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사실 오류

남이(南怡)라는 이는 의산위(宜山尉) 남휘(南輝)의 아들로 태종의 외손이었다.

믿음을갖자 2023. 11. 3. 08:38

남이

충무, 南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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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구대신과의 신진세력의 갈등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서북변에 건주위 여진족이 출몰하자 남이는 평안도선위사 윤필상이 지휘하는 정벌군에 우상대장으로 참전했다. 이때 그는 주장 강순, 좌상대장 어유소와 함께 파저강 인근을 공격하여 여진족의 지도자 이만주와 아들 고납합을 죽이는 대공을 세웠다.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다 없애고
두만강 물은 말을 먹여 없어졌네.
사나이 스무 살에 나라 평정 못 한다면
훗날 누가 대장부라 이르리오.

승세에 도취한 남이는 전장에서 회군하면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한시를 지어 자신의 존재감을 한껏 과시했다. 하지만 그 자만이 훗날 자신을 찌르는 칼로 되돌아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야사에 따르면 훗날 유자광이 그의 역모를 고변할 때 이 한시의 3행 ‘남아이십미평국(男兒二十未平國)’의 평평할 평(平) 자를 얻을 득(得) 자로 고쳐 모함했다고 한다.

이수광은 《지봉유설》에 이 한시를 실으면서 ‘그 말뜻이 발호(跋扈)하여 평온한 기상이 없으니 화를 면하기가 어려웠다.’라고 평했다. ‘발호’란 큰 물고기가 통발을 뛰어넘는다는 뜻이니 아랫사람이 권력을 휘둘러 윗사람을 벌하는 것을 일컫는다. 그때부터 남이가 반역의 기운을 품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여진족을 평정한 뒤 남이는 공조판서에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겸직하게 되었고, 한 달 뒤에는 구성군의 뒤를 이어 병조 판서에 발탁되었다. 당시 세조는 남이에게 “이미 공신에 책봉되었고 큰 전공을 세웠으니 자만하는 마음을 갖지 말라”고 말했다. 하지만 남이는 세조가 친림한 연회에서 술에 취한 채 “요즘 주상께서 구성군 이준을 지나치게 총애하는 것은 잘못되었다.”라고 말하는 등 자만심에 가득했다.

그 시절 남이가 객관적으로 뛰어난 인물임에는 분명했지만 그가 질투할 정도로 앞서가던 인물이 바로 구성군 이준이었다. 남이와 동갑나기였던 구성군은 세조의 동생인 임영대군 이구의 아들로 세조의 신임을 받아 이시애의 반란 당시 진압군 총사령관으로 활약했고, 병조 판서가 되었다가 직위를 남이에게 넘긴 다음 1468년 7월, 28세의 나이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영의정까지 올랐다.

이는 종친의 정사 참여를 금지한 국법을 뛰어넘는 이례적인 조치로 항상 그의 뒤를 따라야 했던 남이의 라이벌 의식을 불러일으켰다. 언젠가 그를 뛰어넘어 정계의 주역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것이 남이의 비극적인 미래를 예고하고 있었다. 훗날 구성군 이준 역시 정인지의 모함으로 최세호와 함께 역모에 연루되어 유배형에 처해졌고, 1479년 39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앞서 가는 것이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세조 말기 조정은 한명회, 신숙주, 강희맹 등의 훈구대신과 구성군 이준, 남이 등이 신진세력이 세력을 다투는 형국이었다. 한데 세조가 승하하고 예종이 즉위하면서 저울추는 훈구대신 쪽으로 급속히 기울었다. 젊은 예종이 자신과 비슷한 나이에 초고속 출셋길을 걷고 있던 구성군 이준이나 남이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자광의 고변

1468년 예종은 즉위하자마자 조회에서 형조 판서 강희맹과 중추부 지사 한계희의 의견을 받아들여 남이를 병조 판서에서 겸사복장으로 좌천시켰다. 이는 신진세력을 견제하려는 훈구세력의 노골적인 공세였다. 그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혈기방장했던 남이가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무렵 하늘에 혜성이 나타나 군신 모두가 근심에 잠겨있던 10월 24일, 심야에 병조 참지 유자광이 승지 이극증과 한계순에게 남이의 역모를 고변했다. 예종이 그 말을 전해 듣고 유자광을 불러 자초지종을 캐물었다. 그러자 유자광은 이렇게 말했다.

“예전에 남이는 ‘세조께서는 우리를 아들처럼 대접했지만 그 분이 승하하니 조정의 인심이 바뀌었다. 김국광이나 노사신 같은 간신들이 장난을 하면 우리는 개죽음할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저녁 남이가 우리 집에 와서 ‘혜성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는데 그 빛이 희면 장군이 반역하고 두 해에 큰 병란이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마침내 주상이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옮기는 때를 기다려 거사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예종은 즉시 대궐의 경계를 강화한 다음 사복장 거평군 이복에게 남이를 잡아오게 했다. 이복이 위사 1백여 명을 이끌고 남이의 집으로 달려가 남이와 첩 탁문아를 체포했다. 그날 한밤중에 수강궁 후원 별전에서 여러 종친과 신료들이 입시한 가운데 예종이 직접 남이를 심문했다.

그때 남이는 혜성과 관련된 내용은 인정했지만 역모는 절대 획책하지 않았다고 버텼다. 남이의 첩 탁문아와 남치빈, 이지정 등을 차례로 심문했지만 역모의 정황이 드러나지 않았다. 상황이 미궁에 빠져들자 노회한 한명회가 남이의 노비들을 잡아들여 심문하게 했다. 과연 효과가 있었다.

이윽고 여종 막가가 국문장에 있던 영의정 강순을 지목하며 그가 남이의 집에 자주 드나들었다고 자백했다. 깜짝 놀란 강순은 우연히 한두 차례 들렀을 뿐이라고 변명했다. 그런데 전 판관 이수붕이 여진 출신의 겸사복 문효량과 남이가 함께 일을 도모했다고 고변했다. 국문장에 끌려온 문효량은 가혹한 고문에 시달리다 마침내 역모를 시인하고야 말았다.

“남이가 말하기를, 한명회가 어린 임금을 끼고 권세를 부리니 큰일이다. 너는 해외 사람으로 겸사복에 이르렀으니 나라에 은혜를 갚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면서 강순도 이 일을 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문효량은 남이의 구체적인 계획까지 토설했다. 예종이 산릉에 참배할 때를 기다려 한명회를 없애고, 또 영순군과 구성군까지 죽인 다음 주상을 해치고 임금이 되려 했다는 것이었다. 문효량의 자백으로 인해 더 이상 버틸 힘을 잃은 남이는 드디어 역모를 시인하면서 강순과 함께 도모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로 인해 이 사건은 남이 개인의 역모가 아니라 ‘남이와 강순의 역모’로 규정되었다.

