빼어나 함께 무과에 급제하고 언제나 나라를 위해 어려움을 막겠다고 스스로 다짐하였습니다. 차은진은 또 마상재(馬上才)에 능하여 말 위에서 서기도 하고 눕기도 하며 평지와 다름없이 이리저리 말을 달렸으니, 형제가 가진 무예의 정교함은 이를 꿰뚫고 버들잎을 뚫을 만큼 신묘하였습니다. 형제가 이때에 의기를 떨치고 일어나 용감한 군사를 많이 모아 요해처를 나누어 점거하고 기회를 살피고 적을 유인하여 좌우에서 합공하고 여름부터 겨울까지 여러 차례 뛰어난 승첩보를 알렸습니다. 상이 듣고 크게 가상히 여겨 차은진을 이산 군수(理山郡守)로 발탁하고 차은로는 청도 군수(淸道郡守)로 삼았습니다. 명나라의 대장인 제독 이여송(李如松)이 평양을 회복하자 형제는 함께 군사들을 이끌고 대동강(大同江) 남쪽 끝으로 진을 나아가게 하여 조호익과 영(營)을 나란히 하고 왜노를 크게 무찌른 뒤 이어 대군과 함께 경성까지 왜적을 쫓았습니다. 상이 궁으로 돌아오신 뒤에 형제는 모두 선무 원종훈(宣武原從勳)에 참록되어 그들의 아비까지 추증되었습니다.

김진수(金進壽) 또한 무과 출신으로 별도로 하나의 진을 설치하여 수없는 왜적을 죽였으니, 그의 의로운 명성이 미치자 사방에서 메아리치듯 호응하였습니다. 이에 같은 고을 사람 송덕춘(宋德春), 황주(黃州) 사람 황하수(黃河水)ㆍ윤빙(尹聘), 봉산(鳳山)의 김만수(金萬銖) 등이 모두 그를 따랐습니다. 험지를 막고 요해처를 지키며 많은 왜적을 죽이자 선묘께서 듣고는 가상하게 여기고 하교를 내려 드러내고 장려하였습니다. 하교에 대략 이르기를 ‘평양을 지키지 못한 뒤로 중화 동쪽 지역의 백성이 모두 적군의 무기에 당하고 있는데도 내가 구하지 못한 일을 생각할 때마다 나의 마음이 근심스러웠다. 이번에 중화의 김진수ㆍ황하수ㆍ윤빙, 봉산의 김만수 등이 의병을 모아 매우 많은 왜적을 죽였다는 소식을 듣고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겼다. 그러고는 이들의 충의로 내 백성들이 도륙되는 일을 면할 수 있다면 내가 가지고 있는 부귀를 살아서는 함께 누리며 죽어서는 자손에게 음덕이 되도록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우선 김진수를 의빈부 도사로, 황하수를 예빈시 판관으로, 윤빙을 의금부 도사로, 김만수를 선전관으로 제수하여 드러내고 장려하며, 김진수는 의병장으로 삼는다. 지금부터 누리게 될 영화와 안락을 그대들이 아니면 누가 함께하겠는가. 가을의 서늘한 바람 잠시 불어오니 변방에 이른 추위가 오고, 서리와 이슬이 내리니 덜덜 몸이 떨리며 슬픈 생각이 든다. 생각은 한 곳으로 모여 날로 함께 깊어지니 속히 길을 깨끗이 닦고 와서 대가를 맞이하라. 아, 집과 나라는 일체이니, 나라가 망했는데 집안만 홀로 온전한 경우는 결코 없다. 임금과 신하는 같은 윤리 안에 있으니, 어찌 임금이 모욕을 당했는데 죽음으로써 설욕하지 않는 신하가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니, 윤음에 담긴 뜻이 슬프고 애절하여 읽는 글자마다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러고는 8월 5일에 특별히 승진시켜 황주 목사(黃州牧使)로 삼았습니다. 14일에 도체찰사 유성룡(柳成龍)이 안주(安州)에 있을 때 왜적의 장수를 잡아 참하고 많은 말을 잡은 실상을 아뢰고, 또 말하기를 ‘김진수가 이처럼 왜적을 참살하였으니, 매우 위로되고 기쁜 일입니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으로 보면 김진수의 충의와 공렬은 혁혁하다 할 만합니다.

