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唐)나라에게 침략을 받아 줄어들었고, 백성들은 양자강(揚子江)과 회수(淮水) 지역으로 옮겨가는 등,
숙종실록 31권, 숙종 23년 5월 18일 정유 2번째기사 1697년 청 강희(康熙) 36년
영중추부사 남구만이 《성경도(盛京圖)》라는 지도를 바치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남구만(南九萬)이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신이 선조(先朝)에서 근신(近臣)으로 입시(入侍)하였었는데, 재신(宰臣)이 일을 아뢰고 인해서 말하기를, ‘심양(瀋陽)에서 영고탑(寧固塔)으로 가려면 길이 매우 험하고 멀지만, 만약 우리 나라의 서북(西北)의 변경을 거쳐서 간다면 매우 가까우니, 피중(彼中)에서 만약 급박한 변고가 있어 옛날에 살던 땅으로 되돌아 가려고 하면 틀림없이 돌아가는 길을 버리고 질러가는 길로 나아가면서 우리 나라의 서북 변경을 짓밟으려 할 텐데, 조정에서는 더욱 유의하여 미리 방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지난 신미년175) 사이에 피중에서 백두산(白頭山)의 그림을 그리겠다고 말을 하면서 아울러 다섯 명의 사신을 보내어 우리에게 길을 빌리려고 하였습니다. 그 당시 위로는 조정에서부터 아래로는 하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피중에서 틀림없이 급하게 옛날 살던 지역으로 돌아가야 할 일이 생겨 이렇게 백두산을 그린다고 핑계를 대지만 실제로는 도로를 엿보려는 일이라고 여기고 시끄럽게 떠들며 어수선하여 금지시킬 수 없었습니다.
신은 그윽이 생각하건대, 우리 나라의 서북 두 곳의 변경은 겹쳐진 산봉우리와 깊은 골짜기에 험하고 좁은 길이 하늘에 달려 있는 듯하니, 심양(瀋陽)과 영고탑(寧固塔)의 사이가 틀림없이 이보다 험하거나 이보다 멀 이치가 없습니다. 그런데 《대명일통지(大明一統誌)》의 요동 도사(遼東都司)가 관찰하는 곳은 기재한 것이 매우 간략하여 황복(荒服) 밖의 여러 위(衞)의 경우는 확실히 지적하여 근거로 삼을 만한 것이 없습니다. 작년 봄에 사신으로 연경(燕京)176) 에서 돌아온 자가 있었는데, 돌아오던 중 인가(人家)에서 새로 지은 《성경지(盛京誌)》를 얻어 보았으나 사행(使行) 중에 값을 치를 돈이나 물건이 없어 사오지 못했다고 말하였습니다. 성경(盛京)은 바로 옛날의 심양(瀋陽)이며 청나라 사람이 처음 요동(遼東)을 얻었을 때에 도읍으로 정했던 곳이니, 거기에 대하여 기록을 틀림없이 상세하게 하였을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에, 신이 감히 경연(經筵) 가운데서 진청(陳請)하여 사오도록 하였었는데, 금년 봄의 사행(使行)이 과연 한 본(本)을 구하여 왔습니다. 그래서 예람(睿覽)을 거쳐 비국(備局)에 내렸는데, 신이 처음으로 거기에 기록된 역참과 길을 상고하여 보니, 심양의 동북(東北)에서 오랄(烏剌)까지는 8백여 리이며, 오랄의 동남(東南)에서 영고탑(寧固塔)까지는 4백여 리인데, 이 길은 오랄을 거치도록 설치하였기 때문에 앞에는 북쪽을 향하게 하고 뒤에는 남쪽을 향하게 하여 매우 멀리 도는 듯하며, 합해서 계산해 보면 그래도 1천 3백 리가 됩니다. 만약 심양에서 질러가는 길을 취하여 곧바로 동쪽으로 영고탑을 향하여 간다면, 또한 틀림없는 1천 리는 되겠지만 가깝기는 합니다. 설령 청나라 사람들이 정말로 급하게 돌아가야 할 일이 있었다면, 이러한 지역 내의 익숙한 가까운 길을 버려두고 다른 나라의 한 번도 지나가 보지 않은 먼길을 빌린다는 것은 실제로 이치나 형세로 보아 반드시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감히 《성경지(盛京誌)》 중에 기재된 조그마한 그림을 가져다 그것을 넓혀서 큰 폭으로 만들어 거기에다 이수(里數)를 긋고 산천(山川)·주현(州縣)·참로(站路)의 이름을 갖추어 기재하였으며, 또 그림 아래 역대(歷代)의 연혁(沿革)과 지금 설치한 관청을 대략 기록하여 두루마리로 싸서 붙여 두었습니다.
