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사실 오류

내당(內堂)의 물은 인황산(人皇山)에서 내려와 남산을 따라서 살곶(箭串)에 이르러 역류하여 올라가 내당과 서로 배합합니다

믿음을갖자 2022. 11. 23. 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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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7 신해(1731) 5 20(임오) 맑음

07-05-20[27] 시민당에서 산릉을 간심한 대신 이하를 인견하는 자리에 영중추부사 이광좌 등이 입시하여 천장할 자리를 정하는 문제, 천장할 지역의 민전을 보상해 주는 문제, 굶어 죽은 자들에게 치제하는 문제 등을 논의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방금 원임 대신의 상소에 대한 비답에서 대답한 바가 있다. 천릉의 일을 어찌 즐거워서 하겠는가. 말하기 어려운 염려가 있다는 좨주(祭酒)의 말이 참으로 옳다. 옛 능을 연 뒤에 혹시 광(壙) 안에 아무 일이 없다면 어찌 매우 절박하지 않겠는가. 더욱 자세히 살피는 점은 뜻이 있지만, 지금은 교하로 정하는 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다. 오늘의 이 거사는 감여(堪輿)의 술법에 움직인 것도 아니고, 또한 어찌 내 일신을 위한 일이겠는가. 원임 대신이 계축년(1673, 현종14)의 일을 인용하였는데, 수원(水原)은 경기의 중요한 진(鎭)으로 수천의 갑병(甲兵)이 실로 동요하기 어려운 점이 있으니, 지금의 사세가 어찌 그때와 다르지 않은가. 옛 영릉(寧陵)의 일은 갑진년(1724, 영조 즉위년)의 대상(大喪) 때에 영중추부사가 칭찬하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이는 원임 대신이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설령 옛 장릉(長陵)이라면 혹시 영릉에 모실 수 있겠지만 옛 영릉을 어찌 장릉에 모실 수 있겠는가. 후릉(厚陵)의 계축에 대한 이야기를 나도 믿지 않지만 이미 지술을 가지고 묻는다면 마익룡이 어찌 대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무신년(1728) 효장묘(孝章墓) 때에도 옛 영릉의 말이 있었지만, 사대부의 가문으로 말하더라도 성복(成服)한 뒤 제사에 참석하지 않게 되는 상(喪)에 산을 골라 무엇을 하겠는가. 지금은 교하로 정하였고 도성에 비유한 이야기가 소견이 매우 분명하니, 객사 뒤에 혈을 재라. - 탑교(榻敎)를 내었다. - 큰일을 이미 완전히 정하였다. 산과 물의 기운이 같다는 이야기는 과연 어떠한가?”

하니, 이형좌가 아뢰기를,

“함흥(咸興)의 정릉(定陵)과 화릉(和陵)이 산과 물의 기운이 같지만 국내 제일의 명산이라고 합니다.”

하고, 이광좌가 아뢰기를,

“영릉(英陵), 헌릉, 건원릉은 뻗어오는 산세가 실로 만균(萬鈞)의 힘이 되는 곳입니다. 낙혈하는 주변이 왼쪽으로 돌아 오른쪽으로 떨어지므로 산과 물의 기운이 같다는 것과 같으니 지사가 터무니없음을 신은 분명히 알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형은 진달하라.”

하니, 우형이 아뢰기를,

“향교 뒤는 왼쪽으로 돌아 오른쪽으로 떨어지고, 백호는 짧고 청룡은 길며 내당(內堂)에 물이 있는데 서로 배합하지 않습니다. 신은 장담하건대, 산과 물의 기운이 같아서 쓸 수 없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우형의 말은 지나치다. 과연 우형의 말과 같다면 처음에 어찌 운운하였는가?”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읍터를 정할 때 어찌 먼저 향교 터를 살피지 않았는가?”