그 후에 임중량은 체찰사가 장계로 청하여 안주 목사(安州牧使)가 되었습니다. 상이 영유(永柔)에서 강서(江西)로 돌아올 때 그 당시 땅이 질어 대가가 위태로웠는데 임중량이 손으로 대가를 붙들어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었습니다. 상이 돌아보고 묻고는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임중량이 아니었으면 내가 위험할 뻔했다.’라고 하고, 이어 안주 방어사(安州防禦使)에 제수하도록 명하였습니다. 또 하교하시기를 ‘임중량의 아들, 사위, 아우, 조카를 모두 실직(實職)에 제수하라.’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조카인 임윤덕(林允德)은 사재감 주부에 제수되었고, 사위인 노몽지(盧夢摯)는 희릉 참봉(禧陵參奉)에 제수되었습니다. 그 후에 차은진은 창성 부사(昌城府使)가 되고, 김진수는 황주 목사를 거쳐 한성부 우윤에 이르렀고, 임대춘은 약산 군수(若山郡守)가 되었으니, 이는 세 진(陣)의 의병장에게 추후에 직질이 더해진 것입니다.

아, 지금 이 세 진의 의사들은 그들의 앞에 작위나 상이 걸려 있던 것도 아니며 또 그 뒤에 위협이나 벌이 따라온 것도 아니었습니다. 당시에 백관은 달아나 숨고 온 나라는 혼란스러워 나라의 존망이 몹시 위태로운 상황이었는데도 한갓 벼슬에 나아가지 않은 선비와 초야의 무인으로서 함께 의병을 일으켜 강한 왜적을 막았습니다. 안으로 맡아서 다스리도록 임무를 맡긴 일도 없었고 밖으로 미력이나마 지원하는 힘도 없었지만, 명나라의 지원이 끊어졌는데도 외로운 산성을 지키면서 더욱 단단해졌고 왜적의 기마병이 강했는데도 마음을 졸이며 전진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왜적이 이내 우리에게 있는 힘을 다하여 온 적군이 빙 둘러싸고 온갖 기교를 다 동원하여 수차례 공격하는데도 의지는 3판(板)보다 견고하여복양(畐陽)의 성벽에 내건 베를 잡고 올라가는 굳센 의지와 견성(汧城)에 구멍을 뚫는 기묘한 계책으로도 그 장렬하고 기발한 책략을 넘지 못하였습니다. 400명의 의사들이 일시에 함께 죽었는데 부섭(傅燮)의 탄식은 없고 주가(周苛)의 강개함만 있어 용기를 북돋워 다투어 올라가 여러 차례 왜적의 흉기를 꺾기도 하면서 우리 백성들로 하여금 임금의 존재만 알고 자신의 존재는 아랑곳하지 않도록 하고, 저 왜적으로 하여금 우리 편에 대비하는 데 전심하느라 감히 서쪽을 침범하지 못하게 하여 마침내 세 진에서 왜적에 맞서 잘 싸운다는 명성으로 명나라 장사들의 기운을 격려하였으니, 우리나라의 종사가 재건된 공을 이곳 서쪽 지역의 빈한한 서생 6, 7명에게 돌린다 해도 지나친 일은 아닙니다. 곧은 충성심과 위대한 공적은 바로 강회(江淮) 지역을 막은 놀라운 공적과 커다란 절조에 비견될 수 있으며 전횡(田橫)의 군사 500명이 같은 날 함께 죽은 일과는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도 꼭 들어맞지만, 이는 바로 수많은 협객이 약속을 중히 여겨 그리된 것일 뿐입니다. 