 
 

남이와 강순의 역모

당시 남이가 자신의 역모 혐의에 강순을 저승사자처럼 물고 늘어진 것은 다분히 고의적으로 보인다. 그는 왜 최악의 상황에서 그와 같은 자백을 했을까? 진정으로 모의를 함께 한 사이라면 서로 구원하고 감춰주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인조 대의 공신 김시양의 수필집 《부계기문》에 묘사된 당시의 상황은 다음과 같다.

남이가 국문을 당할 때 강순이 영의정의 직책으로서 들어와 참관했다. 그를 보고 남이는 예종에게 말했다.
“강순도 이 모의에 간여했습니다.”
깜짝 놀란 강순이 예종에게 자신은 이 사건과 무관하다고 강변했다.
“신은 본래 평민으로서 밝으신 임금을 만나 벼슬이 정승에까지 이르렀는데 또 무엇을 구하려고 남이의 역모에 간여했겠습니까.”
임금이 고개를 끄덕이자 남이가 다시 말했다.
“전하께서 그의 거짓말을 믿고 죄를 면케 한다면 어찌 죄인을 찾아낼 수 있겠습니까.”
이에 임금이 마음을 고쳐먹고 형리를 시켜 강순에게도 국문을 가하게 했다. 강순이 나이 80세였으므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이렇게 부르짖었다.
“남이야, 네가 내게 무슨 원한이 있기에 나를 무함하느냐?”
이에 남이가 두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원통한 것은 나와 네가 매한가지다. 네가 영의정이 되어 나의 원통한 것을 알고도 말 한 마디 없이 구원해 주지 않았으니 원통하게 죽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자 강순은 입을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궁지에 몰린 남이가 끝까지 강순이 역모의 동조자라고 주장한 것은 요직에 있던 그가 자신의 억울한 사연을 알면서도 구해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속 좁은 임금이 병조 판서 허종까지 연루시키려 하자 종사를 위해 그의 결백을 보증해 주었다. 그 내용은 인조 때의 문신 박동량이 편찬한 《기재잡기》에 실려 있다.

이때 남이가 심한 형벌로 다리뼈가 부러지자 강순과 역모를 했다고 자백했다. 강순이 거세게 항의하자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자복하지 않은 것은 훗날 공을 세울 것을 바랐기 때문인데 지금 다리뼈가 부러져 쓸모없는 병신이 되었으니 살아 있은들 무엇하겠는가. 나 같은 젊은이도 죽는 것이 아깝지 않은데 머리털이 허옇게 센 늙은 놈은 죽는 것이 진실로 마땅하다. 그래서 내가 고의로 너를 끌어댄 것이다.”
그때 임금이 물었다.
“병조 판서 허종도 역모를 아느냐?”
입시하고 있던 허종이 두려움에 떨며 땅에 엎드렸다. 그러자 남이는 웃으며 대답했다.
“허종은 충신이라 아무 것도 모릅니다. 원컨대 이 사람은 쓰시고 의심하지 마십시오.”
드디어 형을 당할 때 강순이 남이를 돌아보면서 탄식했다.
“젊은 애와 잘 지냈다가 이런 화를 당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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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암집 제13권 / 시(詩)○함인록 상(含忍錄上)

산해관 노래〔山海關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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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보지 못하였는가, 의무려산이 사천 리에 걸쳐 있어 / 君不見醫閭盤根四千里
겹겹이 솟은 형세가 그치지 않음을 / 飛騰合沓勢不止
또 보지 못하였는가, 깊고 넓은 발해가 천지를 싸서 / 又不見渤海汪濊天地包
바람 우레 밤낮으로 그침이 없음을 / 風霆晝夜無終始
무려와 발해가 서로 만나는 곳에 / 巫閭渤海相逢處
산맥이 낮게 깔려 조금 구불구불하네 / 山脈低伏少迤𨓦
진 시황이 성을 쌓아 문득 합봉을 하고 / 秦皇築城便合縫
서달이 중수하니 형세가 비길 데 없네 / 徐達重修勢無比
그 밖은 거친 오랑캐의 유허요 / 其外荒荒戎狄墟
그 안은 바로 적현신주일세 / 其內赤縣神州是
영락 천자가 연경에 도읍하자 / 永樂天子宅燕京
나라에서 오직 이곳을 중시했네 / 國之倚重惟在此
천하의 제일가는 관문이라고 편액을 걸고 / 扁揭天下第一關
네 겹으로 성을 둘러 여덟 문을 만들었네 / 四重城回八門起
배와 수레가 밤낮으로 구주와 통하니 / 舟車日夜通九州
구주의 재화가 구름처럼 쌓였네 / 九州貨寶如雲委
선우가 바라보고 기가 죽었으니 / 單于望之氣不驕
날개가 없는 이상 어떻게 넘을 수 있으리 / 身非羽翼那能超
아아, 사람의 계책이 선하지 못하면 하늘인들 어찌하랴 / 嗚呼人謀不臧天亦何
문을 열고 오랑캐가 거센 바람처럼 밀려왔네 / 開門虜入如風飈
도적들이야 유린하는 게 통쾌하겠지만 / 躪殺盜賊雖快意
손 놓고 천자 자리를 바치는 걸 어쩌랴 / 其奈拱手獻天位
마침내 천하에 단발령(斷髮令)을 내리니 / 遂令天下髮盡薙
유사 이래로 이런 일은 없었다네 / 載籍以來無此事
어찌 삼계에게만 죄를 물으랴 / 三桂之罪何獨誅
아아, 숲으로 참새를 몬 건 명나라 말기의 상황인 걸 / 爲叢驅雀嗟明季

