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길주(吉州)로 유배되어 고개를 넘어가던 때의 일인 듯합니다. 옥천(沃川)에서 도보로 2000여 리인데

믿음을갖자 2023. 11. 8. 0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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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15년 기미(1739) 6월 3일(무인) 아침에는 비가 오고 저녁에는 흐림

15-06-03[25] 주강을 행하여 《춘추》를 진강하고, 제언을 밭으로 만드는 폐단에 대해 논의하고, 호조 판서 유척기 등을 패초하도록 전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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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辰時)에 상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갔다. 주강을 행하러 신하들이 입시한 자리이다. 지경연사 조현명(趙顯命), 특진관 윤용(尹容), 참찬관 조윤성(曺允成), 시독관 조명리(趙明履), 검토관 정이검(鄭履儉), 가주서 심각(沈瑴), 기사관 강간(康侃), 편수관 이한상(李漢相), 종신 해계군(海溪君) 이집(李

), 무신 부호군 구칙(具侙)이 함께 입시하였다.

조윤성이 아뢰기를,

“오늘 주강에 종신이 제때 입시하지 않아 입시할 때 순서가 잘못되고 말았습니다. 추고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리하라.”

하였다. - 거조를 내었다. - 상이 전에 배운 대목을 다 읽었다. 조명리가 ‘하고자내조(夏郜子來朝)’에서 ‘구환오의(救患誤矣)’까지 읽었다. 상이 새로 배울 대목을 다 읽자 조명리가 아뢰기를,

“《공양전(公羊傳)》에는 고(郜)나라 군주를 영토를 잃은 군주라고 하였습니다. ‘찾아왔다[來朝]’라고 한 이상 군주도 있고 영토도 있는 나라인데 《공양전》에서 영토가 없다고 하였으므로 선유는 《공양전》의 말을 옳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그 말이 옳습니다.”

하니, 정이검이 아뢰기를,

“남쪽과 북쪽에 두 군데 고나라가 있습니다. 이것이 어느 고나라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남쪽의 고나라일 것입니다.”

하였다. 조명리가 아뢰기를,

“5월에 서궁(西宮)에서 재앙이 일어났는데, 《공양전》에서는 서궁을 ‘소침(小寢)’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대목 아래에 선유가 ‘임금이 편히 쉬는 곳’이라고 하여 그 경계한 바가 깊다고 논한 것은 뜻한 바가 있습니다.”

하니, 조현명이 아뢰기를,

“이는 천착(穿鑿)한 말인 듯합니다.”

하였다. 조명리가 아뢰기를,

“‘가을에 제나라 사람과 적나라 사람이 형나라에서 맹세하였다.[秋齊人狄人盟於邢.]’의 대문(大文)에서 ‘적(狄)’ 아래에 ‘인(人)’ 자를 더한 데서 적나라가 중원의 재앙을 구하고 환난을 돌보아 주어 ‘사람’으로 올린 뜻을 볼 수 있고, 또한 중원의 나라가 적나라를 위하는 뜻도 들어 있으니, 두 가지 뜻이 서로 보입니다. ‘겨울에 초나라 사람이 수나라를 공격하였다.[冬楚人伐隨.]’의 대문에서 ‘벌(伐)’ 자를 쓴 것은 마땅히 공격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좌전》에서 스스로 역량을 헤아리지 않은 것을 수(隨)나라의 죄라고 하였으니, 군병을 불러들여 스스로를 공격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하였다. 조명리가 아뢰기를,

“21년 조(條)의 대문에서 적나라에 대해 ‘사람’이라 칭하지 않고 위(衛)나라를 공격한 일에 대해 아래에 ‘침(侵)’ 자를 쓴 이유는, 상대가 위나라인 것은 똑같지만 위나라가 제나라의 상중(喪中)을 틈타 공격한 것을 성토할 때는 환난을 구한 의리가 있었으므로 ‘사람’이라 칭하고 아래에 ‘벌’ 자가 있었지만, 이번에는 위나라가 형나라를 멸하려는 마음만 있었고 달리 가리킬 만한 일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이라 칭하지 않고 아래에 ‘침’ 자를 쓴 것입니다. 선유의 주석에서 이와 같이 말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하였다. 조명리가 아뢰기를,

“녹상(鹿上)에서 맹세한 일은 의심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초나라가 한창 강성하여 제후들이 모두 두려워하였으므로 송나라가 초나라와 강화(講和)를 맺어 제후들을 구하고자 하였다고 선유가 말하였습니다만, 인정으로 헤아려 보자면 송 양공(宋襄公)의 뜻이 꼭 그러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고, 조현명이 아뢰기를,

“제 환공(齊桓公)이 죽은 뒤 초나라가 한창 강성하였기 때문에 송나라는 초나라의 힘에 의지하고자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송 양공의 어리석은 생각에 초나라와 강화를 맺으면 국세가 반드시 강성해질 것이라 여겼으므로 기어이 그와 맹세한 것이다.”

하자, 조명리가 아뢰기를,

“장차 초나라를 몰아내려는 의도를 가지고 잠시 초나라와 강화를 맺은 것이니 이는 패도(霸道)에 치우친 뜻입니다. 이 일에서 송 양공의 잘못을 볼 수 있습니다.”

하고, 조현명이 아뢰기를,

“제 환공과 같은 패권을 행하고자 하면서 도리어 제 환공이 공격했던 초나라와 강화를 맺은 것은 잘못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초나라뿐만 아니라 적나라와도 강화하였으니 이 역시 잘못이다.”

하였다. 조명리가 아뢰기를,

“송(宋), 초(楚), 진(陳), 채(蔡)를 나란히 열거하면서 초나라에 대해 ‘자(子)’라고 칭한 것은 중원의 쇠약함을 드러내려는 뜻입니다. 전리품을 바친 일 역시 《호씨전(胡氏傳)》에서는 노(魯)나라를 위하여 숨겨 준 의리라고 하였습니다.”

하고, 조현명이 아뢰기를,

“노나라를 위하여 숨겨 준 의리 또한 당연합니다.”

하였다. 조명리가 아뢰기를,

“박(薄)에서 맹세한 것은 초나라에 청하여 송나라 군주를 풀어 주려는 계획이었습니다. 노나라가 대의(大義)를 펼쳐 천하를 조종할 권한을 천자로부터 나오게 하지 못하고 도리어 중원의 존엄함으로 만이(蠻夷)의 나라와 피를 나누어 마시며 화친을 구하였으니, 심히 개탄스럽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박에서 맹세한 것은 송 양공을 풀어 줄 것을 청하기 위한 의도였는가?”

하자, 조현명이 아뢰기를,

“초나라가 도적과 같은 계략을 행하였는데도 노나라는 위로 천자에게 고하여 그 죄를 성토하지 못하고 도리어 이웃 나라에 애걸하여 송나라 군주를 석방하였습니다. 이는 권한이 만이에게로 돌아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성인은 《춘추》에서 반드시 노나라를 위하여 숨겨 주었는데, 여기서 ‘박에서 맹세하였다.’라고 썼으니 자연히 그 뜻을 볼 수 있다.”

하였다. 조현명이 아뢰기를,

“송나라에서 5년 전에 익조(鷁鳥)가 지나가는 재이(災異)가 있었지만 양공은 두려워하며 반성하지 않고 도리어 외롭고 유약한 병력으로 제후의 패자가 되고자 하여 오랑캐와 함께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니 어찌 일을 그르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뿐만이 아니다. 신하가 있는데도 그 말을 채용하지 않았으니 어찌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하자, 조현명이 아뢰기를,

“천재(天災)가 이처럼 두려운데도 재이의 두려움을 몰랐기 때문에 이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때 비록 상서로운 구름과 해가 나타나기는 했지만 덕을 닦지 못하였으니 어찌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가 풀려난 것도 요행이라고 하겠다.”

하였다. 조현명이 아뢰기를,

“만약 목이(目夷)로 하여금 초나라에 청하게 했다면 송 양공은 분명 풀려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양공이 ‘사직(社稷) 영령의 도움으로 우리나라에는 임금이 있다.’라고 하자 초나라 사람은 송나라를 차지할 수 없음을 알고 이에 양공을 풀어 주었습니다. 그 뒤 휘종(徽宗)과 흠종(欽宗)이 금(金)나라에 붙잡혔을 때 송나라는 구차하게 금나라에 화의를 청함으로써 천하를 조종할 권한이 저쪽에 있게 되었고 이 때문에 휘종과 흠종은 끝내 돌아오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명(明)나라 황제 영종(英宗)이 붙잡혔을 때는 우겸(于謙)이 ‘사직 영령의 도움으로 우리나라에 임금이 있다.’라고 하였고 그러자 오랑캐가 끝내 감히 해치지 못하여 영종은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목이의 계책을 송나라는 쓰지 않았고 명나라는 썼던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신하 된 도리로 보아 위난의 때를 당하여 그저 ‘우리나라에 임금이 있다.’라고만 한다면 한 고조(漢高祖)가 국을 나누어 달라고 대답한 일이나 같다. 한 고조의 이 말은 끝내 잘못되었다.”