어찌 서진의 의병들이 의리를 지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국세(國勢)를 증진하고 강하게 하며 역사에 길이 전해지도록 하여 민이(民彝)와 물칙(物則)에 커다란 도움이 된 것과 같겠습니까. 예로부터 의병을 일으킨 무리를 보면 그 마음이 비분강개한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라고는 해도 타고난 바탕이 없는 경우는 없었으니, 장순(張巡)과 허원(許遠) 두 선봉장의 충렬은 모두 100리 안으로 떨치는 기세가 있었습니다. 본조(本朝)의 일로 말하더라도 고경명(高敬命)과 조헌(趙憲) 등 여러 의병장은 모두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명성과 지위가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중화의 사람들과 같은 경우 먼 지방에 사는 서너 명의 벼슬 없는 선비에 불과하였지만 혼란스러운 나라를 일으켜 세울 때는 이와 같았으니, 이는 이른바 지극히 어려운 일이어서 그 절개가 더욱 뛰어나다고 하는 경우입니다. 또 한 고을 안과 한 가문 안에 또 어쩌면 이리도 절의를 지킨 인물이 많을 수 있습니까. 허사현(許士賢)의 후손은 4대에 걸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고, 김언형(金彦亨)의 집안은 3대가 나랏일을 위해 죽었으니, 이런 뛰어난 행적은 전고에 찾아보아도 많이 없을 것입니다. 이 또한 어찌 윤붕 등이 충의로써 그 명성을 길이 세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아, 삼남(三南) 지역은 문명(文明)을 숭상하는 풍속이 있기 때문에 절개를 지켜 죽은 소교(小校)나 의리를 지켜 죽은 사문(沙門)들도 모두 전(傳)으로 기록하고 사우(祠宇)를 세워 봉안하였습니다. 그리고 관북(關北) 지방의 경우 길주(吉州)의 의병은 평범한 민간의 빈한한 선비에 불과하여 관직을 내려 정표하고 추증한 적은 없었지만, 또한 모두 제사를 지내는 반열에 나란히 배향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세 진의 의사를 돌아보건대 이러한 충성과 정절을 보이고 이렇게 수고로이 일하였는데 유독 높이고 봉안하는 거조가 없고 드러내고 공경할 곳이 없어, 공연히 은일(隱逸)의 땅에 장홍(萇弘)의 벽혈(碧血)이 영원히 묻히게 하고 세시복랍(歲時伏臘)에 공경하는 자세로 제를 지내는 촌옹(村翁)의 모습을 볼 수 없도록 하고 있으니, 이래서야 어떻게 세상을 격려하고 후세에 알릴 수 있겠습니까. 또 관서는 변방의 요해처이며 나라의 울타리가 되는 중요한 곳입니다. 반드시 이렇게 의열(義烈)이 드러난 자를 들어 교화해야만 이곳의 투박한 구습을 열어 주고 흥기되는 새로운 풍속으로 점차 변화시킬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중국의 뛰어난 절조를 보인 옛 충현들의 경우도 지명이 우연히 일치한다는 이유만으로도 묘호를 창건하였는데 제갈 무후의 사당에 악 무목을 배향한 것이 곧 그 일이니, 성고(聖考)의 이러한 은미한 뜻을 누가 흠앙하고 일컫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윤붕 등은 곧 같은 고을, 같은 도의 사람입니다. 