[주-D001] 서달(徐達) : 명나라 태조 때의 장수로 많은 전공을 세워 명나라 제일의 개국 공신이 되고 위국공(魏國公)의 봉호를 받았는데, 산해관을 처음 세웠다고 전해진다.[주-D002] 적현신주(赤縣神州) : 전국 시대 추연(鄒衍)이 대구주(大九州)의 학설을 창립하여 화하(華夏)의 땅을 일컫는 말로 사용하였는데, 후에 중원이나 중국의 이칭으로 사용되었다. 《史記 孟子荀卿列傳》[주-D003] 영락(永樂) : 명나라의 3대 황제인 성조(成祖)로 영락은 그의 연호이다. 태조(太祖) 주원장(朱元璋)의 손자이며 이름은 체(棣)이다. 일찍이 연왕(燕王)에 봉해졌는데, 1402년 무력으로 조카인 건문제(建文帝)를 몰아내고 황제에 올랐으며, 수도를 금릉(金陵)에서 연경(燕京)으로 옮겼다.[주-D004] 구주(九州) : 중국과 그 주변의 나라를 모두 합하여 지칭하는 말로, 여기서는 천하를 이른다. 옛날 중국 전역을 아홉 지역으로 나누어 명명하였는데, 《서경》 〈우공(禹貢)〉에서는 기주(冀州)ㆍ연주(兗州)ㆍ청주(靑州)ㆍ서주(徐州)ㆍ양주(揚州)ㆍ형주(荊州)ㆍ예주(豫州)ㆍ양주(梁州)ㆍ옹주(雍州)라고 하였고, 《주례(周禮)》 〈하관사마(夏官司馬) 직방씨(職方氏)〉에서는 서주ㆍ양주(梁州)를 빼고 유주(幽州)ㆍ병주(并州)를 더하였다.[주-D005] 삼계(三桂) : 오삼계(吳三桂)를 가리킨다. 요동(遼東) 사람으로, 명나라 말기 총병관(總兵官)이 되어 산해관을 지켰다. 이자성(李自成)이 반란을 일으켜 북경을 함락하고 그의 애첩인 진원원(陳圓圓)을 빼앗아 가자, 마침내 청나라 군대를 거느리고 북경으로 들어와 청나라가 중국을 차지하는 길을 열어 놓았다. 청나라가 제국을 세운 뒤에 평서왕(平西王)에 봉해지고 운남(雲南)에 진주하여, 평남왕(平南王) 상가희(尙可喜), 정남왕(定南王) 공유덕(孔有德), 정남왕(靖南王) 경중명(耿仲明)과 함께 청나라 초기 사번(四藩)으로 일컬어졌다. 뒤에 청나라가 번진(藩鎭)을 철폐하려 하자, 반란을 일으켜 남부 지방을 모두 점령하였으나 곧 병사(病死)하였고 손자인 오세번(吳世璠) 대에 이르러서 청나라에 멸망당하였다. 《淸史 吳三桂列傳》[주-D006] 숲으로 참새를 몬 : 엉뚱한 쪽에서 이득을 보게 하는 원인을 제공했다는 의미이다. 《맹자》 〈이루 상(離婁上)〉의 “못을 위하여 물고기를 몰아 주는 것은 수달이요, 나무숲을 위하여 참새를 몰아 주는 것은 새매요, 탕무를 위하여 백성을 몰아 준 자는 걸주이다.[爲淵驅魚者獺也, 爲叢驅爵者鸇也, 爲湯武驅民者桀與紂也.]”라는 말에서 나왔다.

ⓒ 한국고전번역원 | 권경열 (역) |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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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계기문(涪溪記聞)

부계기문(涪溪記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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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계(涪溪)는 즉 종성(鐘城)의 다른 이름으로, 공이 광해 임자년(1612)에 귀양살이하였음.

김시양(金時讓) 찬

 

 

부마 권규(權跬)는 양촌(陽村 권근(權近)의 호)의 아들이다. 태종(太宗)의 딸에게 장가들어 두 아들을 낳으니, 권담(權聃)과 권총(權聰)이다. 권담은 나이 10여 세에 돈녕 직장(敦寧直長)에 임명되었다. 하루는 관아에 출사(出仕)하였는데, 지붕에 올라가 새새끼를 찾다가 도정(都正)이 갑자기 오니 미처 영접하지 못하였다. 도정이 성내어 불러다 뜰에 세워 놓고 힐책하였다. 권담이 즉시 들어가 호소하니, 태종이 웃으며 말하기를,

“너의 벼슬이 낮기 때문이다.”

라고 하고, 그 자리에서 정관(政官)을 불러 권담을 동지(同知)에 임명하였다. 영이 내렸을 때 관야에서는 아직 사무를 마치지 못하였다 도정이 매우 놀라 나가서 영접하였다.

권총은 어릴 때에 태종이 사랑하여 항상 무릎 위에 앉혔다. 시신(侍臣) 중에 수염이 긴 사람이 있었는데, 권담과 권총이 칼을 빼서 잘라버렸다. 여러 신하들이 그들을 죄주기를 청하니, 태종이 이르기를,

“조정의 예는 엄중히 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권총의 죄는 베어 죽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어려서 아무 것도 모르니 그를 살려주는 것이 좋은지 공들의 의견을 따르겠다.”

라고 하였다. 여러 신하들은 머리를 조아리며 사례하니, 숭례문(崇禮門) 밖에 유폐(幽閉)시키도록 명하였다. 한 해 남짓하여 태종은 병이 위독하다고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들어가 문병하니, 태종이 이르기를,

“나의 병이 이미 심하여 의약(醫藥)으로 치료할 수 없다. 공들과 서로 보는 것이 몇 날이나 될는지.”

라고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다 우니, 태종은 길게 한숨을 쉬며 이르기를,

“나는 손자 권총이 병중에 몹시 보고 싶으나 조정이 두려워 감히 보지 못한다.”

하고, 이어 눈물을 흘리니, 여러 신하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석방하기를 청하였다. 태종이 한 세상을 마음대로 다룸이 대개 이와 같았다.

[주-D027] 증(烝) 하였다 : 손윗사람과 간음함.

남이(南怡)라는 이는 의산위(宜山尉) 남휘(南輝)의 아들로 태종의 외손이었다. 근력이 남보다 뛰어났다. 세조 때에 공이 있어서 차례를 뛰어넘어 병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예종(睿宗)은 그를 매우 꺼렸다. 어떤 사람이 그가 공주(公主)와 증(烝)하였다고 고하여 하옥시키고, 이어 모반으로 다스려 죽였다. 바야흐로 남이가 국문을 받게 될 때에 강순(康純)이 영상으로 참여하였다. 남이가 강순이 역모에 가담하였다고 말하니, 강순은 말하기를,

“신은 본래 편호(編戶)로서 성상을 만나 벼슬이 재상에 이르렀사온데, 또 무엇을 얻고자 하여 남이의 음모에 가담하였겠습니까?”

라고 하니, 예종은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남이가 다시 말하기를,

“전하께서 그의 간사한 말을 믿고 사면하신다면 어떻게 죄인을 찾아낼 수 있겠습니까?”

하자, 예종은 국문하라고 명하였다. 강순은 나이가 이미 80으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자복하여 남이와 같이 참형을 받게 되었다. 그는 부르짖기를,

“남이야! 네가 나에게 무슨 원한이 있어서 나를 무함하느냐?”

하니, 남이가

“원통한 것은 나도 너와 같다. 네가 영상으로 나의 원통함을 알고도 한 마디 원해 주는 말이 없으니, 너도 원통하게 죽는 것이 옳을 것이다.”

말하매, 강순은 묵묵히 대답하지 못하였다.