하였다. 조현명이 아뢰기를,

“《소학(小學)》을 추리는 작업을 이제야 시작하였는데, 얼마 전 하교에서 2권으로 나누어 만들라고 하신 일이 있습니다. 성상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기에 감히 이렇게 아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린아이는 책을 읽을 때 진도가 더디면 싫증을 내고 빠르면 기뻐한다. 《소학》을 추려서 2권으로 만들라고 한 것은 지루하게 여겨 싫증 내고 힘들어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가언(嘉言)〉과 〈선행(善行)〉을 1권으로, 〈경신(敬身)〉과 〈계고(稽古)〉를 1권으로 해서 내편(內篇)과 외편(外篇) 2권으로 나누어 만들라.”

하였다. 조현명이 아뢰기를,

“신은 경연을 맡고 있는데, 다른 경연관들에게 사정이 생겨 신이 혼자 시강(侍講)하고 있으니 어찌 감히 힘들다는 말을 하겠습니까. 하지만 매번 번거롭게 패초하기를 청하는 것 또한 황공한 일입니다. 지금 경연관 이덕수(李德壽)는 지방에 있고, 유척기(兪拓基)는 인혐하고 들어갔으며, 박사수(朴師洙)는 병이 있고, 박사정(朴師正)은 출사하지 않았는데, 설사 궐 안에 들어오더라도 경연에는 들어오지 않으니 매우 잘못되었습니다. 상께서 꾸짖고 타일러 공무를 행하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유척기가 경연관으로서 숙배하였는가?”

하자, 조현명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유척기는 매양 고집을 부리는가? 호조 판서의 자리에 대해 고집을 부린다는 이유로 경연관에 대해서도 그대로 고집을 부리는 것은 지나치다. 일전에 비국 당상 중에 대신(大臣)이 아뢰어 체차된 자가 있었다. 그가 홍현보(洪鉉輔)인가? 특별히 추고하였는데도 고집이 너무 지나치다. 유척기에 대해서는 장차 하교하려고 하였다. 만약 본직의 공무를 행한다면 경연관으로 출사할 수 있다. 박사정은 공무를 행하지 않고 연일 패초를 어기고 있으니 나라의 체모에 손상이 된다. 이덕수는 경학(經學)에 원래 익숙한데도 고집이 너무 지나치다. 일전에 연석에서 하교한 뒤에도 공무를 행하지 않았고 지금 제술(製述)하는 일로 서울로 올라와야 하는데도 올라오지 않았으니 거취가 지나치다고 할 수 있다. 이덕수와 박사정을 모두 체차하고, 그 후임을 오늘 정사에서 서울에 있는 별 탈이 없는 자로 갖추어 의망해 들이라.”

하였다. - 탑교를 내었다. - 윤용이 아뢰기를,

“어제 삼가 제언(堤堰)의 일로 신칙하신 비망기를 보니, 백성의 일을 간절히 염려하시고 근본을 중시하여 농사를 권면하신 성상의 뜻이 행간에 넘쳐흘렀습니다. 신은 지금 제언사 당상(堤堰司堂上)을 맡고 있으니 삼가 비망기에서 말씀하신 내용을 별도로 관문을 보내어 통지해야겠습니다만, 전에 이미 각 도에 엄히 신칙하였고 또 도사(都事)를 별도로 제언 낭청에 차임하여 제언을 일일이 적간한 뒤 성책(成冊)을 작성하여 보고하게 하였습니다. 함경, 강원, 공홍 세 도는 비록 거행 상황은 보고하였지만 성책은 아직 올라오지 않았는데, 함경, 강원 두 도는 제언이 많지 않은 듯하고, 공홍도는 지금 막 성책을 작성해 보고하도록 재촉하였습니다. 그 나머지 여러 도에서는 이미 모두 성책을 작성하여 보고해 왔습니다. 각기 ‘제언의 길이와 너비’, ‘수축(修築)함’, ‘소통시킴’, ‘오래되어 버려짐’이라고 주(註)를 달았는데, 경기는 오래되어 버려진 곳이 가장 많았습니다. 그 가운데 경상 도사의 보고가 자못 상세한데, 수축하거나 소통시켜 저수(貯水)의 혜택을 본 효과에 대해 극력 설명하였고 새로 쌓은 곳도 더러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실제 효과가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양서(兩西)의 경우는 제언을 절수(折受)받아 밭으로 개간한 곳이 간간이 꽤 있고 더러는 전매(轉賣)하여 민전(民田)이 되기도 하였으니, 이와 같은 곳은 제언 안과 제언 아래에 있는 전답의 다소와 이해관계의 경중을 따져 변통해야 할 듯합니다. 하지만 이 역시 제언사 당상이 감히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하고, 조현명이 아뢰기를,

“제언에 관한 정사는 실로 농사를 권면하는 가장 큰 일로서 능히 천지조화의 공을 차지할 수 있는 일입니다. 신이 경술년(1730, 영조6)에 영남 감사였을 때 제언을 수리한 일이 많았습니다. 신해년(1731)의 큰 가뭄을 만나 미처 효과를 보지 못하였지만 지금 들으니 입은 혜택이 매우 크다고 합니다. 대개 어리석은 백성은 먼 계책을 생각하지 않고 수령 역시 일하기를 꺼려서 대부분 착실히 거행하지 않습니다. 지금 대신이 아뢴 말로 도사를 차임하여 보내어 신칙하였기 때문에 제법 실제적인 효과가 있습니다. 제언을 파하여 밭으로 만드는 일의 경우는 대부분 간사한 백성과 호족(豪族) 및 궁가(宮家)의 소행에서 비롯됩니다. 신이 직접 보고 성상께서 기억하시는 일로 말씀드리더라도, 증산(甑山)의 두 군데 제언은 한 고을이 혜택을 입는 곳으로 이는 바로 태조대왕(太祖大王) 2년에 수축한 곳인데 우마(牛馬)의 목장을 만든다는 핑계로 개간하려고 하였으니, 그 나머지는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훗날 대신에게 문의한 뒤 상의해서 처리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각 도의 도사를 제언 낭청으로 차임하는 일은 나도 생각해 보았는데 참으로 좋은 대책이다. 이후 제언을 밭으로 만드는 것은 일절 허락하지 말라.”

하였다. 윤용이 아뢰기를,

“이미 개간한 밭을 도로 묵혀 물을 가두는 일이 매우 어려운 듯해도 지금 제언을 별도로 수축하는 때를 맞아 반드시 크게 경동(警動)한 뒤에야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평안 도사(平安都事)의 보고에, 정주(定州)의 제언 한 곳을 효장묘(孝章墓)에 절수하였는데 제언 아래의 농부들이 모두 절수한 곳의 예전 세액을 대신 바치고 이를 도로 묵혀 물을 가두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원침(園寢)은 일의 체모가 중대하여 실로 감히 경솔히 논의할 수 없습니다만, 보고한 내용으로 보자면 백성이 입는 혜택의 긴요함과 민정(民情)의 간절함을 대략 알 수 있습니다. 양서의 제언을 밭으로 개간한 곳은, 어디서 절수받았는지, 누가 개간했는지를 막론하고 도로 묵혀 물을 가두었을 때의 이해관계와 편리 여부에 대해 대신과 제언사 당상이 자세히 상의하여 훗날 어전에 나아와 상께 여쭈어 처리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리하라.”

하였다. - 거조를 내었다. - 경연관들이 물러 나갔다. 상이 이르기를,

“승지는 쓰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국가에서 긴요한 자는 곧 육조의 장관으로 육조 중에서도 호조가 가장 긴요하다. 애초 사람을 택하지 않았다면 모르겠지만 이미 택한 뒤에 어찌 가벼이 체차할 수 있겠는가. 호조 판서 유척기는 고집을 부릴 이유가 없는데도 패초를 어기기를 일삼고 조금도 마음을 움직일 뜻이 없으니 이것이 무슨 분의(分義)란 말인가. 더구나 세 조정에서 대대로 녹봉을 받은 신하가 국사가 이와 같고 도민(都民)이 이와 같고 나라 경비가 이와 같은 때 숭품(崇品)의 중신이 된 몸으로 은혜에 보답할 도리는 생각하지 않고 면직되기만을 기약하고 있다. 평소 호조 판서가 이와 같지 않은 줄 알았는데, 중신이 이러하다면 다른 신하는 오히려 무슨 말을 하겠는가. 해가 넘도록 고집을 부려도 결코 체차해 줄 수 없다. 엄히 추고한 뒤 다시 즉시 패초하여 직임을 살피게 하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행 부호군 이덕수가 지난번 연석에서 특교를 내렸는데도 이처럼 지방에 있으며 올라올 뜻이 없으니, 날마다 강연을 여는 때 어찌 줄곧 지방에 있도록 놔둘 수 있겠는가. 비록 경연관의 직임은 체차하더라도 자문(咨文)을 짓는 막중한 일은 지체할 수 없다. 별도로 신칙하여 즉시 올라와 지어 올리게 하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이조 판서와 병조 판서가 별 탈이 없으니 도정(都政)을 반드시 이달 안에 하도록 분부하라.”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석강을 하겠다.”

하였다. 신하들이 마침내 물러 나갔다.