소식이 멀리 퍼지지 않고서도 눈으로 직접 보고 감동하기 가장 쉬우니, 지금 나라에서 특별히 묘액(廟額)을 내려 주어 감춰진 빛을 드러내 준다면 반드시 나라의 장려를 우러러 사모하고 전에 없던 은전에 사람들의 낯빛이 바뀌어, 이로써 아비는 자식을 가르치고 형은 아우에게 권면하여 모두들 세 진의 충렬을 표준으로 삼아 그 인물을 기리고 그 풍모를 생각하며 더욱 세상에 드물고 나라에 뛰어난 충현이 늘어날 것입니다. 그러니 그 본보기로 삼아 권장하는 도리로 볼 때 이 어찌 긴요하고 중대한 일이 아니겠으며, 훗날 나라에서 이곳 서토에서 힘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여기에 있지 않겠습니까. 다행히 전에 지금의 좌참찬 송인명(宋寅明)이 이곳 서토에 명을 받들고 부임하였을 때 특별히 《충효록(忠孝錄)》을 찬수하여 이곳의 무너져 가는 풍속을 격려해 준 일이 있습니다. 또 돌아가서는 연석에서 아뢰어 비를 세워 그 공적을 드러내라는 명을 내리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곳의 모든 인사들이 그 큰 은혜에 감격하고 교화에 감동하였습니다. 약간의 재력을 모아 비석 곁에 근근이 사우를 세워 길이 신주를 모실 곳으로 삼고 이에 또 서로 이끌고 와서 성상께 머리를 조아리고 호소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밝은 성상께서는 유사(有司)에게 아울러 명하여 금산(錦山) 종용당(從容堂)과 경성(鏡城) 창렬사(彰烈祠)의 옛 제도에 따라 특별히 은혜로운 사액(賜額)을 허락하여 많은 선비들의 바람을 위로해 주신다면 의열심을 세우고 세교(世敎)를 천명하는 데 도움 되는 바가 반드시 적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상소의 내용은 해당 조로 하여금 내게 물어 처리하게 하겠다.”

하였다. 연명한 사람은 다음과 같다. 생원 김대하ㆍ윤여명(尹汝明)ㆍ이이승(李以升), 유학 강덕구(康德衢)ㆍ최진악(崔鎭岳)ㆍ고명열(高命說)ㆍ이봉서(李鳳棲)ㆍ김태호(金泰顥)ㆍ이상유(李尙裕)ㆍ김두추(金斗樞)ㆍ이정량(李廷亮)ㆍ허수(許脩)ㆍ김상현(金尙顯)ㆍ임후(林垕)ㆍ이천개(李天開)ㆍ김대명(金大鳴)ㆍ손정유(孫正儒)ㆍ조중정(趙重鼎)ㆍ채명봉(蔡命封)ㆍ김국명(金國鳴)ㆍ김봉명(金鳳鳴)ㆍ임형(林衡)ㆍ허보(許俌)ㆍ김류(金瑠)ㆍ임광윤(林光潤)ㆍ최두채(崔斗采)ㆍ윤이지(尹爾摯)ㆍ윤흥삼(尹興三)ㆍ지흥렴(池興濂)ㆍ손정기(孫正基)ㆍ김진하(金鎭夏)ㆍ이인개(李寅開)ㆍ유자요(劉自堯)ㆍ임태도(林泰道)ㆍ김운창(金運昌)ㆍ이경채(李景采)ㆍ이세휴(李世休)ㆍ임세교(林世僑)ㆍ윤대훈(尹大訓)ㆍ윤상하(尹尙夏)ㆍ김내집(金來集)ㆍ김창후(金昌垕)ㆍ강진동(康鎭東)ㆍ이도익(李道益)ㆍ임정빈(林鼎彬)ㆍ손세적(孫世績)ㆍ윤협(尹浹)ㆍ윤도항(尹道恒)ㆍ이욱(李郁)ㆍ이몽서(李夢瑞)ㆍ윤규(尹圭)ㆍ김세직(金世稷)ㆍ윤정신(尹靖臣)ㆍ윤도제(尹道濟)ㆍ이종윤(李宗胤)ㆍ이익(李益)ㆍ임인서(林麟瑞)ㆍ윤후(尹垕)ㆍ윤세전(尹世銓)ㆍ유계요(劉繼堯)ㆍ백신규(白愼圭)이다.