고변한 자와 추관(推官)은 다 녹훈되어 자손들이 그 이익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남이가 죽임을 받은 일은 지금까지도 그 진위(眞僞)를 분변할 수 없다.

익평공(翼平公) 권남(權㩜)에게 딸이 있어서 사위를 고르는데 남이가 구혼(求婚)하였다. 익평이 점장이에게 점을 치게 하니, 점장이가 말하기를,

“이 사람은 반드시 죄를 입고 죽을 것이니 좋지 않습니다.”

라고 하였다. 익평은 자기 딸의 수명(壽命)을 점치게 하니, 점장이가 말하기를,

“이 분은 수명이 지극히 짧고 또 아들도 없을 것입니다. 마땅히 그 복은 함께 누릴 것이고, 그 화(禍)는 보지 않을 것이니, 사위를 삼는 것이 좋겠습니다.”

라고 하자, 익평은 그 말대로 하였다. 남이는 나이 17세에 무과(武科)에 장원하여 지극히 임금의 총애를 입었으며, 28세에 병조 판서로 죽임을 당하였다. 그 딸은 이미 죽은 지 몇 해나 되었다.

 

바다에 밀물과 썰물이 있는 것을 선유(先儒)들은 현망회삭(弦望晦朔)과 기수영허(氣數盈虛)의 논(論)을 두어 그 설이 무궁하다.

그런데 우리 나라 동해에는 밀물과 썰물이 없음을 중국에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선유들 중애 이것을 논한 이는 없다.

문경현(聞慶縣) 토□(兎□) 잔산(殘山) 가에 구멍이 있는데, 밀물ㆍ썰물의 현상이 바다와 차이가 없다. 혹시 해안(海眼)인가. 이것은 무슨 이치인가. 사물에 널리 아는 자라야 능히 분변할 수 있을 것이다.

겨울의 얼음이 여름에 녹는 것은 천지의 떳떳한 법칙이다. 그늘진 산의 참혹하게 얼어터진 땅의 쌓인 얼음이 녹지 않는 경우는 있으나, 여름이 되어서야 비로소 얼음이 언다는 것은 아직 듣지 못하였다.

문소현(聞韶懸)의 산에 구멍이 있는데, 이름을 빙혈(氷穴)이라고 한다. 앞에는 냇물이 있다. 겨울이 되면 구멍에 얼음이 없다가 입하(立夏) 뒤에는 얼음이 얼기 시작한다. 날씨가 건조하고 뜨거우면 얼음은 더욱 성해지고 냇물 또한 얼음이 언다. 생선이나 고기를 구멍 안에 들여 놓으면 잠깐 사이에 얼어버린다. 하지 뒤가 되면 얼음은 녹고 냇물은 맑은 물이 잔잔하게 흘러 내린다. 이것을 가지고 본다면, 여름에는 얼음이 얼지 않는다는 설도 거의 정확한 논은 아니다. 문소는 의성(義城)의 딴 이름이다.

 

을축년(1565, 명종 20)에 명종이 편찮았는데, 세자를 정하지 못해서 중외(中外)가 갈팡질팡하였다.

정승 민기(閔箕)가 그때 재상 자리에 있었다. 비밀히 영상 이준경에게 말하기를,

“성상의 병환이 위중하신데 공은 영상으로서 어찌 사직(社稷)에 대한 근심이 없습니까?”

하였다. 이공(李公)은 크게 깨닫고 들어가 후사를 세울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상의 말이 이미 알아 들을 수 없었다. 인순왕비가 말하기를,

“순회세자(順懷世子)가 죽은 뒤에 성상께서 덕흥군(德興君)의 셋째 아들을 보고 감탄하여 이르기를, ‘진인(眞人)이 이미 나왔으니 나의 아들이 마땅히 죽어야 할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준경이 말하기를,

“성상의 뜻이 여기에 있습니다.”

라고 하고, 드디어 장수에게 명령하여 선조를 잠저(潛邸)에서 호위하게 하였는데, 명종은 그것을 알지 못하였다.

상의 병환이 조금 나아서 경연을 열었다. 민공(閔公)이 자청하여 특진관(特進官)이 되어서 입시하였다. 이공이 상의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었다.

“옥후(玉候)가 편찮으시니, 온 나라 안이 두려워하면서 모두 세자가 정해지지 않은 것을 근심하므로 신이 대신으로 있으면서 종묘 사직을 위한 계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상은 얼굴빛이 즐겨하지 않으며 말하였다.

“나의 병이 어찌 죽기까지야 하겠는가. 그런데 대신이 미리 이 일을 꾀하였단 말이오?”

민공이 소매 속에서 《대학연의(大學衍義)》의 정국본권(定國本卷)을 꺼내어 올리고 아뢰기를,

“대신이 나라 일을 꾀하는데 어찌 몸을 돌아보는 계책을 하겠습니까? 고금의 난망(亂亡)은 항상 후사가 정해지지 않은 데서 생기는 것입니다. 만약 이 책을 보시면 성상께서도 자연 아실 것입니다.”

하였다.

명종이 자세히 살펴보더니, 얼굴빛이 비로소 평안해져서 말하였다.

“영상이 몸을 바쳐 나라 일에 죽고자 하였으니, 사직(社稷)의 신하라고 할 수 있소.”

이어 경연에서 《대학연의》를 강의(講義)하라고 명하고, 민공에게 표피(豹皮)를 하사하였다. 《연의(衍義)》를 진강(進講)하는 일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선조가 등극(登極)한 뒤에 민공이 첫째로 정승 자리에 올랐다.

이동고(李東皐)가 고명(顧命)을 받으려 할 적에 주서 윤탁연(尹卓然)을 주렴 앞으로 불러들여서 쓰게 하였더니, 탁연은 제삼(第三)의 삼(三) 자를 삼(參)으로 썼으며, 잠저에 나아가 맞이할 때에는 선조가 바야흐로 덕흥군의 상(喪)을 당하여 동생들과 여막(盧幕)에 함께 있었는데, 탁연은 모두 나와서 차례로 서게 한 다음 선조를 맞아 돌아오니, 사람들은 그의 임기응변에 탄복하였다.

이동고가 고명을 받고 빈청(賓廳)에 나와서 병조를 하여금 군대를 정돈하게 하고, 예조로 하여금 맞이하는 의식을 정비하게 하였다. 정승 이양원(李陽元)이 그때 도승지로 있으면서 삼사(三司)의 장관(長官)을 불러서 참여하게 하기를 청하니, 동고가 성난 기색으로 말하기를,

“내가 영상으로서 유교(遺敎)를 받들어 거행하는데 그대가 삼사를 불러서 장차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

하였다. 이공이 황공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선조가 즉위한 뒤에 이공을 죄주고자 하는 이가 있었다. 동고는 막으면서 말하기를,

“이공은 다만 큰 일을 삼가고자 하였을 뿐이니, 어찌 다른 뜻이 있었겠는가?”