[주-D001] 21년 …… 이유 : 《춘추좌씨전》 희공(僖公) 21년 조에 “봄에 적나라가 위나라를 침범하였다.[春狄侵衛.]”라고 하였고, 희공 18년 조에 “겨울에 형나라 사람과 적나라 사람이 위나라를 정벌하였다.[冬邢人狄人伐衛.]”라고 하였다. 이 두 대문을 비교하여 말한 것이다.[주-D002] 전리품을 …… 하였습니다 : 《춘추집전대전(春秋集傳大全)》 희공(僖公) 21년의 “초나라 사람이 의신(宜申)을 시켜 노나라에 와서 전리품을 바치게 하였다.[楚人使宜申來獻捷.]”에 대한 호안국(胡安國)의 주에 의하면, 여기서 ‘송나라의 전리품[宋捷]’이라 하지 않은 것은 노나라를 위하여 ‘송(宋)’ 자를 쓰지 않은 것이라 하였다. 즉 오랑캐인 초나라가 중원의 나라인 송나라를 공격하여 빼앗은 전리품을 노나라에 바쳤다면 노나라는 마땅히 받기를 거절하고 천자에게 청하여 초나라를 토벌해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노나라의 혐의를 덜어 주기 위해 ‘송’ 자를 숨겼다는 것이다.[주-D003] 송나라에서 …… 있었지만 : 《춘추좌씨전》 희공 16년 조에 “6마리의 익조(鷁鳥)가 뒤로 날아서 송나라 도읍을 지나간 것은 거센 바람이 불어서였다.”라고 하였다.[주-D004] 만약 …… 주었습니다 : 《춘추공양전》 희공 21년 조에 의하면, 송나라 양공이 목이(目夷)의 간언을 거부하고 무방비 상태로 회합에 나가 초나라에 붙잡히자 양공은 후회하며 목이에게 “그대는 돌아가서 나라를 지키라. 송나라는 그대의 나라이다.”라고 하였다. 이때 목이는 “송나라는 실로 신의 나라입니다.”라고 하고는 돌아갔다. 그 뒤 초나라 임금이 양공을 죽이겠다고 겁박하자 양공은 “사직 영령의 도움으로 우리나라에는 임금이 있다.”라고 하였고, 이에 초나라 임금은 양공을 죽이더라도 송나라를 빼앗기 어렵겠다고 여겨 풀어 주었다. 결국 목이가 양공에게 그렇게 말한 이유는 양공의 심지를 굳건히 하여 그렇게 대답하게 함으로써 초나라의 의도를 좌절시키려는 뜻이었다.[주-D005] 명(明)나라 …… 있었습니다 : 명나라 영종이 몽고에 포로로 잡혔을 때 우겸은 영종의 동생인 성왕(郕王)을 대종(代宗)으로 옹립한 뒤 성곽에 올라 “사직 영령의 도움으로 우리나라에는 임금이 있다.”라고 외쳤다. 그러자 몽고는 인질을 잘못 잡았다고 여겨 이듬해 영종을 돌려보냈다고 한다. 《靑城雜記 醒言》[주-D006] 한 …… 일 : 초(楚)나라와 한(漢)나라가 광무(廣武)에서 대치할 때 항우(項羽)가 인질로 잡고 있던 한 고조 유방(劉邦)의 아버지 태공(太公)을 큰 도마 위에 올려놓고 “항복하지 않으면 삶아 죽이겠다.”라고 위협하였으나 유방은 “국을 끓이면 나에게도 한 그릇 나누어 주라.”라고 하며 거절하였다. 《史記 項羽本紀》[주-D007] 비망기에서 말씀하신 내용 : 전날 연석에서 영조는, 물이 풍부할 때 가뭄에 대비해 제방에 개수해 놓으라고 하교하였다. 《承政院日記 英祖 15年 6月 2日》

 

 

 > 승정원일기 > 영조 > 영조 14년 무오 > 10월 20일 > 최종정보

영조 14년 무오(1738) 10월 20일(기해) 맑음

14-10-20[26] 차대를 행하여 호남 어사의 장계와 함경남도 병사의 장계에서 요청한 일, 동지 정사 박문수를 올라오게 하는 문제, 이덕수를 서울에 머물게 하는 문제, 형장을 남용하는 폐단, 군기를 정비하는 문제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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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시(巳時)에 상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갔다. 대신과 비국 당상이 인견을 위해 입시한 자리이다. 우의정 송인명(宋寅明), 형조 판서 김시형(金始炯), 행 부사직 김성응(金聖應), 행 부호군 구성임(具聖任), 좌부승지 윤휘정(尹彙貞), 교리 김광세(金光世), 가주서 이성운(李聖運), 사변가주서 민진룡(閔鎭龍), 편수관 우세준(禹世準), 기사관 이수덕(李壽德)이 입시하였다.

신하들이 나아와 엎드렸다. 송인명이 아뢰기를,

“근래에 날씨가 추운데 성상의 체후는 어떠하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별 탈이 없다.”

하였다. 송인명이 아뢰기를,

“대왕대비전의 기후는 어떠하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안녕하시다.”

하였다. 송인명이 아뢰기를,

“중궁전의 기후는 어떠하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별 탈이 없다.”

하였다. 송인명이 아뢰기를,

“왕세자의 기후는 줄곧 평안하고 순조롭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잘 지내고 있다.”

하였다. 송인명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원보(元輔)에게 내리신 수서(手書)를 삼가 보니, 말씀하신 뜻이 다른 때보다 더욱 간절하셨습니다. 원보가 비록 마음이 멀리 떠났더라도 감격하여 마음을 돌려 선뜻 조정에 나오기를 바랐는데, 그 뒤에 또다시 상소를 올렸으니 명에 응할 뜻이 없습니다. 나랏일을 생각하면 참으로 매우 민망하고 답답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계속해서 정중히 권면하는 글을 내려 기필코 나오도록 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나의 성의가 미덥지 못하여 그런 것이니 스스로 부끄러울 뿐이다. 경의 말이 옳으니 더욱 유념하겠다.”

하였다. 송인명이 아뢰기를,

“호남 어사(湖南御史)의 장계에 대한 회계(回啓)를 들였는데 아직 도로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곳에 두었다. 지금 도로 내리려고 한다.”

하였다. 송인명이 아뢰기를,

“만약 하문하실 일이 있으시면 신이 먼저 말씀을 듣겠습니다. 그런 뒤에 또한 아뢸 것이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먼저 아뢰라.”

하자, 송인명이 장계를 펼치고 아뢰기를,

“이는 함경남도 병사(咸鏡南道兵使) 이언상(李彦祥)의 장계입니다. 그가 말하기를, 함경남도의 금년 농사가 대단한 흉작에는 이르지 않았으니, 이번 가을의 습조(習操) 및 삼수(三水)와 갑산(甲山) 좌우영(左右營)의 습조는 규례대로 거행하되, 영장(營將)이 순점(巡點)하는 한 가지 일에 대해서는 정지할지 여부를 묘당에서 상께 여쭈어 처리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예전부터 병사가 순행(巡行)하며 습조할 때는 으레 영장의 순점을 정지하였으니 이번에도 규례대로 정지하도록 하되, 삼수와 갑산 두 고을은 도신(道臣)이 장계로 청한 것으로 인하여 이미 습조를 정지하도록 하였으니, 이제 이 두 고을은 여러 도의 규례대로 영장이 순점하는 일을 거행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렇게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게 하라.”

하였다. - 거조를 내었다. - 상이 이르기를,

“어사의 장계에 등급을 나누어 탕감해 달라는 청이 있었는데, 환자(還上)를 정봉(停捧)한 전례가 있는가 없는가?”

하자, 송인명이 아뢰기를,

“신해년(1731, 영조7)과 임자년(1732) 연간에 영남(嶺南)에서 정봉한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신이 일찍이 수령을 지냈기 때문에 정봉의 폐단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세전(歲前)을 기한으로 해서 독촉하여 받아 내고 형세가 부득이할 경우 그대로 놔두는 것은 혹 괜찮겠지만, 지금 미리 정봉한다는 뜻을 보이면 비록 납부할 수 있는 백성이라도 필시 관망하면서 납부하지 않을 테니 결단코 받아 내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 지역 중에 부안(扶安)은 가을이 되면서 유랑하여 흩어진 집이 이미 8, 9백 호나 되니, 남아 있는 자에게는 혹 받아 낼 수 있겠지만 도망한 자에게야 어떻게 받아 낼 수 있겠습니까. 도백(道伯)과 수령에게는 본래부터 상황에 따라 늦추거나 조이는 방도가 있으니, 정봉하라는 명령은 우선 중지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김시형이 아뢰기를,

“환곡(還穀)을 거둬들이는 일이 한창 진행되고 있는 시기에 만약 정감(停減)하라는 명이 내린다면 올해 이미 납부한 백성들이 내년에 다시 납부를 독촉받게 되는 폐단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중신(重臣)의 말이 좋다. 세말(歲末)을 기한으로 거두어들이는 일을 다 끝낸 뒤에, 일이 마무리되는 상황을 살펴서 결단코 받아 내기 어려운 자에 대해서는 정지하라.”

하였다. 송인명이 아뢰기를,

“독촉을 늦추는 것과 납부를 독촉하는 것은 오직 수령이 형세를 살펴 잘 처리하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의지할 곳 없이 구걸하는 백성의 경우 비록 그의 이웃이나 친족에게 물리더라도 받아 낼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회계(回啓)에도 은미한 뜻이 들어 있으니, 이는 각별히 효유하실 말씀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승지는 ‘윤(允)’ 자를 쓰라.”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신명좌(申命佐)는 문신이다. 그런데 백성을 기르는 수령의 직임을 이와 같은 사람이 오히려 맡을 수 있겠는가?”

