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의 명조선

또 이인임이 군사를 일으켜 요동(遼東)을 공격한 것은 그 죄가 몹시 컸고 태조의 회군(回軍)은 신자(臣子)의 의리를 따랐으니, 태조와 인임은 그 처사가 또한 다릅니다. 이것으로 보아도 밝혀..

믿음을갖자 2023. 11. 14. 07:01

 

2.6. 권신의 말년[편집]

우왕이 즉위한 후 십수 년간 권력을 누렸으나 1386년에 몸이 병들어 사직하였고, 그의 빈 자리는 이인임의 일파였던 임견미 염흥방 등이 대신 자리하였다. 이들 또한 이인임 못지 않은, 혹은 그를 능가할 정도의 수탈을 자행하였다. 임견미와 염흥방은 노비들을 풀어서 백성들의 논밭 뿐 아니라 심지어 관료들의 토지까지 강탈하고 다녔는데, 이때 땅 주인이 땅을 내놓지 않으면 수정목(水精木, 물푸레나무)으로 만든 몽둥이로 두들겨 팼기 때문에 세간에는 이른바 "수정목 공문"이라는 말까지 나돌았다.[27]

그러던 와중인 1388년 1월, 염흥방 일파에 의해 토지를 빼앗긴 관리 조반의 옥사 사건이 일어나면서 본래 이인임 일당의 부패를 싫어하면서도 눈감아 주던 최영이 마침내 폭발하여 이성계와 결탁, 이인임의 일파들을 일거에 숙청하게 된다. 이 사건을 무진피화라고 부르는데, 이인임은 이로 말미암아 권력을 모두 잃어버리는 바람에 정치적으로 완전히 몰락하고 말았다. 예상치 못한 최영의 역습에 대경실색한 이인임은 병든 몸을 이끌고 최영의 집으로 달려가 문을 두드렸으나 최영은 끝내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

다만 최영의 서릿발 같은 처벌로 임견미와 염흥방 등이 일족과 함께 극형에 처해졌던 와중에도 이인임은 증조부 이장경 대까지 대대로 살던 경산부[28]로 유배가는 선에서 그쳤다. 이미 사직한 후였던 이인임에게 경산부로 내려가는 일은 크게 형벌이 될만한 처분은 아니었다. 전근대에 이렇게 강력한 권신은 자기 고향에도 막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으므로, 고향으로 유배보내는건 그냥 고향에서의 편안한 가택연금 정도를 뜻했다. 이때 최영이 사사로운 정에 못이겨 이인임을 살려준 것으로 두고두고 욕을 먹는다. 당시 최영이

 

“이인임이 정책을 올바르게 세워 대국을 섬김으로써 국가를 안정시켰으니 허물보다는 공이 큽니다.”
라고 건의해 결국 그 자제까지 모두 용서를 받아서 별다른 처벌도 없었다.[29][30]

그로부터 몇달 후인 위화도 회군(1388. 5) 직후. 조민수가 갓 즉위한 창왕에게 이인임을 복권시켜 이성계와 맞서도록 건의했으나 그때 이인임은 6월에 이미 병으로 사망한 후였다. 조민수가 이인임을 불러들이려고 한다는 이야기가 퍼지자 사람들은 국정이 문란해질 것을 우려했지만, 이미 이인임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사람이 죽이지 못하니 하늘이 대신해서 죽였다"
며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31] 창왕은 이인임의 부고를 듣고
"평생 영예속에 살았으니 그대는 유감이 없겠지만 난 이제 누굴 의지하면 좋은가?"
라는 유약하고 한심한 내용으로 점철된 애도의 교지를 내렸고, 사람들은 그 교지를 보고 비웃었다.[32]

