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흥(都興)ㆍ유운(柳雲)ㆍ김사행(金師幸) 등이 망한 원나라에 들어가서 벼슬하다가 그 일을 보고서는, 마침 태상왕의 창시(創始)하는 초기를 당하여 진언(進言)하기를, ‘인군이 궁중에 처하..
김사행
金師幸김광대(金廣大)
·
생애 및 활동사항
초명은 김광대(金廣大). 공민왕의 총애를 받아 판내부사(判內府事)에 이르렀으며, 1357년(공민왕 6) 왕의 뜻을 좇아 정릉영전(正陵影殿)의 대역사를 일으켜 많은 재력을 소모하였다.
1374년 9월에 공민왕이 죽고 우왕이 즉위하자, 선왕 때의 대역사를 일으킨 죄로 익주의 관노가 되고 가산이 몰수되었으나 곧 풀려나왔다.
1391년(공양왕 3) 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가 되어 경연에 참석하려는 왕에게 경연에 하루 참석하지 않아도 정사에 해로울 것이 없다 하여, 나가지 못하게 하고 불법을 강론하여 이를 믿게 하였다.
조선이 개국된 이듬해에 태조의 명을 따라 팔각전을 보수하였으며, 이 해 7월에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녹훈되었다. 1394년(태조 3) 왕명에 따라 홀치방동(忽赤房洞)에 내구(內廐)를 지었으며, 1397년에 판경흥부사동판도평의사사사 겸 사복사농선공감사(判慶興府事同判都評議使司事兼司僕司農繕工監事)가 되고 가락백(駕洛伯)에 봉해졌으며 곧이어 문묘조성제조(文廟造成提調)가 되었다.
이 해 12월에는 겸판사헌부사(兼判司憲府事)로 수충보리공신(輸忠輔理功臣)에 녹훈되었으며, 판경흥부사 동판도평의사사가 되었으나, 이듬해 제1차 왕자의 난 때 삼군부(三軍府)의 문에 효수되었다.
도흥
都興
생애 및 활동사항
1380년(우왕 6) 원수가 되어 광주(光州)·능성(綾城)·화순(和順) 등지에 침입한 왜구를 방어하였으며, 8월에는 다시 사근내역(沙斤乃驛)에 진을 치고 있던 왜구를 지용기(池勇奇)·정지(鄭地) 등과 함께 공격하였으나 패배하였다. 1383년 양광도(楊廣道)에서 노략질하던 왜구를 격퇴하였고, 8월에는 계룡산에 웅거하고 있던 왜구를 공격하여 공주 반룡사(盤龍寺)에서 8명을 베었다.
1388년(창왕 즉위년) 광주에서 왜구를 물리쳤으며, 또한 양광도 상원수(上元帥)로 남원에서 58명을 죽이고 말 66필을 노획하는 커다란 전과를 올렸다. 1392년(공양왕 4)에 정몽주(鄭夢周)가 피살될 때 그 일당이라 하여 유배되었다.
조선왕조실록 > 정종실록 > 정종 1년 기묘 > 5월 1일 > 최종정보
정종 1년 기묘(1399) 5월 1일(경오)
01-05-01[01] 문하부에서 올린 시무(時務) 10개 조에 관한 상소문
[DCI]ITKC_JT_B0_A01_05A_01A_00010_2005_001_XML DCI복사 URL복사
문하부(門下府)에서 상소(上疏)하여 시무(時務) 열 가지를 진술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소(疏)는 이러하였다.
“1. 효(孝)라는 것은 만 가지 선(善)의 근원이요, 백 가지 행실의 근본이니, 요순(堯舜)의 도(道)가 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태상왕(太上王)께서 춘추(春秋)가 이미 높으시니, 마땅히 시선(視膳)ㆍ문안(問安)의 직책을 부지런히 하여야 할 것입니다. 원하건대, 이제부터 한결같이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태상(太上)을 봉양하던 제도에 의하여, 태상왕의 궁을 성안에 두어 ‘대안궁(大安宮)’이라 이름하고, 날마다 문안을 부지런히 하여 만세에 모범을 남기소서.
