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단군묘 강동 서쪽 3리쯤에 둘레가 410자(尺)인 묘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믿음을갖자 2023. 11. 15. 06:52

 고전번역서 > 명고전집 > 명고전집 제3권 > 소계 > 최종정보

명고전집 제3권 / 소계(疏啓)

승정원에서 단군묘에 복호(復戶)를 두어 수호하기를 청한 계사〔喉院請檀君墓置戶守護啓〕

[DCI]ITKC_BT_0582A_0040_010_0050_2018_002_XML DCI복사 URL복사

단군(檀君)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출현하신 성인으로 역사서에 편발(編髮)과 개수(蓋首)의 제도, 군신과 상하의 구분, 음식과 거처의 예법이 모두 단군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단군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실로 영원히 잊지 못할 은택이 있는 것이니, 존경하고 떠받들기를 지극히 높고 완비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이 강동 현감(江東縣監)으로 있을 때 고을 관아 서쪽 3리쯤에 둘레가 410자(尺)인 묘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이 지긋한 노인들이 전하는 말에 단군묘라고 하였고, 유형원(柳馨遠)의 《여지지(輿地志)》에 실리기도 했으니, 진위를 막론하고 어찌 황폐하게 방치하여 나무꾼과 목동들이 제멋대로 드나들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만일 허황된 일이라서 수호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면 동서 양쪽에 있는 황제(黃帝)의 무덤을 역대의 명군(明君)들이 수호하도록 명한 것은 어째서입니까. 만일 단군이 아사달산(阿斯達山)으로 들어가 신선이 되었으므로 묘가 있을 리가 없다고 한다면 이미 교산(喬山)의 신〔舃〕이 있고 공동(崆峒)의 무덤이 있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더구나 평양에 있는 단군 사당을 본조(本朝)에서 숭령전(崇靈殿)으로 격상시켰습니다. 그렇다면 이 묘에 아직까지 은전을 내리지 않는 것은 진실로 한 가지 흠이 됩니다. 폐지된 제도를 회복시키고 실추된 사업을 거행하는 오늘날 덕을 드러내어 공에 보답하는 도리가 있어야 하겠기에 감히 이렇게 아룁니다.

 

임금께서 다음과 같이 하교하였다.

“비록 믿을 만한 사적은 없지만 고을의 노인들이 이미 가리키는 곳이 있으니, 군졸을 두어 수호하거나 비석을 세워 사실을 기록하는 등 근거할 만한 타도(他道)의 사례가 한둘이 아니다. 더구나 이곳의 사적이 읍지(邑志)에 분명하게 실려 있다고 한다. 그런데도 비석을 세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수호하는 사람조차 없으니 이는 매우 잘못된 일이다.

이미 들은 이상 관리하는 일이 없을 수 없다. 연대가 오래되었고 또 완전히 신뢰할 만한 기록이 없으니, 비록 제사는 설행(設行)하지 않더라도 나무꾼과 목동의 출입은 금지해야 할 것이다.

그대가 연석(筵席)에서 아뢴 말에 대해 거조(擧條)를 내어 해도(該道)의 감사가 순시할 때 직접 지형과 환경을 살펴 무덤 부근의 민호(民戶)로 하여금 영원히 지키게 하고 본읍(本邑)의 수령이 봄가을로 직접 나아가 살펴 감영에 보고하는 것을 정식으로 삼아 시행하라.”

[주-D001] 승정원에서 …… 계사 : 【작품해제】 1786년(정조10) 8월 9일, 저자가 강동 현감(江東縣監)으로 있을 때 올린 계사이다. 저자는 상소에서, 관할 고을에 단군릉이라고 전해져 오는 묘에 대해 나라에서 관리할 것을 요청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55 강동현(江東縣) 고적(古跡) 조(條) 대총(大塚)에는, “하나는 현의 서쪽 3리에 있으며 둘레 4백 10자로 내려오는 말에 단군묘(檀君墓)라 한다. 하나는 현의 북쪽 30리에 있으며 도마산(刀亇山)에 있는데 내려오는 말에 옛 황제(皇帝)의 무덤이라 전한다.” 하여, 강동현에 큰 무덤이 두 개가 전해져 옴을 알 수 있다.[주-D002] 역사서에 …… 하였습니다 : 《동사강목(東史綱目)》 기묘년 조선 기자(箕子) 원년, 즉 주 무왕(周武王) 13년(B.C. 1122) 조에, 단군이 백성에게 편발(編髮)과 개수(蓋首)를 가르쳤으며, 군신(君臣)ㆍ남녀ㆍ음식ㆍ거처(居處)의 제도가 이때에 비롯하였다고 하였다.[주-D003] 여지지(輿地志) : 유형원이 지은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를 말한다.[주-D004] 동서 …… 무덤 : 《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紀)〉에, “황제(皇帝) 헌원씨(軒轅氏)가 죽자 교산(橋山)에 장사 지냈다.”고 되어 있고, 《열선전(列仙傳)》에는, “헌원은 스스로 죽을 날을 잡아 신하들과 이별하였고, 교산에 돌아와 장사 지냈는데, 산이 무너졌을 때 관은 비어 있고 신과 칼만 들어 있었다.”라고 되어 있다. 《장자(莊子)》 〈재유(在宥)〉에, “황제가 천자가 된 지 19년에 명령이 천하에 행해졌는데, 광성자(廣成子)가 공동(空同) 위에 있다는 말을 듣고 가서 만났다.”라고 하여, 은자(隱者)인 광성자를 만난 지역으로 되어 있을 뿐 황제의 무덤이 있다는 기록은 없다. 서형수가 무엇을 근거로 말했는지는 미상이다.[주-D005] 교산(喬山)의 …… 무덤 : 《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紀)에, “황제(皇帝) 헌원씨(軒轅氏)가 죽자 교산(橋山)에 장사 지냈다.”고 되어 있고, 《열선전(列仙傳)》에는, “헌원은 스스로 죽을 날을 잡아 신하들과 이별하였고, 교산에 돌아와 장사 지냈는데, 산이 무너졌을 때 관은 비어 있고 신과 칼만 들어 있었다.”라고 되어 있다. 《장자(莊子)》 재유(在宥)에, “황제가 천자가 된 지 19년에 명령이 천하에 행해졌는데, 광성자(廣成子)가 공동(空同) 위에 있다는 말을 듣고 가서 만났다.”라고 하여, 은자(隱者)인 광성자를 만난 지역으로 되어 있을 뿐 황제의 무덤이 있다는 기록은 없다. 서형수가 무엇을 근거로 말했는지는 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