신(臣)이 여기에서 또 그윽이 느낀 바가 있습니다. 대체로 두만강(豆滿江) 북쪽은 지금은 비록 다른 지역이 되었지만 실로 이곳은 우리 목조(穆祖)·익조(翼祖)께서 임금을 탄생하게 한 곳이니, 주(周)나라에 비교하면 바로 불굴(不窋)177) 이 스스로 융적(戎狄) 틈으로 도망한 것과 고공(古公)178) 이 도혈(陶穴)에서 살았던 것과 같습니다. 지금 두만강 북쪽인 알동(斡東)과 해관성(奚關城) 사이는 옛날 덕릉(德陵)179) 과 안릉(安陵)180) 을 손가락으로 가리킬 만하며, 그 곳에는 철룡(鐵龍)이 산에 묻히고 백마(白馬)가 물을 건넜다는 고사는 변방의 백성들이 지금까지도 이야기로 전하고 있습니다. 지금 성상께서 북쪽을 바라보시며 깊은 지혜로 길이 발현하게 한 상서로움에 대하여 틀림없이 추모하며 깊이 생각하는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요동(遼東) 왼쪽에 이르서서는 처음에는 바로 기자(箕子)가 봉지(封地)로 받은 지역이며, 개원현(開原縣)은 바로 옛날의 부여국(扶餘國)이며, 고구려(高句麗)의 시조(始祖) 주몽(朱蒙)이 나라를 세운 곳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개평현(盖坪縣)은 바로 진한(辰韓)의 옛 지경인데, 역시 우리 삼한(三韓)의 하나입니다. 일찍이 고구려가 융성할 때에는 요동 일대와 여진(女眞)에 속한 것들이 거의가 모두 지경 안에 속해 있으며, 이 때문에 해동(海東)의 강국(强國)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끝에 이르러서는 임금과 신하가 도리를 잃어, 강토는 수(隋)나라와 당(唐)나라에게 침략을 받아 줄어들었고, 백성들은 양자강(揚子江)과 회수(淮水) 지역으로 옮겨가는 등, 정벌을 당하여 멸망되어서 다시는 남은 자취를 찾을 수가 없었는데, 그 흉하고 망하며 번성하고 쇠퇴하던 시기와 병탄(倂呑)하고 분열(分裂)되었던 자취가 모두 이 그림 한 폭 가운데 기재되어 있으니, 또한 개연(慨然)히 탄식을 일으키며 출연(怵然)히 두려움을 생각하게 하는 도구가 되기에는 충분합니다. 압록강과 두만강 두 강의 근원이 모두 백두산 꼭대기에서 출발하여 동서(東西)로 나뉘어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 나라의 계한(界限)입니다. 때문에 지금 이 성경도(盛京圖)에도 이렇게 조선(朝鮮)의 경계를 두 강의 남쪽으로 쓴 것입니다.