이인임은 살아 생전 최영 숙청하자는 자파의 주장을 무시했는데, 이는 정치적으로 보았을 땐 사실상 보수파이며 여러 면에서 의견이 일치하던 최영의 무력이 자신의 권력을 지탱하는 한 축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영과 이인임은 정치면에서는 제법 의견이 맞았으며 정무를 처리하면서는 충돌하는 일이 있었으나 사적으로는 악감정이 있는 사이가 아니었다. 임견미 염흥방은 독자적으로 최영을 죽이고자 했었는데 이인임의 만류로 이루지 못했고, 나중에 최영을 미리 죽이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탄식하기도 했다. 결국 최영이 변심하고서야 이인임 정권은 무너지게 되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가족까지 주륙하는 가운데서도 최영은 끝내 이인임을 죽이지 못한다. 서로가 서로를 지켜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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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13년 무인(1518) 4월 26일(갑오)

13-04-26[01] 정조사가 새로 사온 《대명회전》에 우리 나라 세계가 잘못 기록되어 있음에 대해 의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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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政院)이 아뢰기를,

“지금 정조사(正朝使)가 새로 사온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우리 나라 세계(世系)가 잘못 기록되었고, 또 우리 조종조에서 하지 않은 사실이 있어 신 등은 이를 보고 매우 놀랐습니다. 이 책은 민간에서 만든 사찬(私撰)이 아니요, 서두에 황제의 어제서(御製序)가 있으니 이는 곧 조정의 공의에 의해 편찬된 것입니다. 금일은 바로 재계하는 날이라 아뢰기 난처하나 몹시 중대한 일이기 때문에 부득이 아뢰는 것입니다. 널리 의논하여 처리하심이 어떠하겠습니까?” 【《대명회전》에 우리 태조가 이인임(李仁任)의 후예로서 왕씨(王氏)의 사왕(四王)을 시해(弑害)하고 왕위에 올랐다고 하였다.】

하니, 전교하기를,

“내가 이미 이 책을 보았다. 그러나 권질(卷帙)이 매우 많아 미처 이 사실은 보지 못하였는데 지금 이것을 보니 몹시 놀랍다. 대신을 불러 의논하라.”

하고, 상이 영의정 정광필에게 묻기를,

“《대명회전》에 크게 놀랄 사실이 있으니, 이를 장차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겠는가?”

하니, 광필이 아뢰기를,

“창업주(創業主)는 대개 참덕(慙德)이 있으나 우리 태조는 의심할 만한 사실이 없습니다. 이처럼 중상하는 말이 분명히 실려 있으니, 어찌 이처럼 생각 밖의 사실이 있는 것이겠습니까? 신이 전에 지나는 얘기 중에 들으니, 대명 조훈조장(祖訓條章)에도 태조를 이인임(李仁任)의 후예로 기록하였으므로 그 당시 태조가 상국에 사실을 밝힌 일이 있다고 하는데, 신은 그 일이 있은 시기를 혼미하여 기억할 수 없으나, 그 말이 사실이라면 이것으로 변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상국에 변명하여 그 글을 고치게 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그렇게 하면, 중국이 과연 이것은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오늘 신이 정부에 합좌(合坐)하였는데 모두들 태조 때 변정(辨正)한 일이 있다고 들었다 합니다. 지금은 신이 혼자 왔으니 예관(禮官)과 함께 의논하였으면 합니다. 이러한 일을 태조께서 어찌 차마 하셨겠습니까? 또 듣건대 ‘태조께서 선위(禪位)를 받을 적에 「내가 만약 강건하다면 필마(匹馬)로 도피하였을 것이다.」 하였다.’ 하기에 신은 항상 이를 성덕(盛德)에서 나온 말이라고 하였습니다.

선조가 한미하실 때 전주(全州)에서 함경도(咸鏡道)에 옮겨 오랑캐들과 섞여 살며 완악(頑惡)한 풍속을 교화하기를 마치 추장(酋長)과 같은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세족(世族)으로 지칭되지 않았고 따라서 상국에서는 우리 선조의 성을 알지 못하였던 것이며, 또 이인임의 성이 마침 국성(國姓)과 같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조종이 불의의 누명을 입고도 아직까지 씻지 못하고 있으니 신은 실로 통분합니다.”