하자, 송인명이 아뢰기를,

“지금처럼 백성들이 뿔뿔이 흩어지려는 때에는 비록 지극정성으로 백성들을 안집(安集)하고자 하여도 오히려 보존하기 어려운데, 더구나 수령이 이처럼 엉성하다면 백성들이 장차 누구를 의지하겠습니까. ‘겨울이 되어 걸식하는 자는 봄이 되면 돌아갈 것’이라는 말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하였다. 김시형이 아뢰기를,

“외방에서 장계로 보고한 내용을 보면, 내년에는 백성들의 시체가 장차 골짜기를 메울 것 같습니다. 콩과 팥은 온 나라가 적지(赤地)가 되었으며, 콩의 경우는 더욱 심하여 장차 종자마저 사라질 지경이니, 백성의 일이 참으로 걱정스럽습니다.”

하고, 송인명이 아뢰기를,

“등급을 나누어 보고하는 장계가 올라온 뒤에야 형편을 헤아려 감면해 줄 수 있으며, 헤아려 감면해 주라는 명령이 내린 뒤에야 백성들이 조정에서 진념(軫念)하는 뜻을 알고 편안히 거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호남은 도신이 내려간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미처 장계로 보고하지 못하였어도 본디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호서(湖西)의 도신은 부임한 지도 이미 오래되었고 좌도(左道)와 우도(右道)의 순행도 이미 마쳤다고 하는데 등급을 나누어 보고하는 장계가 아직도 올라오지 않았으니, 지체한 책임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도신을 추고하고, 속히 등급을 나누어 장계로 보고하도록 신칙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게 하라.”

하였다. - 거조를 내었다. - 송인명이 아뢰기를,

“기병과 보병을 위해 걷는 기보포(騎步布)는 3년에 두 차례 지는 가벼운 역(役)으로 예전부터 재감(災減)해 주는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신해년과 임자년의 흉년에 처음으로 우심재읍(尤甚災邑)에 대해 재해의 등급에 따라 감면해 주는 일이 있었지만, 비록 우우심재읍(尤尤甚災邑)으로 완전히 감면해 주는 곳이라도 기보포는 절반을 줄여 주는 데 불과했습니다. 작년에 양호(兩湖)에서 우우심재읍으로 완전히 감면해 준 고을도 기보포의 절반을 탕감해 주는 일은 별도로 상께 여쭈어 정하였습니다. 금년에 완전히 감면해 주는 고을도 작년의 예에 따라 기보포는 절반만 탕감해 주도록 분부하여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게 하라.”

하였다. - 거조를 내었다. - 송인명이 아뢰기를,

“동지사(冬至使)가 떠나야 할 기일이 촉박한데 정사(正使)가 새로 차임되었습니다. 이는 다른 사행과는 차이가 있으니, 만약 기일에 맞추어 들어가지 못한다면 필시 정삭(正朔)의 예법을 폐하였다는 책망의 말이 나올 것입니다. 신이 바깥의 의론을 들으니, 동짓달 5일 이전에는 출발해야 기한 안에 도착할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두 배의 속도로 가더라도 기한에 맞추기 어렵다고 합니다. 더구나 저 나라에 들어가서는 두 배의 속도를 내기도 어려운 데다 질병이나 사고 또한 예측할 수 없습니다. 지금은 우선 정사가 올라오기를 기다려야 하겠지만, 만약 24일 이전까지 오지 않는다면 매우 낭패스러울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공주(公州)는 며칠 거리인가?”

하자, 김시형이 아뢰기를,

300리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영성군(靈城君)에게도 생각한 바가 있을 테니 반드시 올라올 것이다.”

하자, 송인명이 아뢰기를,

“23일까지는 소식이 있을 것 같습니다만, 만약 이날이 지나고도 아무 소식이 없다면 장차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반드시 올 것이다. 만약 정말로 오지 않는다면 나는 박문수(朴文秀)를 아는 사람이 아니다.”

하였다. 김시형이 아뢰기를,

“듣자니 배표(拜表)하는 날짜가 이미 조금 미루어졌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다음 달 5일 안에 출발하더라도 며칠 동안은 자연 의주(義州)에 머무르게 됩니다. 26일 어름에 강을 건너더라도 오히려 며칠 동안은 역참을 건너뛰며 두 배의 속도로 달려가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은 그 노정(路程)을 알고 있는가?”

하자, 김시형이 아뢰기를,

“신은 작년에 국경을 나갔기 때문에 그 노정을 잘 알고 있습니다. 박문수가 어찌 부망(副望)으로 낙점을 받은 뜻을 모르겠습니까. 그렇지만 먼 외방에 통지하는 일인데 아직 연락을 주고받지 못하였으니, 오늘 승정원으로 하여금 신칙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신칙하도록 하였다. 승지는 알고 있는가?”

하자, 윤휘정이 아뢰기를,

“신은 조금 전에 막 승정원에 들어와서 미처 듣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송인명이 아뢰기를,

“이는 규례에 따라 사행을 가는 것과는 비할 바가 아니니, 바로 수레 한 대로 적진에 들어가는 상황입니다. 박문수가 어찌 이런 점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외방에 있는 신하를 차출하는 것은 여유가 있을 때에나 할 일입니다. 지금은 나라에 기강이 없으니, 만약 그가 가지 않는다면 죄를 준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는 그가 반드시 올 것을 알고 있다. 영성군에게 병통이 있음을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그러나 이 경우는 외직에 보임한다는 점에서는 같더라도 도백이나 수령을 외직에 보임하는 경우와는 다르다.”

하자, 송인명이 아뢰기를,

“그는 비록 외직에 보임된다 하더라도 나오지 않겠다고 결심하였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제부터라도 두 배의 속도로 가면 어떻겠는가?”

하자, 송인명이 아뢰기를,

“비록 두 배의 속도로 간다 할지라도 방물(方物)을 봉과(封裹)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하였다. 김시형이 아뢰기를,

“박문수가 도성을 떠날 때 신이 미처 만나 보지는 못했지만 나라를 위하는 그의 정성은 세상이 다 알고 있습니다. 비록 오늘이라도 성상을 뵙고자 하는 마음이 뭉게뭉게 일어난다면 그는 반드시 벌떡 일어나 올라올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몇 년 전에 진주사(陳奏使)를 보낼 때, 나는 체차해 주려고 하였으나 영성군이 자청하여 사신으로 갔다. 지금은 나랏일이 중대하므로 반드시 올라올 것이다.”

하였다. 송인명이 아뢰기를,

“우선 24일까지 기다려 보고, 그때까지 소식이 없으면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으니, 이런 점을 헤아려 진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게 하라.”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부제학이 앞서도 아뢰었지만, 대사헌의 계사가 조금 늦게 올라왔으면 좋았을 것이다. 이덕수(李德壽)가 이조 판서로 있을 때 뜻밖의 모욕을 당하여 낭패스럽게 물러났다가, 지금 정사에 차임되어 혐의를 풀어 주고 난 뒤에 비로소 올라왔는데 또다시 배척을 당하였으니, 나라의 체모로 말하자면 중신(重臣)을 대우하는 도리가 전혀 아니다.”

하자, 송인명이 아뢰기를,

“일 자체만 가지고 논해 본다면 이것이 그 사람에게 무슨 모욕이 되겠습니까만, 떠날 기일이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이런 계사를 올렸으니, 외부의 의론도 대간의 말이 잘못되었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록 귀가 멀지 않은 사람이라도 건륭제(乾隆帝)가 불러들여서 문답을 나눈다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대신(臺臣)이 논한 것이 대체는 옳지만, 날짜는 급박하고 당사자는 필시 고집을 부릴 것이기에 어쩔 수 없이 그 말대로 윤허하였다.”

하였다. 송인명이 아뢰기를,

“우선은 24일까지 기다렸다가 변통하는 도리가 있어야 하는데, 신하들 가운데 나이가 70세인 사람을 차출하여 보내기가 어렵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무신도 사명(使命)을 받든 사례가 있는가?”

하자, 김시형이 아뢰기를,

“정묘년(1687, 숙종13) 이후로 무신이 사명을 받든 일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송인명이 아뢰기를,

“이덕수는 문장이 매우 뛰어나 일찍이 문형(文衡)을 맡은 일이 있는데, 근래에는 문장을 주관할 사람이 없어서 과장(科場)의 상황 또한 매우 구차합니다. 지금 만약 그가 올라온 김에 계속 서울에 머물게 한다면 좋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도 그를 그대로 머물게 하려는 생각이 있다.”

하였다. 송인명이 아뢰기를,

“이렇게 몹시 추운 날씨에 얼어붙은 감옥에 미결로 오래 갇혀 있는 죄수들은 한시가 걱정인데, 의금부 당상이 모두 고집을 부리고 날마다 패초를 어기는 것을 일삼으니 변통하는 방도가 있어야 합니다. 판의금부사 유척기(兪拓基)와 동지의금부사 조석명(趙錫命)을 모두 체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반드시 체차할 필요는 없지만 대신이 이미 말을 꺼냈으니 그대로 둘 수는 없다. 모두 체차하라.”