하니, 이광좌가 아뢰기를,

“향교의 담장 뒤에 기가 모인 곳이 있는 듯하니 주먹을 쥔 것처럼 뇌두를 이루었는데 사람이 만들었는지 하늘이 만들었는지 모두 알 수 없습니다. 이른바 토성이라는 것도 크게 기가 서리지는 않았습니다. 이는 도선(道詵)이 다시 나온 연후에야 쓸 수 있습니다. 영릉(英陵)의 산세는 회룡고조(回龍顧祖)로 오른쪽으로 돌아 왼쪽으로 떨어지니 오늘날의 사람들은 실로 손대기 어렵습니다. 적성(積城) 지역에는 영의정의 조상 산소가 있는데, 오른쪽으로 돌아 왼쪽으로 떨어집니다. 세상에서 흔히 일컫는 산과 물의 기운이 같은 곳이지만 실로 명산입니다. 한양(漢陽)의 산세는 크게 오른쪽으로 돌아 경복궁 터에 모이는데 어느 쪽으로 떨어지는지 불분명하기 때문에 끝내 이 궐만은 못하지만 대체로 도성의 기세가 어찌 웅장하지 않습니까. 내당(內堂)의 물은 인황산(人皇山)에서 내려와 남산을 따라서 살곶(箭串)에 이르러 역류하여 올라가 내당과 서로 배합합니다. 외수(外水)는 왼쪽으로 돌고, 내수(內水)는 오른쪽으로 도니 실로 매우 기이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당의 물은 혈 앞을 지나가지 못하는가?”

하니, 홍치중이 아뢰기를,

“사람의 힘으로 조화를 빼앗을 수 있으니 청룡과 백호가 합류하는 곳에 둑을 쌓아 물을 저장하면 어찌 이쪽저쪽이 있겠습니까.”