하고, 이자(李耔)는 아뢰기를,

“이 《대명회전》은 한두 사람이 저작한 책이 아니요 곧 조정이 함께 의논하여 찬(撰)한 것입니다. 그 서문의 연월(年月)을 보건대 을사년간에 만든 것이요, 또 황제의 서문이 있으니 실로 귀중한 책입니다.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 같은 데에도 우리 나라를 기록하되 그 세계(世系)를 원조(遠祖)에서부터 태조(太祖)에 이르기까지 분명하게 기록하고, 또 쓰기를 ‘왕요(王瑤)가 혼암하므로 많은 사람이 문하 시중(門下侍中) 모(某)를 추대하여 임금을 삼았다.’ 하였습니다. 그 뒤에 또 고명(誥命)을 내렸다 했는데, 그 고명의 하사는 태종조(太宗朝)에 있었으며, 그 때에는 단지 권지 국사(權知國事)라고만 칭하였으니, 무슨 까닭으로 그랬는지 알 수 없습니다. 조종이 설사 참덕이 있다 하더라도 사실과 다르면 또한 유감일 것인데, 하물며 이와 같이 사실과 다른 일임에리까. 이 말이 반드시 천하에 반포되었을 것이요, 천하에 반포될 뿐만 아니라 또한 후세에까지 전해질 것입니다. 대절(大節)의 사실이 이와 같이 엉뚱하게 전해졌으니, 통분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광필은 아뢰기를,

“이를 변명하는 계책은 단시일 내에 고쳐질 수는 없습니다. 지금 만약 고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그 문서가 후세에 전해져 자연 알게 되리라고 봅니다. 태조가 개국할 때 우리 나라 원로와 군민(軍民)이 상국에 주청(奏請)한 글에 ‘간신 이인임……’ 운운하였는데, 그 문서가 상국에 있으면, 이를 근거하여 이인임의 후예가 아니라는 것이 밝혀질 것입니다. 또 이인임이 군사를 일으켜 요동(遼東)을 공격한 것은 그 죄가 몹시 컸고 태조의 회군(回軍)은 신자(臣子)의 의리를 따랐으니, 태조와 인임은 그 처사가 또한 다릅니다. 이것으로 보아도 밝혀질 것입니다.”

하고, 이자는 아뢰기를,

“공양(恭讓)이 고명을 주청할 때 황제가 이르기를 ‘왕씨(王氏)가 대를 이었는데, 근세에는 왕씨 아닌 자가 왕이 되었으니, 삼한(三韓)이 세수(世守)하는 양법(良法)이 아니다.’ 하였으니, 상국에서도 신씨(辛氏)가 왕씨가 아님을 알았던 것입니다. 왕씨를 시해했다는 것은 이것으로 밝힐 수 있습니다.”

하였다. 광필이 예조 판서 남곤 등과 의계(議啓)하기를,

“지금 승문원(承文院)의 문서(文書)를 상고해보니, 과연 태조조에 이인임의 후예가 아니라는 것을 밝힌 사실이 있었는데, 두 번이나 상국에 주청하여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 당시 상국에서는 이미 조훈조장(祖訓條章)에 씌어진 글을 고치도록 허락하였으니, 지금도 속히 변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사은사(謝恩使)의 행차에는 필시 미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이 큰 일은 쉽사리 될 수 없으니 널리 문서를 상고하여 차차 변명하심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조종이 어찌 이와같은 일을 하였겠는가. 빨리 주청하여 고치게 하라.”

하였다.

【원전】 15 집 425 면

【분류】 외교-명(明) / 왕실-종친(宗親) / 출판-서책(書冊) / 역사-전사(前史)

[주-D001] 왕요(王瑤) : 공양왕의 이름.[주-D002] 신씨(辛氏) : 우왕(禑王)ㆍ창왕(昌王)을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