하였다. - 탑전 하교를 내었다. - 송인명이 아뢰기를,

“논하는 자들은 비록 신이 계속해서 변통한다고 책망하겠지만, 이와 같은 때에 온갖 일이 해이해지는 것을 신은 실로 근심스럽게 여깁니다. 그러므로 차라리 경솔하다는 비난을 받을지언정 변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번에 의금부 당상을 체차하는 것도 그만둘 수 없는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하였다. 송인명이 아뢰기를,

“재해를 입은 고을의 수령을 교체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신이 여러 차례 우러러 아뢰었습니다. 황해 감사 이익정(李益炡)은 비록 이미 부임하였지만, 도내의 사정에 대해서는 필시 아직 생소할 것입니다. 해주 판관(海州判官) 신종하(申宗夏)는 재임한 지도 이미 오래되었고 또 잘 다스린다는 명성이 있는 데다, 하물며 이곳은 감영이 있는 고을이니 감영의 본관(本官)과 동시에 교체하는 것은 매우 곤란한 일입니다. 해주는 또한 현재 재해를 많이 입은 우심재읍인데, 전 감사 윤득화(尹得和)는 법을 왜곡하면서 그의 바람을 들어주어 신병을 이유로 장파(狀罷)하였으니 매우 온당치 못합니다. 윤득화를 엄하게 추고하고, 신종하를 잉임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게 하라.”

하였다. - 거조를 내었다. - 송인명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세태(稅太)를 감면해 줄 것을 청할 때 범범하게 ‘재해를 입은 고을’이라고 말씀드리고, 그 뒤 어전에 나아왔을 때 비록 우심재읍과 지차읍(之次邑) 등에 대해 모두 절반을 감면하자는 뜻으로 아뢴 적은 있으나, 아직 분명하게 통지하지 않은 것은 뜻한 바가 있어서이니, 등급을 나누어 보고하는 장계가 올라오기를 기다렸다가 일제히 분부하고자 해서였습니다. 지금 영남에서 등급을 나눈 장계를 보니 초실읍(稍實邑)의 숫자도 많으며, 호남 또한 필시 이보다 못하지는 않을 것이니, 특별히 장계를 기다릴 것 없이 세태의 절반을 감면해 주는 일을 삼남(三南)의 경우는 우심재읍과 지차읍 등에 대해 똑같이 시행하라는 뜻으로 분명하게 통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게 하라.”

하였다. - 거조를 내었다. - 송인명이 아뢰기를,

“사관의 천거가 아직 완료되지 않았으니 참으로 온당치 못한데, 정익하(鄭益河)는 인혐하는 것이 너무 지나칩니다. 지난번에 유신 송교명(宋敎明)이 한 말은 무심코 나온 것이며 또한 잘 알지 못하고 한 말입니다. 예전부터 별겸춘추가 갖추어지지 않아 상번이나 하번이 홀로 천거하는 일을 맡은 경우가 많이 있었으니, 김시찬(金時粲)이 삭직된 것이 정익하에게 어찌 편안하지 않아 일을 맡을 수 없는 이유가 되겠습니까. 이정보(李鼎輔)의 일은, 정익하의 상소를 가지고 본다면 그 상황이 같은 것 같지만 실제로는 같지 않습니다. 그러니 어찌 줄곧 억지로 끌어다 붙이면서 고집을 부릴 수 있겠습니까. 정익하가 이미 풀려났다고 하니 각별히 엄히 신칙하여 속히 천거를 완료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익하를 이미 풀어 주었으니, 패초하여 신칙하라.”

하였다. - 거조를 내었다. - 송인명이 아뢰기를,

“무릇 시급하게 거행할 일이 있을 때 대신(大臣)이 승정원에 말을 전하면 승정원은 대신의 말로 계품하는 것이 본래부터의 전례입니다. 고부(古阜)는 본래 피폐한 고을인 데다 금년에는 재해를 입은 것이 또 더욱 심합니다. 이러한 때에 수령 자리를 비워 두는 것은 하루라도 근심스러운 일이기에 새로 차임된 군수에게 역마를 내주어 출발시키라는 명을 이미 내렸습니다만, 아직 서경을 거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제 사은(謝恩)한 뒤에 신이 낭청을 시켜서, 서경을 면제하고 출발시키도록 계품하라는 뜻으로 승정원에 말을 전하였는데, 승정원이 미루고 있다가 낭청이 여러 차례 왕래한 뒤에야 억지로 허락하였다고 하니, 일의 체모가 몹시 온당치 못합니다. 해당 승지를 추고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게 하라.”

하였다. - 거조를 내었다. - 송인명이 아뢰기를,

“근래에 기강이 무너져 참람하고 사치스러운 것이 습속을 이루었습니다. 신이 들으니 일전에 의녀(醫女)를 형추(刑推)하라는 명이 내린 뒤에 그 집에서 의녀를 즉시 내주지 않았으니 이것도 진실로 잘못이지만, 옥에 갇힐 때에도 감히 초교(草轎)를 타고 들어왔다고 합니다. 이 일은 몹시 비루하고 자질구레하여 신이 번거롭게 아뢸 만한 것은 아니지만, 이는 나라의 기강에 관계되니 어찌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있겠습니까. 그를 첩으로 거느린 사람을 신이 굳이 지적하여 아뢸 필요는 없지만, 그를 가마에 태워서 보낸 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니, 승정원으로 하여금 현고(現告)를 받게 해서 파직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해당 조(曹)에서는 그가 태연히 가마를 탄 것을 내버려 두고는 제대로 살펴서 금하지 못하였으니 또한 일을 흐리멍덩하게 처리한 잘못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해당 당상을 엄하게 추고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게 하라.”

하였다. - 거조를 내었다. - 김시형이 아뢰기를,

“신이 이 의녀를 조사하여 다스렸습니다. 그가 어찌 감히 가마를 타고 아문에 들어올 수 있습니까. 그런데 들으니 그가 올 때 과연 초교를 탄 일이 있다고 하여, 신이 잡아들여 중형으로 다스렸습니다.”

하였다. 송인명이 아뢰기를,

“지난번 연석에서 곤장(棍杖)을 사용하는 일에 관하여 여쭈어 정해서 거조까지 내었습니다. 그런데 거조 안에 포도청이 누락되었습니다. 포도청도 군문(軍門)인데 더구나 이곳은 도적을 다스리는 아문이니 더욱 곤장을 사용해서는 안 될 이치가 없습니다.”

하고, 김시형이 아뢰기를,

“좌우변 포도청에서 야금(夜禁)을 범한 사람을 다스릴 때는 모두 곤장을 사용합니다.”

하고, 구성임이 아뢰기를,

“야금을 범한 사람 외에도 도둑질한 것이 미미하여 함부로 무거운 장형(杖刑)으로 다스릴 수 없는 사람 같은 경우에는 모두 곤장을 써서 다스립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주서로 하여금 그 거조를 다시 가지고 오게 하라.”

하였다. 이성운이 가지고 들어와 바치니, 상이 이르기를,

“승지가 읽으라.”

하자, 윤휘정이 읽었다. 상이 이르기를,

“‘순검난입여경외(巡檢闌入與京外)’ 아래 ‘감사병수사(監司兵水使)’ 위에 ‘각군문포청토포청군무외내이총부병조외이(各軍門捕廳討捕廳軍務外內而摠府兵曹外而)’라는 19자를 추가하여 써넣으라.”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훈국과 외방의 곤장 크기는 어떠한가? 훈국의 곤장은 매우 크니, 외방에 어찌 이보다 큰 것이 있겠는가.”

하자, 김성응이 아뢰기를,

“외방의 곤장은 서울의 군문보다 작으며, 서울의 군문 가운데서는 훈국의 곤장이 가장 큽니다.”

하니, 구성임이 아뢰기를,

“훈국의 곤장은 길이 6자, 너비 5치, 두께 7푼, 무게 4근이며, 금위영의 곤장은 길이 6자 5치, 너비 5치 2푼, 두께 8푼, 무게 5근으로, 삼군문 가운데 금위영이 가장 큽니다. 외방의 곤장은 애초부터 정해진 규격이 없는데, 신이 외임(外任)을 맡았을 때 보니 저 나라 사람들은 곤장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래서 칙사를 접대하는 일로 출참(出站)할 때에는 특별히 크게 만들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버드나무로 만드는가? 만약 참나무로 만든다면 곤란할 것이다.”

하자, 김성응이 아뢰기를,

“잡목(雜木)으로 만듭니다. 그런데 참나무로 만든 것은 도망친 군사를 다스리는 데 쓰는 물건으로, 처음 도망치면 참나무로 50대, 재차 도망치면 100대를 치고, 세 번 도망치면 효시(梟示)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수령도 곤장을 사용하는가?”

하자, 김시형이 아뢰기를,

“수령이 철릭(天翼)을 착용할 때는 곤장을 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는 곤장을 쓰는 것을 참으로 몹시 어렵게 여겼기 때문에 많아야 10대를 넘기지 않았다. 그런데 총관(摠管)들은 군무(軍務)가 아닌 것도 제 손에서 군무로 바꾸기 때문에, 적어도 10대 이하로는 내려가지 않거나 아니면 반드시 20대를 한도로 삼으니 어찌 지나치지 않은가. 이것이 내가 경외(京外)에 신칙하는 일이 있게 된 까닭이다.”