지금 우리 나라의 쇠약한 형세와 조잔하고 피폐한 힘을 돌아다 볼 때 늠름(凛凛)하게 스스로 보전하지 못할 근심이 있는데, 기자(箕子)의 옛 강토와 목조(穆祖)·익조(翼祖)가 옛날에 살던 곳을 회복하는 데 대해서는 진실로 감히 망령되게 의논하지 못하지만, 심지어 피중(彼中)의 도적(圖籍)에 기록한 바 우리 나라의 지경으로 여기는 부분에 대해서도 감히 구역을 나누어서 지키며 여러 곳에 주진(州鎭)을 설치하여 거듭 강토를 견고하게 하는 법을 삼는 것마저 엄두를 내지 못하고 내버려 두고 있어, 사람이 살지 않는 수풀 뿐인 곳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하여 단지 인삼(人蔘)을 캐는 간사한 백성으로 하여금 몸을 숨기고 자취를 감추며 들락날락 오가며 마음대로 국경을 넘는 죄를 범하여도 누가 어떻게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논하는 자는 단지 그곳에다 채운 백성들이 국경을 넘는 죄를 범하는 것만 염려할 뿐, 땅을 비워두는 것이 국경을 넘는 죄를 범하는 것보다 더 심한 잘못이 되는 줄을 모르니, 신은 참으로 한스럽게 여깁니다.
거듭 기근이 든 나머지 공용(公用)과 사용(私用)이 모두 곤궁하게 떨어진 때를 당한 지금 진(鎭)을 옮기고 고을을 설치하는 것은 진실로 경솔하게 거론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무산(茂山)의 서쪽인 박하천(朴下遷)·천평(天坪)과 강계(江界)의 동쪽이며 자성(慈城)의 서쪽인 해평(海坪) 등지는 더욱 기름지다고 일컬어지므로, 생업을 잃은 백성들이 그곳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자가 매우 많다고들 합니다. 우선 그 근처에 주둔하고 있는 한 변장(邊將)에게 들어가기를 원하는 백성을 거느리고 개간(開墾)을 주관하도록 해서 가난한 백성을 편안히 거주하게 하며, 또 토지를 개간하고 곡식을 저축하는 계획을 삼아 점차로 개척(開拓)하는 계책을 세우되, 규모(規模)를 일정하게 하여 흔들리게 하거나 침탈당하는 바가 없으면, 방수(防守)하고 연락(聯絡)하는 형세가 여러 해 되지 않아서 이룩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이 그 전에 선조(先朝) 때에 북관(北關)181) 을 다스리는 명을 받고 변방을 순찰하였으므로, 이런 등등의 형세를 대략 알고 소(疏)를 봉하여 올리면서 겸하여 지도를 바쳤더니, 선대왕(先大王)께서 신의 어리석은 견해를 굽어 채택하시어 그 곳에다 시설(施設)하도록 허락하셨기 때문에, 북쪽에서는 무산(茂山) 등 세 진보(鎭堡)를 설치하고 서쪽에는 후주(厚州)를 설치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계해년182) 에 병조 판서에 임명되면서 또 자성(慈城) 등지에다 변장(邊將)을 설치하도록 청하였으나, 조정의 의논이 일치되지 않아 겨우 설치하였다가 도로 혁파하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또 을축년183) 에 국경을 넘어가는 죄를 범한 일이 발생한 것을 인하여 조정의 의논이 무산(茂山)과 후주(厚州)를 아울러 혁파하려고 하므로, 신이 그것을 혁파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극력 말하였으나, 이해(利害)를 지목하여 진달한 것이 명백하지 못하여 마침내 후주는 혁파되었고, 무산은 다행히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이제 들으니, 육진(六鎭) 여러 곳에 해마다 흉년이 들었지만 유독 무산만은 언제나 풍년이 들어 다른 고을에서도 그 영향을 의뢰하고 있으며, 심지어 국경을 넘어가는 죄를 범하여 사건을 발생시키는 경우도 다른 곳에서는 자주 들리지만 무산에서는 발생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발생하지 않은 것은 비록 다행이기는 합니다만, 국경을 넘어가는 죄를 범하는 근심이 반드시 새로 설치한 곳에서만 걱정거리가 되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신은 나이 많고 병이 심하여 죽을 날이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이에 지도 올리는 것을 인하여 상세하게 말하는 것이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경(卿)의 차자(箚子) 내용을 살펴보고 잇따라 지도를 살펴보매, 그 국가를 위하여 깊고도 멀리 염려하는 정성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내 마음에 매우 가상하게 여기며 기쁘게 생각한다. 더욱 자성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면서, 차자 원본을 비국에 내려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