1. 태상왕은 높기가 국군(國君)의 아버지가 됩니다. 전하께서 한 나라의 부력(富力)으로 받들어 섬기시니, 봉양하는 도(道)가 후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원하건대 이제부터 그 궁중의 집사(執事)는 액수를 정하여 어질고 능한 사람을 뽑아서 그 일을 보살피게 하시고, 시종하는 사람은 늙고 오래된 사람으로서 일찍부터 명망이 있는 자를 뽑아서 교대하여 입시하게 하시고, 또 절제사(節制使)로 하여금 윤번(輪番)으로 시위하게 하여, 승도(僧徒)와 노예의 무리는 함부로 출입하지 못하게 하소서.
1. 예전에 성왕(聖王)이 관제(官制)와 녹(祿)을 제정하여 각각 그 직책이 있어서, 직책이 없이 녹(祿)을 먹는 자는 없었습니다. 지금은 늙고 병들어 직사(職事)에 마땅하지 않은 자를 모두 검교(檢校)를 주어서, 직책을 맡지 않고도 앉아서 천록(天祿)을 소모하니, 자못 선왕(先王)의 관제를 설치하고 녹을 제정한 뜻이 아닙니다. 이제부터 대소 신료(臣僚) 가운데 나이가 70세인 자는 치사(致仕)하도록 허락하여 각각 사제(私第)로 나가게 하고, 비록 칠순(七旬)이 되지 않았더라도 직사에 마땅하지 않은 자는 또한 검교(檢校)의 직책을 허락하지 말 것입니다. 지금 옹주(翁主)가 19명, 택주(宅主)가 52명, 국부인(國夫人)이 4명, 여관(女官)이 9명, 총계 84인이 앉아서 천록을 먹으니, 나라에 도움될 것이 없습니다. 매양 반록(頒祿)할 때를 당하면 반드시 군자시(軍資寺)의 저장한 것을 사용하여 그 부족한 것을 보충하니, 창고가 비고 군사 양식이 부족합니다. 신 등은 듣자오니, 조정에 요행으로 차지한 벼슬이 없게 되면 먹는 자가 적어진다고 하였습니다. 어찌 그 직책이 없이 녹을 먹는 자가 백 수십여 인이나 될 수 있겠습니까? 그 남편이 큰 훈로(勳勞)가 있어 이미 불차 탁용(不次擢用)하고 또 토전(土田)과 노비[臧獲]를 주었으니, 공을 갚는 은전(恩典)이 이미 후한 것입니다. 어찌 또 부녀로 하여금 같이 녹을 받게 할 수 있겠습니까? 검교의 직책과 부녀의 녹을 일체 정지하여 파하소서.
1. 왕자(王者)의 도(道)는 선(善)한 말 한 마디로 족히 만세에 모범을 남길 수 있고, 잘못된 행실 하나로 천고에 능멸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전에 간혹 사과(司過) 두 사람을 임금 좌우에 두어서 잘잘못을 기록하게 하였는데, 지금 문하부(門下府)의 낭사(郞舍)의 직책을 좌우(左右)로 이름한 것이 대개 그 예입니다. 좌우에 있는 친근한 직책으로서도 전하의 언행의 잘잘못을 참여하여 듣지 못하니, 그 벼슬을 비워 두고 그 녹을 거저 주는 것이 아닙니까? 신 등이 들으니, 경연(經筵)의 제도는 도학(道學)을 강명(講明)하는 것뿐만 아니라 역대 흥망의 자취도 강구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선(善)한 것은 법이 될 수 있고, 악한 것은 경계가 될 수 있어, 족히 그 선한 마음을 용동(聳動)시키고 방종한 뜻을 징계할 수 있다 하옵니다. 지금 경연관은 다만 귀두(句讀)만 알아 도학의 종지(宗旨)도 강명(講明)하지 않고, 역대의 자취도 진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전하께서 날마다 경연에 나아가시나 성학(聖學)에 도움이 없으니, 경연 강관(講官)의 직책을 대단히 잃은 것입니다. 원하건대, 이제부터 매양 경연에 나아가시면 대간(臺諫) 한 사람으로 하여금 교대하여 입시하게 하고, 또 경연관으로 하여금 치도(治道)를 강론하게 하여, 날이 기운 뒤에 파하소서.