[주-D001] 대우받지 …… 것 : 주여숙(柱厲叔)이 춘추 시대 거(莒)나라 오공(敖公)을 섬기다가, 자기를 알아주지 않자 그를 떠나 해변에서 살았는데, 오공이 환란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급히 달려가 목숨을 바치려고 하면서 “내가 장차 그를 위해 죽으려고 하는 것은 신하를 몰라주는 후세의 임금들을 부끄럽게 하기 위함이다.[吾將死之 以醜後世之人主不知其臣者也]”라고 말했다. 《列子 說符》[주-D002] 임금이 …… 것 : 안고경(安杲卿)은 당 현종(唐玄宗) 때의 충신으로, 상산 태수(常山太守)를 지내 안상산(顔常山)이라고도 한다. 안진경(顔眞卿)의 사촌형이다. 안고경은 도성과 멀리 떨어져 임금이 안면도 모르는 상산 고을의 태수로서 안녹산(安祿山)의 난에 공을 세웠으나, 끝내 안녹산에게 중과부적으로 사로잡혀 그를 꾸짖다가 사지가 찢기고 혀가 잘려 죽었다. 《新唐書 卷192 顔杲卿列傳》[주-D003] 주변(朱弁) : 남송 고종(高宗) 때의 사람으로 자는 소장(少章)이고, 호는 관여거사(觀如居士)인데 문장에 뛰어났다. 또한 주희(朱熹)의 족조(族祖)이다. 통문 부사(通問副使)로 금(金)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구류되었는데 금나라에 신하 되기를 한사코 거절하며 절의를 지키다가 화의가 성립되자 귀국하여 봉의랑(奉議郞)에 올랐다.[주-D004] 벽성(碧城)의 …… 배향하여 : 고죽군(孤竹君)의 아들은 백이(伯夷)와 숙제(叔齊) 형제를 가리킨다. 1701년(숙종27)에 해주(海州)의 유생 최침(崔沈) 등이 상소하여 이제묘(夷齊廟)의 선액(宣額)을 청하자, 숙종이 ‘청성묘(淸聖廟)’로 정하여 어필로 써서 내려 주었다. 《肅宗實錄 27年 3月 4日, 4月 2日》[주-D005] 서가의 …… 총명함 : 장수양(張睢陽)은 당 현종(唐玄宗) 때 안녹산(安祿山)의 난에 군사를 일으켜 역적을 토벌한 장수 장순(張巡)을 말한다. 책을 읽을 때 세 번만 반복해 읽어도 평생 잊지 않을 정도로 총명했다고 한다. 《新唐書 卷192 張巡列傳》[주-D006] 부산(斧山) : 평양부 서쪽 30리에 있는 산이다.[주-D007] 윤은로 : 원문은 ‘林殷老’이다. 본 기사에 근거하여 ‘林’을 ‘尹’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주-D008] 의지는 3판(板)보다 견고하여 : 춘추 시대 진(晉)나라의 지백(智伯)이 한씨(韓氏)와 위씨(魏氏)를 따라 조 양자(趙襄子)를 공격하면서, 진양(晉陽)을 포위하고 물을 끌어대 공격을 하였는데 성 아래로 잠기지 않은 것이 3판에 이르렀다. 《史記 趙世家》 《戰國策 卷18 趙策》 3판은 6자(尺)이다.[주-D009] 복양(畐陽)의 …… 의지 : 춘추 시대 진(晉)나라가 복양을 칠 적에 복양성 사람이 적의 용맹을 시험해 보려고 베로 만든 띠를 성 아래로 드리우고 적에게 성 위로 올라와 보라고 하자, 근보(堇父)라는 용사가 띠를 잡고 성 위로 올라갔다. 이에 성 위의 사람이 근보가 거의 올라왔을 즈음 띠를 끊었고, 근보는 성 아래로 떨어졌다. 이렇게 하기를 세 차례나 거듭한 끝에 성 위의 사람들이 근보의 용맹에 굴복하였다. 《春秋左氏傳 襄公10年》[주-D010] 견성(汧城)에 …… 계책 : 이 구절은 유종원(栁宗元)의 〈군수양묘비(君睢陽廟碑)〉에 보인다. 견성에 대해서는 자세하지 않으나 《유하동집주(柳河東集注)》에 보면 이 구절이 전국 시대 제(齊)나라 장수 전단(田單)의 고사에서 온 것이라 되어 있다. 