하였다. 송인명이 아뢰기를,

“근래에 도적을 다스리는 것이 엄하지 않아 참으로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포도청에서 죄를 자백한 자가 형조에 와서는 번번이 꼭 말을 바꾸니, 비록 살려 주기를 좋아하는 성상의 덕으로 인해 하교하신 바가 있을지라도 외방에서는 그렇게 시행하기가 어렵습니다. 영장이 샅샅이 조사하여 실정을 캐내었더라도, 감영에 올려보낸 뒤에는 혹시라도 살아날 수 있을까 하는 기대로 반드시 말을 바꾸는 폐단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경우 시일만 질질 끌며 끝날 기약이 없게 되니 이는 결코 시행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고, 김성응이 아뢰기를,

“신이 형조의 직임을 맡고 있을 때 토포사(討捕使)가 장계로 보고한 것에 대해 여러 차례 복계(覆啓)한 일이 있습니다. 토포 영장(討捕營將)이 된 사람이야 누군들 그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려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 사람이 어리석고 용렬하거나 혹 사람됨이 세밀하지 않을 경우 자연히 문서에 대하여 서툰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 도적을 잘 다스리는가의 여부는 전적으로 그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하고, 구성임이 아뢰기를,

“지난번 포도청에서 잡아들였던 어보(御寶)를 위조한 죄인으로 말씀드리면, 명백히 죄를 인정하고 난 다음인데도 형조로 이송되면 자신이 반드시 죽을 것을 알았기 때문에 갑자기 다시 말을 바꾸었던 것입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토포영(討捕營)에서 죄인을 감영으로 올려 보낼 때 반드시 이러한 폐단이 많이 생길 것이니, 그저 각별히 신칙하여 토포사에 적임자를 가려 뽑아 보내는 것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근래에 수령을 가려 뽑지 않는 것이 아닌데도 신명좌 같은 자가 있으니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닌가. 마음을 다하여 일을 행하였는데도 기만을 당하는 것은 공무를 행하다 저지르는 공죄(公罪)이다. 만약 혹 이렇게 하여서 억울하게 죽는 자가 없다면 어찌 다행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김시형이 아뢰기를,

“신이 마음속에 항상 잊히지 않는 것이 있었기에 지난번 유신(儒臣)이 글 뜻으로 인하여 아뢰었을 때 신도 진달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대신과 여러 신하의 말을 듣고서야 그것이 폐단이 있음을 신이 과연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명을 막 내렸으니 외방에서 명을 봉행할 때 만약 폐단이 있으면 도신이 반드시 장계로 보고할 듯합니다.”

하고, 송인명이 아뢰기를,

“신이 아뢴 것도 그 명을 도로 중지하자고 청한 것은 아닙니다. 법률이란 지극히 중한 것인데 어찌 자주 가볍게 고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하(夏)나라 우왕(禹王)은 수레에서 내려 죄인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당시에 다른 사람들은 죄를 저지른 자를 보면 반드시 그가 형편없는 자라며 배척하고 통렬히 미워하였는데 성인의 마음은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으니, 비록 서캐나 이처럼 미미한 것들도 오히려 목숨을 아까워하거늘 하물며 사람이겠는가. 다른 형률이라면 내가 혹 머뭇거리기도 하겠지만 살려 주는 쪽으로 형률을 적용하는 것은 내가 주저하지 않는다.”

하였다. 송인명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이렇게까지 하교하시니 이는 나라의 복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이 마음을 더 넓히고 채우소서. 다만 근래 들어 조정의 명령이 지나치게 관대하니, 신이 생각하기에 생살(生殺)과 관련된 일은 혹 가벼운 쪽으로 처벌하는 것도 해롭지 않겠지만, 도배(徒配)나 삭파(削罷) 이하는 엄히 처벌하는 것을 위주로 한 뒤에야 나라의 체모를 높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하였다. 김시형이 아뢰기를,

“해마다 녹수(錄囚)하여 반드시 죽을 자리에서 살아날 길을 찾아주는 것은 모두 성상께서 살리기를 좋아하시는 덕택입니다. 그런데 올해의 계복(啓覆)은, 입춘이 26일에 있으니, 비록 섣달이라도 오히려 시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체로 계복한 죄인은 살아나는 자가 혹 10명 중에 한두 명은 되지만, 도적의 경우는 형조에서 포도청으로 이송하여 마무리 짓기에 급급하니, 그 사이에 또한 어찌 애매한 자가 없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매번 그 문서를 볼 때마다 마음에 몹시 측은하였다. 진실로 범한 죄가 있으면서도 완고하게 버티고 승복하지 않는 자도 간혹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만약 애매한 자가 장형(杖刑)을 견디지 못하여 죄를 인정한다면 어찌 몹시 애처롭게 여길 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며칠 전 하교한 뒤에 다시 생각해 보았는데, 외방에서 시행하기 어렵다는 주장은 참으로 우상이 아뢴 바와 같은 측면이 있으니, 그 폐단을 내가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토포사들이 이 거조를 본다면 앞서 단단히 직책을 수행하려던 자들이 나중에 혹 해이해지지 않을까 이것이 염려스럽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며칠 전의 생기(省記)에 ‘소덕문(昭德門)’이란 말이 있었다. 이것이 과연 어느 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소덕’ 두 글자는 곧 휘호(徽號)이니 일이 몹시 온당치 못하다. 문의 이름을 고쳐 정하는 것이 마땅한데, 제학이나 유신 중에서 이름 고치는 일을 맡아야 할 것 같다. 필시 전례가 있을 것이니 승정원에서 상고하여 아뢰라.”

하였다. - 거조를 내었다. - 상이 이르기를,

“일찍이 남한산성(南漢山城)을 보았더니 좌전(左殿), 우실(右室)의 제도가 있었다. 그런데 강도(江都)와 북한산성(北漢山城)에는 이것이 없다. 북한산성은 이제 처음으로 쌓은 것이라 그렇다지만 강도는 우리나라의 진양(晉陽)이니 중요하지 않겠는가. 옛날 역사를 가지고 말하더라도, 먼저 종묘와 사직을 세운 사실을 주 부자(朱夫子)께서 크게 쓰신 것에서 그 의의를 알 수 있다. 만약 진양이 돌아가 의지할 곳임을 안다면 행궁(行宮)만 있을 뿐 종묘와 사직을 세우지 않은 것은 일의 체모로 보아 온당치 않으니, 종묘와 사직을 짓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역사(役事)는 비록 때를 보아서 시작할 수 있는 일이기는 하지만, 강화 유수(江華留守)도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하자, 송인명이 아뢰기를,

“정묘년(1627, 인조5)과 병자년(1636)의 난리 때 종묘와 사직이 강도에 들어갔는데, 그 당시 어느 곳에 봉안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반드시 그 당시에 봉안한 장소가 있을 테니, 고사(故事)를 상고한 뒤에야 논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수신(守臣)으로 하여금 고사를 상고하게 하여, 그때 봉안했던 장소를 알아낸 뒤에 올라와서 어전에 나아와 여쭈어 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 뽑아서 거조를 내었다. - 상이 이르기를,

“두 무신은 앞으로 나아오라.”

하니, 김성응과 구성임이 나아와 엎드렸다. 상이 이르기를,

“영성군이 말하기를, 조총(鳥銃)이 나온 뒤로는 항우(項羽)라도 그 몸을 보호할 수 없다고 하였다. 대개 조총이 아니면 적을 막을 수가 없는데, 만약 하루 종일 적을 상대하느라 탄환이 다 떨어진다면 장차 어떻게 하겠는가? 열무(閱武)할 때 보니, 대체적인 모습은 짐작할 수 있었지만 지금 군대의 상태나 기타 모든 상황들은 어떠한가?”

하자, 김성응이 아뢰기를,

“만약 탄환이 없다면 조총은 더 이상 거론할 것이 없습니다만, 훈국에서의 이른바 삼수(三手)는 곧 조총, 환도(環刀), 창(槍)입니다. 군병 중에 조총을 가지고 있는 자는 또한 환도를 찹니다. 환도는 단거리 무기이고 조총은 장거리 무기입니다.”