1. 타구(打毬)의 놀이는 망한 원(元)나라 때에 임금과 신하가 도리를 잃고 황음(荒淫)하여 행하던 것입니다. 도흥(都興)ㆍ유운(柳雲)ㆍ김사행(金師幸) 등이 망한 원나라에 들어가서 벼슬하다가 그 일을 보고서는, 마침 태상왕의 창시(創始)하는 초기를 당하여 진언(進言)하기를, ‘인군이 궁중에 처하여 만일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반드시 병이 생길 것입니다. 몸을 움직이는 데는 타구(打毬)보다 더 좋은 것이 없습니다.’ 하고, 즉시 그 술책을 행하여 총행(寵幸)을 입었으니, 윗사람의 뜻을 맞춘 죄가 이보다 더 클 수 없습니다. 김사행은 이미 벌써 천주(天誅)를 받았거니와, 도흥ㆍ유운 등도, 바라건대, 유사(攸司)로 하여금 그 직첩을 거두고 외방에 내쫓게 하여 후래(後來)를 경계하소서. 또 전하께서 대업을 이어받으시어 마땅히 선왕(先王)의 도(道)를 법받을 것이지, 어찌 망한 원나라의 하던 짓을 본받겠습니까? 원하건대, 이제부터는 타구(打毬)하는 놀이를 행하지 마시고, 일동 일정(一動一靜)을 예(禮)대로 절제하소서.
1. 옛적에 당나라 태종(太宗)이 위징(魏徵)에게 이르기를, ‘벼슬을 위하여 사람을 택하는 것을 함부로 할 수가 없다. 군자 한 사람을 쓰면 군자가 모두 이르고, 소인 한 사람을 쓰면 소인이 다투어 나온다’ 하였는데, 위징이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천하가 안정되지 않았을 때에는 오로지 그 재주만 취하고 그 행실을 돌보지 않지마는, 난국이 평정된 뒤에는 재주와 행실을 겸비한 사람이 아니면 쓸 수가 없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태상왕께서 창시하던 처음에는 국보(國步)가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여망(輿望)을 거두기 위하여 다만 재주만을 취하고, 대간(臺諫)의 고신법(告身法)을 고쳐서 비로소 관교(官敎)의 제도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어진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이 마구 나와서 조정의 반열에 섞여 있으므로, 염치를 잃어 선비의 기풍이 진작되지 못한 지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원하건대, 관교(官敎)의 폐단을 고치고 고신(告身)의 법을 회복하여 선비의 기풍을 권면하소서.
1. 상의원(尙衣院)은 전하(殿下)의 내탕(內帑)이므로, 의대(衣帶)ㆍ복식(服飾)의 물건을 일체 모두 관장(管掌)하는데, 다만 간사한 소인의 무리로 하여금 맡게 하여 절도없이 낭비하는 데에 이르니, 이제부터 공정하고 청렴한 선비를 뽑아서 그 일을 감독하게 하소서.
1. 나라는 백성으로 보존되고 백성은 신(信)으로 보존되오니, 신(信)이라는 것은 인군의 큰 보배입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시던 처음에 별안색(別鞍色)은 그 폐단이 작지 않다고 하여 공조에 합하고, 중외(中外)에 유고(諭告)하시니, 민중들이 모두 기뻐하여 복종하였는데, 아직 1년도 못되어서 다시 세우시니, 진실로 백성에게 신(信)을 보이는 일이 아닙니다. 공조의 직책은 백공(百工)을 총괄하여 왕사(王事)에 이바지하는 것이니, 이제부터 별안색을 혁파하여 영구히 공조에 붙이소서.