하니, 논의가 드디어 정지되었다. 이공은 마침내 스스로 불안하여 안동 부사(安東府使)가 되기를 청하였다. 선조가 혐의하지 않고 마침내 크게 등용하였다. 옛날 송영종(宋英宗)이 채양(蔡襄)을 죄주지 않은 것을 오히려 위대한 일이라고 하였는데, 선조는 죄를 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크게 등용하고 의심하지 않았으니, 덕이 천고에 으뜸으로 제왕(帝王)의 큰 법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이공이 만약 성명(聖明)의 세상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일족(一族)이 전멸되는 주륙(誅戮)을 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순회세자가 죽은 뒤에 명종이 하원(河原)ㆍ하릉(河陵)ㆍ선조와 풍산(豊山) 등 여러 왕손(王孫)을 궁중에서 가르쳤다. 하루는 글씨를 써서 올리라고 명하였다. 여러 군(君)들 중에 어떤 이는 짧은 시를 쓰고, 어떤 이는 연구(聯句)를 썼는데, 선조는 나이가 가장 어렸다. 홀로 ‘충효본무이치(忠孝本無二致)’라는 여섯 글자를 써서 올리니, 명종이 매우 기특하게 여겼다. 하루는 또 익선관(翼善冠)을 쓰게 하면서,

“너희들이 머리의 크기를 알아보려고 한다.”

하였다. 여러 군들이 차례로 써 보았다. 선조는 두 손으로 관을 받들어 도로 어전(御前)에 두면서 머리를 조아려 말하기를,

“이것이 어찌 보통 사람이 쓸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명종이 더욱 기이하게 여겨 드디어 왕위를 전수할 뜻을 정하였다고 한다.

 

판서 윤극형이 을미년에 대사헌이 되어 아뢰기를,

“임진년 난리에 종묘 사직이 거의 망하게 되었으며, 적이 남쪽 지방에 웅거해 있어서 국세가 위급하니, 청컨대, 존호(尊號)를 버리시어 인심을 위무(慰撫)하십시오.”

라고 하였다. 상이 그 의견에 따르려고 하는데, 대신들이 불가하다고 하였다. 공은 조정에 있기가 불안하여서 사직하였다. 뒤에 어떤 일에 관련되어 파면되었는데, 10년 동안 서용되지 못하였다.

선조 말년에 왕자는 더욱 횡포해져서 하원부인(河原夫人)을 자기 집에 가두었다. 하원은 즉 선조의 누나이다. 대간이 그 일을 논핵하니, 이선복(李善復)이 그때 정언으로 있었는데, 병을 핑계대고 논의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상의 뜻을 엿보아 도리어 대간이 경솔하게 왕자를 논핵한 죄를 탄핵하였다. 상은 그것을 옳다고 하여 대사간 송순(宋諄)을 벼슬에서 내쫓아 집에 돌아가게 하니, 사간 김대래(金大來)가 매우 두려워하여 스스로 임석령(任碩齡)에게 속았다고 진술하였다.

상은 곧장 석령을 내쫓으라고 하였다.

이 일로 연유하여 선복은 총애를 얻어 두어 해도 못되어서 차례를 뛰어넘어 승지에 임명되니, 사람들은 다 욕을 하였다. 대래는 뒤에 직제학이 되었는데, 유영경의 심복이라고 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안시성주(安市城主)는 조그마한 외로운 성으로 천자의 군대를 막아냈으니, 세상에 드문 책략가일 뿐만 아니라, 성에 올라가 절하고 하직하는데 말이 조용하여 예의의 바름을 얻었으니, 진실로 도(道)를 아는 군자이다. 아깝게도 역사에서 그의 이름을 잃었는데, 명나라 때에 이르러 《당서연의(唐書衍義)》에 그의 이름을 드러내어 양만춘(梁萬春)이라고 하였다. 어떤 책에서 찾아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안시성의 공적이 책에서 찬란히 빛나고 있다. 진실로 그의 이름이 잃어지지 않고 전하였더라면 《통감강목(通鑑綱目)》과 《동국사기(東國史記)》에 응당 모두 유실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찌 수백 년을 기다려서야 비로소 《연의(衍義)》에 나오겠는가. 거의 믿을 수 없다.

이시애(李施愛)가 반역할 때에 치밀하게 자기 편을 배치하고 기일을 정하여 거사하니, 함흥 이북 사람들이 하룻밤 사이에 장수와 관리들을 다 죽이고 호응하였다. 그가 가령 새로 일어난 날카로운 사기를 인하여 길게 몰아 재를 넘어왔다면 누가 방어할 수 있었겠는가.

시애가 이성(利城)에 이르러 현감의 아내를 차지하고는 미혹되어 환락에 빠져 남쪽으로 전진할 마음이 없게 되자,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해이해져서 드디어 멸망하게 되었다고 한다.