하였다. 구성임이 아뢰기를,

“신이 1년 동안 훈련도감을 맡았으나 군기(軍器)가 모양새를 갖추지 못하여 금군 700명 중에 군기가 없는 경우가 150건입니다. 흑각(黑角)으로 만든 관궁(官弓)은 7년에 한 번 지급하는데 지금은 8년까지 이르며, 활이 변형되어 모두 부러진 뒤에나 이를 새로 만들어 지급합니다. 그리고 보군(步軍)의 갑옷 2600벌 중에 전부터 있던 갑옷은 어느 해에 만들었는지 모르겠으나 모두 콩멍석 같아서 착용할 수가 없습니다. 기해년(1719)에 만든 700벌은 그래도 수십 년은 지탱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나라에 경계할 일이 없으니 진실로 염려할 만한 것이 없지만, 변란에 대비하는 도리로 보아 갖추어 지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신(大臣)은 ‘지금은 저렇게 흉년이 들었으니 우선은 천천히 뒷날에 하자.’라고 하는데, 1900벌을 갖추어 지급한 뒤에야 그 숫자를 채울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김성응이 아뢰기를,

“훈련도감은 다른 군문과 달라서, 어영청은 군량미와 보포(保布)를 본청에서 거두어들이는데, 훈련도감의 군량미는 호조에서 거두어들입니다. 보포는 1년에 거두어들이는 것이 1300여 동(同)인데, 이것으로 춘등(春等)ㆍ추등(秋等)ㆍ동등(冬等)의 옷감과 마병(馬兵)의 마초(馬草)값을 지급한 뒤에 남는 것은 100여 동에 불과하며, 이는 훈련대장이 중순 시사(中巡試射)를 할 때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니 군기를 보수하고자 하더라도 도무지 물력이 나올 곳이 없습니다. 훈련대장과 호조 판서가 으레 양향 제조(糧餉提調)를 겸하는데, 훈련대장이 지급해야 할 물품을 호조 판서가 내주지 않으니 이는 곧 호조 판서의 물품이 될 뿐 훈련도감에서는 도움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호조의 잘못이다.”

하였다. 구성임이 아뢰기를,

“훈련도감의 1년 수용(需用)은 이 정도에 불과한데 무신년(1728) 이후로 해마다 재감해 주고 작년에 또 360여 동을 재감해 주었으니, 이와 같은 상황에서 어찌 물력이 있겠습니까. 앞으로 또 필시 재감할 일이 있을 테니, 이는 참으로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일찍이 선조(先朝)에서 고(故) 장신(將臣) 이완(李浣)이 북영(北營)에 입직하고 있을 때 영숭문(永崇門)으로 불러들여 음우(陰雨)에 대비하는 방도에 대해 물었다. 지금의 시점에서 그것을 보면 어떻다고 생각하는가? 훈련도감의 군사들은 본디 돌아가며 쏘는 방식에 매우 익숙하니, 예전의 군대 모습을 오늘날에 비추어 본다면 어찌 우습지 않겠는가.”

하자, 구성임이 아뢰기를,

병자년의 난리 때 평안도 관찰사 홍명구(洪命耈)와 평안 병사 유림(柳琳)이 도적들의 사나운 기세를 문화(文化)에서 막았는데, 홍명구는 넓은 벌판에 진을 쳤다가 함락되었으며, 유림은 산에 의지하여 진을 치고는 사수 5열이 차례로 돌아가며 쏘는 방식으로 공을 세웠으니, 이는 이미 시험하여 증명된 바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날 동가(動駕)할 때 보니, 군병들이 삼우장(三隅杖 세모진 방망이)과 능장(稜杖)을 가지고 있어서 참으로 우스웠다. 이것으로 어떻게 적을 막을 수 있겠는가.”

하자, 구성임이 아뢰기를,

“삼우장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또한 모두 요도(腰刀)를 차고 있습니다.”

하고, 김성응이 아뢰기를,

“신이 중순 시사를 할 때 보았는데, 훈련도감의 이른바 모검수(毛劍手)라는 자들에게서는 충분히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전에 장붕익(張鵬翼)이 포도대장을 겸하고 있을 때 포졸 가운데 용력(勇力)이 있는 자 5, 6인을 뽑아서 자신이 모검을 쓸 때 달려들어 결박하도록 하였는데, 끝내 결박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얻어 맞고 달아났습니다. 이것으로 볼 때 모검수를 잘 쓴다면 위급할 때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들은 모두 무신의 우두머리로, 한 사람은 일찍이 대장(大將)을 지냈고 한 사람은 현재 대장의 직임을 맡고 있으니, 평상시 습조(習操)할 때에 탄환을 아껴 쓰도록 하고 반드시 함부로 쏘게 하지 말라.”

하자, 구성임이 아뢰기를,

“신이 평소에 각별히 신칙하고 있습니다. 또 때때로 연습도 시키고 있는데, 등록(謄錄)을 살펴보면 중순 시사 때의 상격(賞格)은 호조에서 지급합니다. 그래서 1년에 간혹 4, 5차례까지 설행하였지만, 중간에 상격으로 줄 물자가 부족해지자 한두 차례 줄이더니, 지금은 그것을 또 줄였습니다. 저 군졸들이 원하는 것은 단지 사소한 상격에 있을 뿐이니, 그 기대를 저버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신이 봄에 한 차례 연습을 시키고 가을에 또 설행하였지만, 상격을 마련하는 일이 몹시 어렵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군병이 있은 뒤에야 힘을 얻을 수 있으니, 오늘 당장 근심이 없다고 해서 그 마음을 조금이라도 느슨하게 하지 말라. 근래 들어 무관이 곤수(閫帥)를 한 번 지내고 나면 옷소매가 매우 넓어지는데 이는 몹시 잘못이다. 내가 경들에게 권면하노니, 병서(兵書)를 읽어서 그 이치를 잘 터득하고 마음으로 환히 꿰뚫은 뒤에 이어 나이 어린 신진 무관을 권장하여 훗날 위급할 때 쓸 수 있게 하라.”

하자, 김성응이 아뢰기를,

“신이 지금은 군대의 직임에서 체차되었지만, 그동안 내리신 성상의 하교가 자세할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만에 하나라도 갚을 수 있기를 바라며, 이를 마음속에 간직하고 잊지 않을 뿐입니다.”

하고, 구성임이 아뢰기를,

“신이 비록 재주도 없고 식견도 없지만 감히 성상의 하교를 우러러 받들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무비지(武備志)》를 경들은 보았는가?”

하자, 김성응이 아뢰기를,

“신은 아직 《무비지》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권수가 50여 권에 이른다고 합니다.”

하고, 구성임이 아뢰기를,

“연전에 서 판부사(徐判府事)가 사행에서 돌아온 뒤에 신이 마침 그를 만나러 갔는데, 그때 《무비지》를 꺼내어 보여 주어서 잠시 펼쳐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윤광신(尹光莘)이 평안 병사로 부임할 때 인간(印刊)하기 위해 가지고 갔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작년에 어선(御膳)을 물리쳤을 때 서책을 보다가 우연히 알게 되었는데, 이는 실로 병가(兵家)에 없어서는 안 되는 책이다. 평안 병사가 개간(開刊)할 수 있는 물력이 있다 하더라도, 종이를 구하는 것이 또한 어찌 쉽겠는가.”

하자, 윤휘정이 아뢰기를,

“평안 병사에게 종이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통영(統營)의 물력이라면 할 수 있을 것이다. 한번 물어보라고 해서, 만약에 아직 간행하지 않았다면 군문에서 서로 의논하여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구성임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성상의 하교에 따라 무경칠서(武經七書)를 평양 감영으로 내려보내 인출하도록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간행하였는가?”

하자, 김성응이 아뢰기를,

“아직 다 간행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간행을 끝마친 뒤에는 즉시 비국에 올려보내라고 신칙하겠습니다.”

하였다. 신하들이 차례로 물러 나갔다.

