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 태종(唐太宗)에 이르러서는 신하로서 돌궐(突厥)을 섬겼고, 그 후에는 토번(吐蕃)과 회골이 번갈아 가며 근심거리가 되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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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집 제9권 / 시화(詩話)
[영(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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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한가(長恨歌)〉에,
밤비 속에 들리는 애끊는 말방울 소리 / 夜雨聞鈴腸斷聲
라는 구절이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처마의 낙숫물 소리를 영(鈴)이라고 하였으니, 이는 곧 속설〔諺言〕에서 나온 것이다.
명황(明皇 당 현종)이 촉(蜀)에 들어갈 때, 사곡(斜谷)에 이르러 밤비 속에 말방울소리를 듣고 〈우림령곡(雨淋鈴曲)〉을 지었다. 대개 중화인들은 말이나 당나귀의 목 아래에 방울을 다는데 길을 가면 소리가 난다. 한악(韓渥)의 시 〈조발남전(早發藍田)〉에 이르기를,
잔도를 돌 때 역사의 말방울소리 들리네 / 棧轉時聞驛使鈴
하였고, 또 두순학(杜荀鶴)의 시〈임강역(臨江驛)〉제6구에 이르기를,
역로의 말방울소리 밤중에 산을 지나네 / 驛路鈴聲夜過山
하였으니, 이를 보면 알 수 있다.
지난날 명나라 군사들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 장관(將官)들의 행차에 대부분 나귀에 행장을 실었다. 그런데 방울을 나귀의 목 아래에 달아서 길을 가면 수많은 방울들이 모두 울렸으니, 이를 보면 더욱 징험할 수 있겠다.
[주-D001] 사곡(斜谷) : 중국 섬서성(陝西省) 종남산(終南山)의 골짜기 이름으로 남쪽 입구가 ‘포(褒)’라 하고 북쪽 입구가 ‘사(斜)’이기 때문에 ‘포사곡(褒斜谷)이라고도 한다.[주-D002] 우림령곡(雨淋鈴曲) : 당 현종 때의 교방대곡명(教坊大曲名)으로 나중에 사조(詞調)로 사용하였다. 《명황잡록(明皇雜錄)》에 “황제가 서촉에 행행(行幸)하여 맨 처음 사곡(斜穀)에 들어갔는데 장마가 열흘 동안 계속되었다. 잔도(棧道) 중간에 방울소리가 들리니 황제가 마침 귀비를 상념하던 터라 그 소리를 취하여 《우림령곡》을 만들어 한을 나타냈다.〔帝幸蜀, 初入斜穀, 霖雨彌旬. 棧道中聞鈴聲, 帝方悼念貴妃, 采其聲爲 《雨淋鈴曲》 以寄恨.〕” 하였다.[주-D003] 한악(韓渥) : 844~923. 만당(晚唐) 시인으로, 자는 치요(致堯)이며 어릴 때의 자는 동랑(冬郎)이고,자호는 옥산초인(玉山樵人)이다. 경조(京兆)의 만년(萬年 지금의 섬서성 서안) 사람이다.[주-D004] 두순학(杜荀鶴) : 846~904. 자는 언지(彦之)이다. 당나라의 시인으로 일설에 의하면 두목(杜牧)의 첩에게서 태어난 자식이라고 한다. 그는 술과 산수를 좋아하였고 거문고에도 능하였으며, 구화산(九華山)에 살아 구화산인이라고 자칭하였다.
ⓒ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ㆍ조선대학교 고전연구원 | 김재희 이덕현 (공역)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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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2년 병오(1726) 2월 1일(갑자) 맑음
02-02-01[17] 진수당(進修堂)에서 소대를 행하는 자리에 참찬관 조영세 등이 입시하여 《자치통감강목》을 진강하고 서북(西北) 지역 등에 문신 통제사(統制使)를 차출하는 문제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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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병태가 아뢰기를,
“12판은 회골(回鶻 위구르)이 침략한 일입니다. 당 왕조는 회흘(回紇 위구르)에 대해 본래 명령대로 따르고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서는 중국이 쇠약해진 것을 틈타 회골이 중국을 깔보고 업신여기는 것이 더욱 심해졌습니다. 군신 상하가 부끄럽고 욕된 것임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제압할 만한 한 가지 계책도 감히 내지 못하였으니 애통할 만한 일입니다. 진 무제(晉武帝)의 잘못된 정책으로부터 중국과 오랑캐의 구분이 엄격하지 못하게 되어, 마침내 남북조 시대(南北朝時代)의 혼란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당 태종(唐太宗)에 이르러서는 신하로서 돌궐(突厥)을 섬겼고, 그 후에는 토번(吐蕃)과 회골이 번갈아 가며 근심거리가 되었으며, 오대(五代) 이후 조광윤(趙匡胤)이 세운 송(宋) 왕조가 일어나자 또 거란에게 견제를 받았고 서하(西夏)로 인하여 남도(南渡)하기까지 하였으니, 위아래 수천 년 동안의 흥망치란(興亡治亂)을 살펴보면 지사(志士)들을 근심하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한 무제(漢武帝)와 같은 부류는 먼 나라를 칠 계략에 힘쓰느라 나라 안이 피폐해져서 참으로 후세 사람들이 모두 웃음거리로 삼고 있지만, 지금 살펴보면 사방으로 오랑캐를 정벌해서 그들의 소굴을 뒤흔들어 놓았기에 그 뒤 수백 년 동안 오랑캐로 인한 근심이 전혀 없어서 중국이 스스로 높이고 기강이 무너지지 않았으니, 그 공렬이 또한 참으로 크다고 하겠습니다. 효종대왕(孝宗大王)께서는 일찍이 ‘한 무제는 한 고조(漢高祖)가 평성(平城)에서 흉노(匈奴)에게 포위되었던 우환을 잊지 않았으니, 한 문제(漢文帝)보다 낫다.’라고 말씀하셨는데, 효종대왕께서 마음속에 품으신 뜻을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또한 슬픈 눈물이 흘러내립니다. 천지가 뒤바뀐 뒤에 세월이 차츰 오래되자 인심이 점점 변해서 의리를 강론하는 것이 분명하지 않게 되었고 눈과 귀로 보고 듣는 것에 이미 익숙해져 버렸으니,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입니다. 이번 변무(辨誣)의 일로 말해 보더라도 오랑캐 조정에 신원(伸冤)해 주기를 바라는 것은 본래 광명정대(光明正大)한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일이 선조(先朝)에 관련되어서 혹시 그동안 거리끼는 것이 있었다고 핑계 댈 만한 점이 있었기 때문에 신들이 과감히 간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뇌물을 주는 것과 같은 일은 가장 부끄러운 일입니다. 성상께서 은화를 많이 가지고 가지 말라고 명하신 것을 들었지만 그래도 우려되는 바가 있고, 또 글의 뜻으로 인해서, 중언부언하는 번거로움을 꺼리지 않고 이에 감히 우러러 아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누누이 아뢰는 것이 좋다. 변무의 일은 성조(聖祖)에 관련된 일이니 부득이한 것이다. 애초부터 뇌물을 주지 않는다면 저쪽 사람들도 그것이 정대한 일임을 알게 될 것이지만, 만약 일단 뇌물을 주게 된다면 일이 구차해진다. 이처럼 막중한 일을 구차하게 미봉할 수 없다는 뜻으로 이미 하교하였으니, 유신이 아뢴 바가 대체로 좋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