[주-D001] 풍패(豊沛) : 항우(項羽)와 싸워서 제위(帝位)에 오른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 패현(沛縣) 풍읍(豊邑) 사람이었으므로, 뒤에 제왕의 고향을 풍패라 일컬었다.[주-D002] 요황(要荒) : 요복(要服)과 황복(荒服)의 준말이니, 즉 국도(國都)에서 멀리 떨어진 곳.[주-D003] 백집사(百執事) : 온갖 벼슬아치라는 말. 《서경》〈반경(盤庚)〉 하에 “백집사의 사람은 거의 다 헤아릴지어다[百執事之人尙皆隱哉].”라는 말이 있는데, ‘은(隱)’은 ‘탁(度)’의 뜻임.[주-D004] 동조(東朝) : 한 나라 때의 태후(太后)가 항상 거처한 장락궁(長樂宮)이 미앙궁(未央宮) 동쪽에 있었으므로, 전하여 태후 즉 대비(大妃)를 동조라 칭한다. 여기에서는 문정왕후(文定王后)를 말함.[주-D005] 을사년의 옥사 : 명종 원년(1545)에 일어난 옥사. 명종의 외숙 윤원형(尹元衡)은 인종의 외숙 윤임(尹任)을 미워하였다. 그는 인종이 승하하고 어린 명종이 즉위하여 그 어머니 문정왕후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게 됨을 기회로 윤임의 일당과 유관(柳灌)ㆍ유인숙(柳仁叔) 등을 죽이고, 많은 명사들을 죽이거나 멀리 귀양보냈다. 이를 을사사화(乙巳士禍)라고 한다.[주-D006] 삼종(三從) : 여자가 지켜야 할 도리로, 즉 출가 전에는 아버지를 따르고, 시집가면 남편을 따르고, 남편이 죽으면 아들을 따르는 것.[주-D007] 옥관자(玉貫子) : 옥으로 만든 관자(貫子)로 종1품의 벼슬아치는 새김을 놓지 않고, 당상 정3품 이상의 벼슬아치는 새김을 놓았다. 관자는 망건(網巾)의 끈을 꿰는 작은 고리이다.[주-D008] 상사(上舍) : 생원과 진사의 별칭으로, 옛날 태학에서 생원과 진사는 상사(上舍), 즉 위채에 거처하였기 때문임.[주-D009] 유색신(柳色新) : 당(唐) 나라 왕유(王維)가 읊은 “위성에 아침 비가 가벼운 티끌 적시니, 객사에 푸르고 푸른 버들빛이 새롭네[渭城朝雨浥輕塵 客舍靑靑柳色新],”라는 시에 ‘유색신(柳色新)’이 유극신과 비슷하므로 농담한 것이다.[주-D010] 쇄직(鎖直) : 며칠이고 외출하지 않고 숙직하는 것.[주-D011] 밀계(密啓) : 비밀히 아뢴 글로, 여기서는 윤원형 일파가 윤임 일당을 제거할 목적으로 아뢴 것.[주-D012] 입언(立言) : 썩지 않을 중요한 언론이나 학술을 수립하는 것.[주-D013] 선생안(先生案) : 각 관아(官衙)의 전임 관원의 성명ㆍ관명ㆍ생년간지(生年干支)ㆍ본적 등을 적은 책.[주-D014] 구익부인(鉤弋夫人) : 한 무제(漢武帝)의 후궁인데, 첩여(婕妤 궁중의 여관(女官)을 이름)가 되어 구익궁(鉤弋宮)에 있었으므로 구익부인이라 한다. 무제가, 그가 낳은 구익자(鉤弋子)를 태자로 세우려 하면서 아들은 어리고 어미는 젊으므로 그가 행여 음란할까 염려하여 사사(賜死)하였다. 구익자가 즉위하니 곧 소제(昭帝)이고, 소제는 그를 황태후(皇太后)로 추존하였다. 《한서 외척전(漢書外戚傳)》[주-D015] 견후(甄后) : 삼국(三國) 시대 위 문제(魏文帝)의 부인으로, 뒤에 후(后)가 됨. 명제(明帝)와 동향공주(東鄕公主)를 낳았다. 뒤에 곽후(郭后)에게 총애를 빼앗기고 원망하다가 사사되었다.[주-D016] 승호(蠅虎) : 거미의 한 가지. 파리 잡는 거미로 그 피를 빨아먹음.[주-D017] 질정관(質正官) : 사신과 동행하여 문자(文字)의 음운(音韻)이나 사물의 의심된 것을 중국에 질문하여 알아오게 하는 임시직.[주-D018] 허물을 …… 안다 : 《논어(論語)》〈이인편(里仁篇)〉에 나오는 말로 〈주자집주〉에 의하면, 군자는 항상 후덕한 데서 과실을 범하고 소인은 항상 야박한 데서 과실을 범하니, 이것을 살피면 사람의 어질고 어질지 못함을 안다는 것이다.[주-D019] 부마(駙馬) : 부마도위(駙馬都尉)의 준말로, 공주(公主) 또는 옹주(翁主)에게 장가든 사람.[주-D020] 예위(禮圍) : 생원ㆍ진사의 복시(覆試). 예조에서 시취(試取)하였기 때문에 예위라고 함.[주-D021] 자기(子奇) : 춘추 시대 제(齊) 나라의 현인(賢人)으로 재주가 매우 있었음.[주-D022] 동년(同年) : 동시에 과거에서 같이 급제한 사람.[주-D023] 기축년의 화 : 선조 22년(1589),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을 계기로 일어난 옥사. 이 사건을 계기로 동인(東人)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고, 서인(西人) 정철(鄭澈)이 옥사를 맡아 반대당의 많은 명사들이 원통하게 사형 또는 멀리 귀양가곤 하였다. 이 사건으로 이발(李潑)ㆍ이길(李洁)ㆍ백유양(白惟讓)ㆍ유몽정(柳夢井)ㆍ최영경(崔永慶) 등이 죽고, 정언신(鄭彦信)ㆍ정언지(鄭彦智)ㆍ정개청(鄭介淸) 등은 유배되었으며, 노수신(盧守愼)은 파직(罷職)되었다.[주-D024] 동벽(東壁) : 회좌(會座) 때에 좌석의 동쪽에 앉는 관직으로, 의정부의 좌참찬과 홍문관의 응교ㆍ부응교, 통례원(通禮院)의 인의(引儀).[주-D025] 총죽(葱竹)의 교우(交友) : 어릴 때 파로 피리를 불고, 대나무 말을 타고 서로 희롱하며 놀던 옛 친구.[주-D026] 기시(棄市) : 죄인을 사람들이 많은 시장에서 처형함.[주-D027] 증(烝) 하였다 : 손윗사람과 간음함.[주-D028] 편호(編戶) : 호적에 편입된 보통 백성으로, 평민(平民)임.[주-D029] 선온(宣醞) : 임금이 신하에게 술을 하사함.[주-D030] 태초(太初) : 천지가 개벽하던 맨 처음.[주-D031] 정옥(頂玉) : 관원이 모자에 꾸미개로 붙이는 옥.[주-D032] 진만년(陳萬年) : 한 선제(漢宣帝) 때 사람. 웃사람의 비위를 잘 맞췄으며, 특히 외척(外戚) 허사(許史)에게 뇌물을 많이 바쳤으므로, 고을 아전에서 발탁되어 벼슬이 어사대부(御史大夫)에 이르렀음.[주-D033] 주조(周朝) : 주(周) 나라의 조정. 