1. 재상의 직책은 도(道)를 논(論)하고 나라를 다스리고 음양(陰陽)을 섭리(爕理)하는 것뿐이요, 전곡(錢穀)을 출납하는 등, 세세한 사무 같은 것은 유사(有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태상왕이 즉위하신 처음에는 사사(使司)의 공응(供應)하는 임무를 예빈시(禮賓寺)에서 주장하고, 국용(國用)의 전곡의 수는 삼사(三司)에서 관장하였으니, 대신을 공경하는 까닭이었습니다. 이제부터 사사(使司)에서 둔 지응고(支應庫)를 혁파하고, 거기에 저축한 전곡(錢穀)은 예빈시(禮賓寺)로 옮겨 국용(國用)에 대비하게 하소서.
1. 고금(古今)의 제왕(帝王)이 간고(艱苦)에서 성공하고 연안(宴安)에서 실패하지 않은 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혹은 식사할 겨를이 없었던 이도 있었고, 혹은 새벽부터 불을 밝히고 앉아서 조회(朝會)를 기다려 정치를 부지런히 한 이도 있었습니다. 전하께서 이미 대업(大業)을 계승하셨으니, 진실로 마땅히 밤낮으로 게을리 하지 말아서 지극한 다스림을 이루어야 할 터인데, 어찌하여 아일(衙日)마다 조례(朝禮)만 받으시고 스스로 청정(聽政)은 하지 않으십니까? 옛적에 노 문공(魯文公)이 네 번씩이나 초하루 조례를 보지 않으니, 이를 《춘추(春秋)》에 써서 만세에 경계를 남겼습니다. 원하건대, 이제부터 아일(衙日)마다 각사(各司)로 하여금 평결(平決)한 여러 사무를 장본(狀本)을 갖추어 계문(啓聞)하게 하소서.”
임금이 읽다가 격구(擊毬)의 일에 이르러서 노여움이 심하여, 좌간의(左諫議) 안노생(安魯生)을 불러 힐난하기를,
“언관(言官)의 직책으로 곧은 말을 하는 것은 가하나, 내가 하는 일을 가지고 부왕(父王)에게 허물을 돌리는 것이 가하냐?”
하고, 장무(掌務) 기거주(起居注) 박수기(朴竪基)에게 일을 보지 말라고 명하고, 소장(疏狀)을 머물러 두고 내려주지 아니하였다.
【원전】 1 집 147 면
【분류】 정론(政論) / 왕실(王室) / 역사(歷史) / 행정(行政) / 재정(財政) / 풍속(風俗)
[주-D001] 불차 탁용(不次擢用) :
관계(官階)의 차례를 밟지 않고 초자(超資)하여 벼슬에 올려 쓰던 일.
[주-D002] 타구(打毬) :
격구(擊毬).
[주-D003] 국보(國步) :
나라의 운명.
[주-D004] 관교(官敎) :
조선조 태조(太祖) 때 3품 이상의 당상관(堂上官)을 임명할 경우에는 대간(臺諫)의 서경(署經)을 거치지 않고 바로 벼슬을 주던 제도.
[주-D005] 별안색(別鞍色) :
궁중에서 말안장의 제조(製造)를 맡아보던 임시 관아. 후에 공조에 소속됨.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이식 (역) | 1974
打毬之戲, 其在殘元君臣失道荒淫之所爲也。 都興、柳雲、金師幸等, 游事殘元, 得見其事, 適値太上王創始之初, 進言曰: "人君處於宮中, 苟不運身, 必生疾病。 運身之利, 莫如打毬。" 乃行其術, 得蒙寵幸, 逢迎之罪, 莫大於斯。 師幸旣伏天誅, 其都興、柳雲等, 望令攸司, 收其職牒, 屛斥于外, 以戒後來。 且殿下纉承大業, 宜法先王之道, 何效殘元之所爲乎? 願自今, 毋行打毬之戲, 一動一靜, 節之以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