하고, 이광좌가 아뢰기를,

“국장 후보지를 기록해 둔 문서에 ‘교하 객사 뒤에 대하여, 옛날의 이름난 지사인 이의신(李宜信)과 박상의(朴尙毅)는 「도읍을 설치할 만하다.」라고도 하고, 「국장을 할 만하다.」라고도 하였다.’ 하였습니다. 신의 선조도 기록한 바가 있습니다. 근세에 반호위(潘好威)와 홍석구(洪錫九)의 무리는 비록 서안 지리(書案地理)라고는 해도 술업은 꽤 정통한데, 모두 객사 뒤를 정혈(正穴)이라고 하였습니다. 숭릉(崇陵)을 간심할 때, 고(故) 상신(相臣) 이상진(李尙眞), 고 판서 정유악(鄭惟岳) 역시 지술에 힘을 썼는데, 그들의 말도 이와 같았습니다. 근자에 고 상신 이준경(李浚慶)의 후손인 이최만(李最晩)은 비록 표준적인 방식의 지술에는 맞지 않는다고 하지만 모두 객사 뒤를 칭찬하였습니다. 여태껏 교하를 출입한 자가 수십 인만이 아닌데 객사 뒤에 대한 이야기는 한 입에서 나온 것 같았습니다. 지금 권진혁과 성천은 이미 도선과 같은 명성을 얻지 못하였으니 그 말을 믿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은 매사에 점잖고 신중하므로 그 말이 이와 같은데 현재는 도선이라도 어디에 얻겠는가. 후릉의 방혈(傍穴)은 이미 계축의 이야기가 나왔으니 쓸 수 없고, 향교 뒤는 또 산과 물의 기운이 같다는 논의가 있으니 또한 쓸 수 없다. 앞으로 몸소 전알(展謁)할 것이니 진실로 오늘 다툴 만한 것이 아니다. 어제 이미 조명신(趙命臣)에게 유시하였는데 오늘의 일로 살피건대, 영중추부사의 도선에 대한 이야기는 반드시 자기의 견해를 세우려 하였기 때문이니 어찌 병통이 없겠으며 원임 대신의 이번 상소 또한 어찌 병통이 아니겠는가. 이기기에 힘쓰며 시기하는 마음으로 하는 일마다 허물이 생기니, 시국으로 말하더라도 이러한 마음이 빌미가 되어 끝내 서로 살육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의학(醫學)과 잡기(雜技) 또한 그렇지 않은 것이 없으니, 내가 몹시 싫어한다. 세도(世道)가 어그러지고 무너짐이 이와 같은 데 이르렀으니 실로 안타깝다. 가장 안타까운 점은 흉패한 성탁(成琢)의  판부사(閔判府事 민진원(閔鎭遠)) 대문에 들이지 않았다.’라는 이야기이니, 이에 어찌 다른 이유가 있겠는가.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아 흉패한 사람이 마음속으로 헤아리는 중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스스로 가벼이 처신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 어찌 개탄스럽지 않은가. 그의 상소에 ‘권이진이 정희량의 어미를 위하여 산을 정해 주었다.’라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지금 권이진의 상소를 보니 원래 이런 일이 없었다고 한다. 마익룡이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을 했다는 것도 근거가 없다고 한다. 오늘의 세도가 어찌 곤란하지 않은가. 나라가 망한다는 말로 임금을 면려하고 경계시킨다면 또한 혹시 되겠지만, 어찌 미심쩍은 일을 소장에 쓴단 말인가. 나는 실로 원임 대신을 위하여 안타깝게 여긴다. 오늘 이렇게 대면한 뒤에 또 이러한 이야기가 나온다면 결코 용서받을 수 없을 것이다. 백 년 가까운 능침을 이번에 옮기려 하는데 내 마음의 슬픔은 본래 이미 견디기 어렵지만, 하늘에 계신 성조(聖祖)의 영령 또한 어찌 편안하겠는가. 원임 대신은 좋아하지 않는 자의 말을 경청한 것에 불과하여 이러한 일을 했으니, 지나간 일은 그만이지만 차후에 혹시 입에 담는 자가 있다면 장차 난언(亂言)의 형률로 시행하여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산을 정하였으니 민전(民田)을 장차 어떻게 할 것인가? 가뭄이 이와 같으니 논은 미처 모내기를 하지 못하였을 듯하지만 밭은 필시 묵어서 버려지지는 않을 것이다. 몇 해 사이에 조금 풍년이 들었으므로 쌀이 이처럼 흔하지만, 흔하면 반드시 귀해지는 것이 순환의 이치이다. 옛말에 이르기를 ‘그 누가 알아주랴, 소반 위의 쌀밥이 낱낱이 모두 모진 고생인 것을.’이라고 하였다. 지금의 천도(天道)가 결실이 어떠할지는 모르지만 공사를 감독하는 사이에 필시 짓밟히게 될 것이니 어찌해야 좋겠는가?”

하니, 윤유가 아뢰기를,

“값은 논밭의 주인이 당연히 받아 가겠지만 경작하는 자는 백성입니다. 이번에 간심 운운한 것이 이미 오래이므로 혹은 씨앗을 뿌리지 않은 자도 있고 혹은 파종한 자도 있습니다. 또 가뭄을 맞아서 백성들이 모두 속수무책으로 앉아 있으니 염려할 것은 없을 듯합니다.”

하였다. 홍치중이 아뢰기를,

“이는 바로 더할 나위 없이 중대한 거사이니 약간의 민폐를 어찌 죄다 돌아볼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토지 값은 당연히 주겠지만 벼가 만약 무성해지면 하늘이 내려 준 물건을 마구잡이로 없애게 되니 또한 매우 불쌍하다. 하늘에 계신 성조의 영령이 또 어찌 마음 상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송성명이 아뢰기를,

“이 때문에 교하의 민심은 오직 속히 결정되기만 바란다고 합니다.”

하고, 홍치중이 아뢰기를,

“신이 보건대 논은 아직 모내기한 곳이 없으며 밭도 대단하지는 않습니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