여기에서는 당 나라의 측천무후(則天武后)가 황제의 위를 찬탈하고 나라 이름을 주라고 일컬을 때의 조정을 말함.[주-D034] 두 장(張)씨 : 장역지(張易之)와 그의 아우 장창종(張昌宗). 그들은 무후에게 총애를 받았으나 뒤에 장간지에게 피살됨.[주-D035] 길욱(吉頊) : 성질이 음독(陰毒)하고 일에 대하여 과감하게 말하였으며, 무후 때에 봉각난대 평장사(鳳閣鸞臺平章事)까지 지냈다. 처음 중종(中宗)이 황태자가 되지 못할 때에 장역지와 장창종이 자신들의 안전책(安全策)을 그에게 비밀히 묻자, “공의 형제는 총애를 받음이 이미 깊으니, 천하에 큰 공을 세우지 못하면 보전하지 못할 것이오. 지금 천하 백성들이 모두 이가(李家 당 나라는 이연(李淵)이 세움)를 사모하오. 명공(明公)께서 만약 여릉(盧陵 중종(中宗)) 및 상왕(相王 예종(睿宗))을 세우자고 청하여 백성들의 바람에 부응하면 복록을 길이 누길 것이오.” 하니, 역지 등은 그 말을 옳게 여겨 주청(奏請)하였다. 《구당서(舊唐書)》〈혹리(酷吏)〉 상(上).[주-D036] 취일지공(取日之功) : 제왕을 추대한 공(功)으로 봉일지공(捧日之功)과 같음.[주-D037] 소미성(少微星) : 별 이름. 태미성(太微星) 서쪽에 있는 네 개의 별로 사대부(士大夫)ㆍ처사(處士)를 상징하는 별.[주-D038] 참승(驂乘) : 임금 곁에서 모시고 수레를 탐. 옛날 수레 타는 법은 어자(御者)가 수레의 가운데에 타고, 임금이 왼쪽에, 오른쪽에는 호위하는 사람이 타서 수레가 기울지 않게 하였다. 그 오른편에 타는 것을 참승이라고 하는데, 임금이 친애하는 측근의 신하를 태운다.[주-D039] 사액(賜額) : 사(祠)ㆍ원(院) 등의 명호(名號)를 하사함. 여기에서는 서원(書院)의 명호(名號)를 임금이 정하고 현판을 내려주는 것을 말하고 있다.[주-D040] 신물(贐物) : 멀리 여행하는 사람에게 선물로 주는 물품.[주-D041] 강어(强禦) : 강력하게 선(善)을 물리치는 것으로 악에 강하여 선을 거부함.[주-D042] 진이(陳理)와 명승(明昇) : 진이는 진우량(陳友諒)의 아들인데, 진우량은 원 나라 말년에 채석기(采石磯)에서 황제라 일컫고 나라 이름을 한(漢)이라고 하였다. 진우량이 명 태조와 싸워 유시(流矢)에 맞아 죽고, 진이가 뒤를 이었다.[주-D043] 복계(覆啓) : 임금께 복명한다는 말. 그러나 여기에서는 계복(啓覆)의 뜻으로 쓰고 있다. 계복은 임금께 상주(上奏)하여 죽일 죄인을 다시 더 심리하는 것.[주-D044] 이름하여 …… 고치지 못한다 : 유여(幽厲)는 포학한 임금의 시호로 어리석은 임금의 시호는 유이고, 악독한 임금의 시호는 여이다. 여기에서는 이 말을 인용하여 한번 붙여진 악명(惡名)은 고칠 수 없다는 것을 말하였다.[주-D045] 간신이 …… 걸어야 하겠다 : 양국충은 당 나라 양귀비(楊貴妃)의 6촌 오빠로, 현종(玄宗) 때 벼슬이 재상에 이르렀다. 그런데 음란하고 방종하며 불법하였다. 안녹산(安祿山)이 배반하니, 현종에게 촉으로 피난할 것을 진언하였다고 한다. 촉으로 가는 도중 마외파(馬嵬坡)에서 금군에게 죽임을 당하였다.[주-D046] 전대(專對) : 사신이 외국에 가서 의외의 질문에도 자유자재로 대처함.[주-D047] 전사십배(前使十輩)의 죽임 : 한 나라 고조 7년에 흉노(匈奴)를 치고자 하여 사자(使者) 10인을 흉노에 보내었다. 흉노가 건장한 무사와 살찐 우마(牛馬)는 다 숨기고 노약(老弱)하고 수척한 마소만을 보였다. 10인의 사자가 돌아와서 다, “흉노는 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고조가 다시 유경(劉敬)을 흉노에 사자로 보냈다. 돌아와 복명하기를, “흉노가 좋은 것을 보이지 않고 나쁜 것만을 내보이니 반드시 복병(伏兵)이 있을 것입니다. 흉노를 쳐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그러나 고조가 듣지 않고 군대를 거느리고 정벌의 길에 올랐다. 평성(平城)에 이르러 과연 적의 기병(奇兵)에게 포위되어 겨우 살아 돌아왔다. 고조는 드디어 먼저 사자로 보냈던 10인을 모두 베어 죽였다.[주-D048] 교사(郊社) : 교(郊)는 하늘에 제사하는 것이고, 사(社)는 사직(社稷)에 제사하는 것.[주-D049] 해안(海眼) : ① 땅 속을 숨어 흐르는 샘. ② 밀물이 되면 나오고 썰물이 되면 없어진다는 샘.[주-D050] 무오년의 옥사 : 연산군 4년(1498)에 유자광(柳子光) 등이 사림파인 김일손(金馹孫)의 사초(史草) 속에 삽입된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은 세조(世祖)가 단종(端宗)의 왕위를 찬탈한 것을 비방한 것이라고 연산군에게 참소하여 김종직을 부관참시하고, 김일손ㆍ권오복(權五福)ㆍ권경유(權景裕)ㆍ이목(李穆)ㆍ허반(許盤) 등을 죽이고, 많은 사림파의 명사들을 유배시키거나 또는 벼슬에서 내쫓은 일. 사초가 원인이 되었다고 하여 사화(士禍)라고도 한다. 이 사화는 사림파의 중심 인물인 김종직을 중심으로 성종 때부터 많은 인사가 중앙에 등용되어 삼사(三司)를 장악하고, 훈구파들의 구악(舊惡)을 파헤치며 시정을 과감하게 개혁하는 데에 불만을 가진 훈구파들의 감정과 정권욕에서 빚어진 사건으로, 4대사화(四大士禍) 중 첫 번째 사화이다.[주-D051] 치명(治命) : 죽을 무렵에 맑은 정신으로 한 유언(遺言).[주-D052] 고명(顧命) : 제왕(帝王)의 유언(遺言)이나 유조(遺詔).[주-D053] 빈청(賓廳) : 대신이나 비국(備局)의 당상들이 모여서 회의하던 곳.[주-D054] 익선관(翼善冠) : 임금이 평상복 차림으로 정무(政務)를 볼 때에 쓰는 관.[주-D055] 격쟁(擊錚) : 원통한 사정이 있는 사람이 임금에게 하소연하고자 할 때에, 거둥하는 길가에서 꽹과리를 쳐서 하문(下問)을 기다리는 일.[주-D056] 안석(安石)ㆍ동산(東山) : 안석(安石)은 진(晉) 나라의 사안(謝安)이고 동산(東山)은 명 나라의 곽문주(郭文周)를 가리키는데, 모두 명망이 높았다.