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단군묘(檀君廟)에 와서 동명왕(東明王)의 위패를 보고, “이는 한인(漢人)이다.” 했다.

믿음을갖자 2023. 3. 6. 15:21

용재총화 제1권

용재총화 제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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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현(成俔) 찬(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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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董) 시강(侍講)과 왕(王) 급사(給事)가 올 때 나는 평안 감사(平安監司)로서 안주(安州)에서 명을 받들었다. 시강이 평양 문묘(平壤文廟)에 와서 알성할 적에 공자의 토상(土像)을 보고, “중국 것과 같다.” 하니, 관반 허양천(許陽川)이, “토상은 부처의 유와 같으므로 서울에 있는 성균관에서는 상(像)을 만들지 않고 위패를 씁니다.” 하니, 시강이 “그것은 좋은 방법이다.” 하였다. 또 단군묘(檀君廟)에 와서 동명왕(東明王)의 위패를 보고, “이는 한인(漢人)이다.” 했다. 또 기자묘(箕子廟)에 가서는 비갈(碑碣)을 쓰다듬으며 높게 소리내어 읽고, “글을 잘 읽었으나 비를 가릴 만한 누각이 없음이 한스럽다.” 하고, 또 그 묘소에 가서 경내를 순회하더니 마침내 조사(弔辭)를 짓고 강개하여 마지않았다. 또 대동강에 배를 띄우고 양천과 더불어 산천의 아름다움을 논할 때에 마침 부슬비가 내리기에 내가 머물기를 청하니, 시강은, “왕사(王事)에는 여정(旅程)이 있으니 머물지 못하겠다.” 하였다. 낭중(郞中)이 소동파(蘇東坡)의,

가볍게 화장한 것이나 짙게 화장한 것이나 모두 좋다 / 淡粧濃沫摠相宜

라는 시구를 읊조리기에 내가 부벽루(浮碧樓)를 가리키며, “저기도 전현(前賢)이 놀던 곳이니 대인을 모시고 한번 올라갔으면 합니다.” 하니, 시강이 흔연히 따랐다. 누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고, “풍경은 무쌍하나 마침 비가 그치었습니다.” 하니, 시강이, “주인이 손을 머물고자 하니 비가 내렸고, 손이 떠나고자 하여 날이 갰으니, 하늘은 주인과 손의 뜻을 모두 아는가 봅니다.” 하고, 서로 읍하고 떠났다. 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에 내가 두 사신을 모시고 물을 따라 내려가니, 어부가 그물을 펴서 고기를 잡는데, 펄펄 뛰는 고기의 지느러미를 치켜 드니 두 사신이 매우 기뻐하더니 마침내 동이 속에 넣어 애완하다가 회(膾)를 치라고 독촉하면서, “신선하고 맛있기는 이보다 더한 것이 없다.” 하였고, 사냥꾼이 꿩을 잡아오니 시강이 손으로 만져 보기도 하고 냄새를 맡기도 하더니, “나도 자로(子路) ()을 본받아 볼까.” 하고 꿩을 수풀 사이에 놓아 주면서, “네 마음대로 날아 가거라.” 하였다. 남호(南湖)에 이르러 조그마한 누각에 올라 쉴 적에 사냥꾼이 노루를 잡아오니, 시강이 노루를 백보(百步)되는 곳의 나무에 묶고 무사들로 하여금 쏘게 하고는 맞으면 손벽을 치고 크게 웃었다. 급사(給事)가, “군자는 포주(庖廚)를 멀리하는 법인데 대인은 어찌 차마 보고 있습니까.” 하니, 시강이, “소나 말과 같은 것은 사람에게 유익한 것이므로 차마 죽이지 못하지만, 노루나 사슴은 사람에게 무익하고 먹기에도 알맞으니 죽인들 무슨 일이 있겠느냐.” 하였다. 평양의 거리를 보고, “여기가 어디냐.” 묻기에, 내가, “이곳은 기자의 유허(遺墟)인데 정전법(井田法)을 시행하던 곳입니다.” 하였다. 내가 몰래 사람을 시켜 마을에서 관현(管絃)을 주악하게 하니, 시강이, “이는 무슨 소리냐.” 묻기에, 내가, “기자가 와서 다스린 뒤로 그 유풍이 아직 없어지지 아니하여 집집마다 현악을 즐기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니, 시강이, “참으로 예의의 나라이다.” 하였다. 그리고 길거리에서 구경하는 부인을 보고, “이들은 주관(州官)의 부인이 아닌가.” 하니, 역관이 “이들은 성중의 창기들입니다. 주관은 모두 사족(士族)이라서 규문에 법이 있는데 처첩이 어찌 길에 나오겠습니까.” 하니, 급사가, “진작 그런 줄 알았으면 마음껏 구경이나 할 것을 그랬다.” 하였다. 풍월루(風月樓)의 못가에 와서는, “여기가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중국이라 할지라도 이와 같은 곳은 드물다.” 하기에, 내가 누기(樓記)를 청하니, 시강이, “주인이 먼 곳까지 따라오면 꼭 지어 드리겠소.” 하기에, 나는 부득이 안주(安州)까지 전송하니 시강이 기문을 지어 내게 주었다. 두 사신은 길을 가다가도 산봉우리를 보면 모두 그 이름을 물었고, 기이한 바위나 이상한 나무가 있으면 말을 멈추고 음상(吟賞)하였으며, 사람을 대하는 것도 온화하고 삼가서 만약 중국의 일을 물으면 모두 숨김없이 이야기하였다. 시강의 시와 글은 모두 맑고 넉넉하였고 필법(筆法)은 진적(晉跡)을 본받았다. 급사의 시와 글씨도 또한 모두 호방하였으니 참으로 쌍벽이었다. 그러나 조칙(詔勅)을 분영(分迎)하는 일이 예(禮)에 어긋나서 우리나라 사람의 비웃음을 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