전단이 연(燕)나라와 싸우다 궁지에 몰렸는데, 전단이 소 1000여 마리를 모아 용 무늬를 그린 붉은 옷을 입히고 뿔에는 창칼을 달아 놓은 다음, 성벽에 수십 군데의 구멍을 파서 소를 놓은 뒤 기름을 바른 소꼬리에 횃불을 붙여 밤중에 적진으로 내모니, 연나라 군사들이 성나서 달려오는 소를 보고 크게 놀라 달아났다. 《柳河東集注 卷5 君睢陽廟碑》 《史記 田單列傳》[주-D011] 부섭(傅燮)의 탄식 : 후한(後漢) 때 적군이 한양(漢陽)을 포위하고 한양 태수 부섭을 향리로 보내려 하자, 부섭이 “내가 어디로 가겠는가. 나는 반드시 여기에서 죽으리라.”라고 탄식하며 부하들을 지휘하여 싸우다가 전몰하였다. 《柳河東集注 卷5 君睢陽廟碑》[주-D012] 주가(周苛)의 강개함 : 주가는 전한(前漢) 때의 사람으로, 유방(劉邦)을 따라 내사(內史)가 되고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옮겼다. 초나라가 형양(滎陽)을 포위하자 포로로 잡혔는데 항우(項羽)가 항복을 권하면서 상장군(上將軍)으로 임명하겠다고 제안했으나 항복하지 않다가 팽사(烹死)하였다. 《史記 項羽本紀》[주-D013] 강회(江淮) …… 절조 : 당 현종(唐玄宗) 14년(755)에 안녹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켜 장안을 향해 파죽지세로 밀려올 때, 강회의 보장(保障)인 수양(睢陽)에서 이들을 맞아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장수 장순(張巡)과 허원(許遠)의 일을 말한다. 《舊唐書 卷187 張巡列傳》[주-D014] 전횡(田橫)의 …… 일 : 전횡은 제왕(齊王)의 후예로서, 진(秦)나라 말기에 자립하여 제나라의 왕이 된 뒤에 형세가 불리해지자 부하 500여 인과 함께 절도(絶島)로 피해 들어갔다. 그 뒤에 왕후(王侯)로 봉해 주겠다는 한 고조(漢高祖)의 부름을 받고서 낙양(洛陽)으로 가던 도중에 머리를 굽혀 신하가 되는 일은 차마 하지 못하겠다면서 자결하자, 이 소식을 들은 섬 안의 500여 인 역시 모두 자살하여 그 뒤를 따랐던 고사가 전한다. 《史記 田儋列傳》[주-D015] 민이(民彝)와 물칙(物則) : 민이는 인간의 도리 즉 인륜(人倫)을 말하고, 물칙은 만물의 법칙을 말한다. 《시경》 〈증민(烝民)〉에 “하늘이 사람을 이 세상에 내실 적에, 누구나 하늘의 법칙이 그 속에 깃들게 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양심을 가지게 되어, 이 아름다운 덕을 좋아하게 된 것이다.[天生烝民 有物有則 民之秉彛 好是懿德]”라는 구절이 나온다.[주-D016] 장홍(萇弘)의 벽혈(碧血) : 장홍은 주 영왕(周靈王)의 충신으로 모함을 받아 촉(蜀)으로 쫓겨나자 할복자살하였는데, 그때 흘린 피가 3년 뒤에 푸른 옥으로 변했다고 한다. 《莊子 外物》[주-D017] 중국의 …… 일이니 : 평안도 영유현(永柔縣)에 있는 산의 이름이 와룡(臥龍)이어서 선조 때에 제갈량(諸葛亮)의 사당을 세우고, 현종 때 묘호를 ‘와룡’이라 내렸으며, 숙종 때 이 사당에 악비(岳飛)를 함께 배향하였다. 《肅宗實錄 12年 8月 1日, 21年 3月 30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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