[주-D057] 방납(防納) : 공세(貢稅)의 대납(代納). 처음에는 백성에게 부과된 공물(貢物)이 납입 의무자에게 현품이 없는 경우에 상인(商人)이 대신 사서 바치고 납입 의무자에게서 돈을 받았는데, 뒤에는 상인이 공물을 대납함으로써 막대한 이익을 얻게 되므로, 관(官)과 결탁하여 백성이 바칠 수 있는 공물도 바치지 못하게 막고 대납하였으며, 심지어 세곡까지도 대납하여 백성에게 폐해를 끼치게 되었다. 이미 그것은 대납이 아니고 백성의 직접 납입을 방지하는 방납인 것이다. 드디어 대납은 방납이란 용어로 통용하게 되었다.[주-D058] 풍간(諷諫)도 있고 …… 있습니다 : 풍간은 나무라는 뜻을 붙여 비유로 깨우치는 것이고, 휼간은 직언(直言)하지 않고 멀리 말을 돌려서 간하는 것.[주-D059] 순씨팔룡(荀氏八龍) : 후한(後漢) 순숙(荀淑)의 여덟 아들인 순검(荀儉)ㆍ순곤(荀鯤)ㆍ순정(荀靖)ㆍ순도(荀燾)ㆍ순왕(荀汪)ㆍ순상(荀爽)ㆍ순숙(荀肅)ㆍ순전(荀專)이니, 순전은 순부(荀敷)라고도 한다. 당시 사람들이 팔룡(八龍)이라고 일컬었다.[주-D060] 기묘년의 옥사 : 중종 14년(1519)에 남곤ㆍ심정 등이 조광조 등 많은 명사들을 죽이거나 쫓아낸 사건으로 즉 기묘사화(己卯士禍)를 말한다. 중종이 즉위하면서 선비들을 등용하니 연산군 때에 무오ㆍ갑자사화로 몰락되었던 사람들이 다시 등용되었다. 그 중 가장 뛰어난 사람이 조광조였다. 그리고 현량과(賢良科)를 통하여 많은 젊은 유학자들이 요직에 등용되었다.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그들은 옛날 삼대(三代) 때의 도덕 정치의 구현을 목표로 하고 성리학(性理學)을 크게 숭상하며, 사장(詞章)을 경시하였다. 임금의 신임을 얻어 과감하게 정치 개혁을 시도하는 한편 훈구파(勳舊派)들의 비행을 탄핵하고, 중종의 반정 공신인 정국공신(靖國功臣)중 4분의 3에 해당하는 자를 공신의 자격이 없다고 하여 훈호(勳號)를 삭탈하게 하니, 훈구파의 심정ㆍ남곤 등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들의 제거를 음모하였다. 드디어 홍경주(洪景舟)의 딸인 희빈(熙嬪)을 시켜서 중종에게 조광조 등이 장차 임금이 되려고 한다고 말하게 하고, 대궐 안의 나뭇잎에 꿀물을 발라 ‘주초위왕(走肖爲王)’이란 글자를 써서 벌레가 갉아먹게 한 뒤에 그것을 왕에게 보이는 등, 온갖 악랄한 방법으로 무함하여 드디어 조광조 이하 많은 현신(賢臣)과 명사들을 죽이고 귀양보내고, 파면시켜 내쫓곤 하였다.[주-D061] 탁발(擢髮) : 머리털을 뽑아서 세어도 부족할 만큼 많은 죄책(罪責).[주-D062] 단련(鍛鍊) : 혹독한 관리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죄안을 구성하여 사람을 죄에 빠뜨리는 것을 말함.[주-D063] 골경(骨鯁) : 골경지신(骨鯁之臣)의 준말로, 강직하여 임금의 과실을 힘껏 간하는 충신.[주-D064] 탁려풍발(踔厲風發) : 기세(氣勢)가 강성하여 당해낼 수 없는 것의 형용.[주-D065] 형서(邢恕) : 송(宋) 나라 사람으로 정호(程顥)를 스승으로 섬기더니 배반하고, 사마광(司馬光)의 문객(門客)이 되더니 사마광을 무함하고, 장돈(章惇)에게 붙더니 곧 장돈을 배신하였다.[주-D066] 무단(武斷) : 시골에서 지위와 세력 있는 사람이 남을 억지로 내리 누르는 짓을 하는 것.[주-D067] 총마어사(驄馬御史) : 후한(後漢) 때 환전(桓典)이 시어사(侍御使)가 되어서 항상 총마(驄馬)를 타고 다녔으므로 그렇게 불렀다. 환전은 엄정(嚴正)하였기 때문에 간인(奸人)은 항상 총마어사를 피하라고 하면서 두려워하였다고 한다.[주-D068] 징사(徵士) : 학문과 덕행이 있어서 조정의 초빙을 받은 선비.[주-D069] 상명(喪明) : 아들 상(喪)을 당함. 공자의 문인 자하(子夏)가 아들의 상을 당하여 너무 슬피 울어서 소경이 되었다는 고사에서 연유함.[주-D070] 존호(尊號) : 왕과 왕후의 덕을 칭송(稱頌)하는 칭호.[주-D071] 양암(諒闇) : 임금이 상중(喪中)에 있음.[주-D072] 의려(倚廬) : 부모의 상중에 거처하는 여막(盧幕).[주-D073] 목요(木妖) : 당(唐) 나라 내신(內臣) 융수(戎帥)의 별명. 정자나 집을 세우는 것이 너무나 심하였기 때문에 나무의 요정(妖精)이라고 불리웠다.[주-D074] 회해(詼諧) : 익살스럽고 재미있는 농담, 즉 해학(諧謔).[주-D075] 안시성주(安市城主) : 고구려의 강성을 미워하고, 또 수 양제(隋煬帝)의 큰 원정(遠征)이 있은 이래 번번이 패전하고 돌아간 숙원(宿怨)을 씻고자 하여, 고구려 보장왕 4년(645)에 당 태종(唐太宗)은 10만 4천여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쳐 개모성(盖牟城)과 비사성(卑沙城)을 점령하고, 요동성(遼東城)ㆍ백암성(白巖城)을 차례로 빼앗은 다음 승세를 몰아 안시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안시성의 방비는 견고하여 함락시킬 수 없었다. 그들은 갖가지 방법으로 몇 달 동안 성을 공격하다가, 결국 안시성의 수비는 더욱 견고하고 고구려의 사기는 더욱 높았다. 드디어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와서 날씨는 춥고 식량은 떨어진 당군(唐軍)은 물러가게 되었다. 당군이 물러가던 날, 안시성주는 성 위에 나서서 당군에게 미안하다는 인사를 하였다. 당 태종은 적이기는 하나 훌륭하다고 하여 비단 1백 필을 선물로 주고 자기의 경솔한 원정을 후회하였다고 한다. 안시성주의 이름을 양만춘(梁萬春) 또는 양만춘(楊萬春)이라고 하나 야사에만 있을 뿐 정사에는 그의 기록이 없음.

ⓒ 한국고전번역원 | 남만성 (역) | 19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