[주-D001] 지난번에 …… 수서(手書) :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수개월 동안 녹봉까지 반납하며 출사하지 않고 있었는데, 영조는 이달 15일에 그를 꿈에서 보았다는 내용으로 수서를 보냈다. 《承政院日記 英祖 14年 10月 15日》[주-D002] 어사의 장계 : 전라도 암행 어사 남태량(南泰良)이 올린 장계로, 전라도 지역의 재해 상황을 두루 언급하며 대책을 세울 것을 청하였다. 《承政院日記 英祖 14年 10月 20日》[주-D003] 신명좌(申命佐)는 …… 있겠는가 : 신명좌는 이해 6월에 옥구 현감(沃溝縣監)에 임명되었으나 백성을 제대로 돌보지 않은 사실이 전라도 암행 어사 남태량의 장계를 통해 드러나, 파출됨과 동시에 엄히 감처하라는 처분이 연석에서 내렸다. 그는 특히 백성들이 흩어져 떠돌아다니는 것에 대해 “겨울이 되어 걸식하는 자는 봄이 되면 돌아갈 것이다.”라고 함으로써 더욱 영조의 노여움을 샀다. 《承政院日記 英祖 14年 6月 9日, 10月 17日》[주-D004] 동지사(冬至使)가 …… 차임되었습니다 : 이해 8월에 이덕수를 동지 정사(冬至正使)에 임명하자 이덕수는 상소하여 누차 사양하다가 마지못해 올라왔다. 그런데 10월에 대사헌 이수항(李壽沆)이 이덕수의 귀가 어두운 것을 이유로 체개(遞改)를 요청하자 이덕수는 곧바로 고향으로 내려갔다. 이에 조정에서는 병조 판서를 사직하고 고향 공주(公州)에 내려가 있던 영성군 박문수를 이달 17일에 새로 동지 정사에 임명하였다. 《承政院日記 英祖 14年 8月 10日, 10月 15日ㆍ17日》[주-D005] 몇 …… 때 : 1734년(영조10)에 우리나라 사람이 국경을 넘어가 인명을 해치고 물건을 약탈한 일 때문에 진주사를 보낸 일이 있었는데, 이때의 부사(副使)가 박문수였다. 당시의 하직 인사 과정에서 영조가, 박문수가 병들었으므로 체차해 주려 하였으나 본인이 가기를 자청했다고 하였다. 《承政院日記 英祖 10年 7月 2日》[주-D006] 부제학이 앞서도 아뢰었지만 : 부제학은 서종옥(徐宗玉)이다. 서종옥은 이달 19일의 연석에서 대사헌의 계사 때문에 이덕수가 체개(遞改)된 것을 안타까워하며, 이는 중신을 예우하는 도리가 아니니, 이덕수가 조정에 머무르면서 자문에 응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청하였다. 《承政院日記 英祖 10年 10月 19日》[주-D007] 이덕수(李德壽)가 …… 물러났다가 : 이덕수는 1737년(영조13) 8월에 이조 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참봉 자리에 인척을 추천한 문제를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지적하여 체직된 일이 있다. 《承政院日記 英祖 13年 8月 16日, 9月 1日》[주-D008] 순검난입여경외(巡檢闌入與京外) …… 써넣으라 : 이달 9일의 연석에서 서종옥(徐宗玉)이 형장(刑杖) 남용의 문제를 아뢰자 논의 끝에 ‘감사, 병사의 군무 외에는 곤장을 쓰지 말라.’는 내용으로 거조를 내렸다. 이후 며칠 사이에 이 거조는 계속 수정되었는데, 9일의 일기에는 오늘 이야기하는 이 구절까지 써넣어 완성된 거조가 수록되어 있으며, 그 아래에 거조가 수정된 과정과 보충한 글자를 소자로 자세히 기록해 놓았다. 여기서 추가하여 써 넣으라는 구절의 원문은 ‘各軍門捕廳討捕廳外內而摠府兵曹外而’ 17자인데, 9일의 일기에 근거하여 중간에 ‘軍務’를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承政院日記 英祖 14年 10月 9日》[주-D009] 지난번 …… 것입니다 : 이해 5월에 포도청에서, 어보를 위조한 죄인 유현지(柳顯之)는 죄를 인정하였으나 이를 사주한 윤취조(尹就朝)는 무죄를 주장하고 있다며, 이들을 형조에서 대질시켜 조사하여 처치할 것을 청한 일이 있다. 《承政院日記 英祖 14年 5月 27日》[주-D010] 신이 …… 있습니다 : 이달 9일의 연석에서 《춘추(春秋)》를 강독한 뒤 형장(刑杖)의 남용을 금지하는 내용의 거조를 내렸는데, 병조 판서 김시형이 여기에 덧붙여, 각 토포영에서 체포하여 자복을 받았더라도 반드시 감사(監司)가 직접 신문하여 억울한 일이 없도록 하자고 청하여 윤허를 받은 일이 있다. 《承政院日記 英祖 14年 10月 9日》[주-D011] 하(夏)나라 …… 흘렸다 : 하나라 우왕이 외출하였다가 죄인을 만나자 수레에서 내려 사연을 물어보고는, 요순(堯舜)의 백성들은 모두 요순의 마음을 가졌는데 자신의 백성들은 그렇지 못하여 이렇게 죄를 지었다며 자책의 눈물을 흘렸다. 《說苑 君道》[주-D012] 며칠 …… 아뢰라 : 소덕문은 한양 도성 서남쪽의 소문(小門) 이름이다. 그런데 예종(睿宗)의 비(妃) 장순왕후(章順王后)의 시호(諡號)가 휘인소덕장순왕후(徽仁昭德章順王后)이다. 숙종이 이를 휘(諱)하여 종반(宗班)의 가자(加資) 가운데 ‘소덕대부(昭德大夫)’를 ‘수덕대부(綏德大夫)’로 고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成宗實錄 1年 1月 22日》 《承政院日記 肅宗 37年 8月 1日, 英祖 4年 8月 16日》[주-D013] 북한산성은 …… 그렇다지만 : 북한산성은 삼국 시대 때부터 이미 성곽이 존재하였지만, 조선 시대 들어 양란을 겪은 후 도성 외곽을 강화하자는 축성론(築城論)이 일어나, 1711년(숙종37) 무렵부터 대규모의 공사를 시행하여 이듬해 완성하였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肅宗實錄 37年 3月 20日, 38年 5月 12日》[주-D014] 진양(晉陽) : 나라의 최후 보루를 비유하는 말이다. 춘추 시대 진(晉)나라 조 간자(趙簡子)가 윤탁(尹鐸)을 보내어 진양을 다스리게 했더니, 윤탁이 “잠사(蠶絲)로 삼을까요, 보장(保障)으로 삼을까요?” 하고 물었는데, 조 간자는 “보장으로 삼으라.” 하였다. 잠사로 삼는다는 것은 세금을 걷는 대상으로 여긴다는 뜻이고, 보장으로 삼는다는 것은 침략을 받았을 때 들어가 의지할 곳으로 만든다는 뜻이다. 《資治通鑑綱目 卷1》[주-D015] 옛날 …… 것 : 한 고조(漢高祖)가 초나라 항우에게 대패하고 난 뒤 아직 나라가 안정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소하(蕭何)에게 명하여, 관중(關中)을 지키고 종묘와 사직을 세우게 하였다. 이 사실이 주희(朱熹)가 편집한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한 고조 2년의 기사 중 강(綱)에 실려 있으므로 크게 썼다고 표현한 것이다.[주-D016] 일찍이 …… 때 : 이완은 주로 효종(孝宗) 때 어영대장과 훈련대장을 지내며 군사와 관련된 대책을 많이 냈다. 1656년(효종7) 10월의 연석에서 효종이 군사들에게 갑옷이 없으니 나무 방패를 쓰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하자, 당시 훈련대장이던 이완이 차라리 큰 포대를 갖고 다니다가 유사시에 흙을 담아 방어하는 게 낫다고 주장한 일이 있다. 《孝宗實錄 7年 10月 4日》[주-D017] 음우(陰雨)에 대비하는 방도 : 환란이 닥치기 전에 예방하는 방도를 가리킨다. 《시경》 〈빈풍(豳風) 치효(鴟鴞)〉의 “하늘에서 장맛비가 아직 내리기 전에, 저 뽕나무 뿌리를 거두어 모아다가, 출입구를 단단히 얽어서 매어 놓는다면, 지금 너희 하민들이 혹시라도 감히 나를 업신여길 수 있겠는가.[迨天之未陰雨, 徹彼桑土, 綢繆牖戶. 今女下民, 或敢侮予?]”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주-D018] 모검수(毛劍手) : 예리한 칼을 쓰는 군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1744년(영조20) 2월 8일의 연석에서 영조가 왜검(倭劍)과 모검(毛劍)에 대해 묻자 김성응이 둘 다 모두 날카로운 칼이라고 답하는 내용이 있다. 《承政院日記 英祖 20年 2月 8日》[주-D019] 서 …… 뒤에 : 서 판부사는 서명균(徐命均)으로, 1737년(영조13) 4월에 세자 책봉 주청사(世子冊封奏請使)에 임명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承政院日記 英祖 13年 4月 22日》[주-D020] 어선(御膳)을 물리쳤을 때 : 1737년(영조13) 8월에 조야가 서로 상소를 올리며 다투자 당인(黨人)의 행태를 보이는 신하들에 노하여 영조가 며칠 동안 어선을 물리친 바 있다. 《承政院日記 英祖 13年 8月 8日》

 

승정원일기 > 영조 > 영조 11년 을묘 > 10월 20일 > 최종정보

영조 11년 을묘(1735) 10월 20일(을유) 맑음

11-10-20[21] 소대를 행하여 《자치통감강목》을 강하고, 언로를 여는 문제, 심성진에게 내린 판부를 거두어들이는 문제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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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시(申時)에 상이 희정당에 나아갔다. 소대를 행하러 신하들이 입시한 자리이다. 참찬관 이광보(李匡輔), 시독관 이주진(李周鎭)ㆍ심성진(沈星鎭), 가주서 박창윤(朴昌潤), 기사관 채경승(蔡慶承)ㆍ김시찬(金時粲)이 입시하였다.

이주진이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22편 ‘십년춘정월연모용충칭제(十年春正月燕慕容沖稱帝)’부터 ‘국인열지(國人悅之)’까지 읽었다. 상이 이르기를,

“하번 옥당이 읽으라.”

하니, ‘삼월태산태수장원(三月泰山太守張願)’부터 ‘유편장이(有片長耳)’까지 읽었다. 상이 이르기를,

“승지가 읽으라.”

하니, ‘십칠년춘삼월(十七年春三月)’부터 마지막 편까지 읽었다. 상이 이르기를,

“하번이 읽으라.”

하니, 김시찬이 22편 하(下)부터 제9판 ‘오월연이모용덕위기주목업(五月燕以慕容德爲冀州牧鄴)’까지 읽었다. 상이 이르기를,

“범위를 ‘위왕규 발상산장(魏王珪拔常山張)’으로 고쳐서 부표(付標)하라.”

하였다. 이주진이 초판(初版) 모용충(慕容沖)의 일을 가지고 글 뜻을 진달하기를,

“상벌은 임금이 착한 일을 권장하고 악한 일을 징계하는 바탕입니다. 교만은 나라가 가득 차면 엎어지고 이루면 무너진다는 조짐입니다. 모용충의 정서(鄭西)에서의 승전은 화음(華陰)에서 북쪽으로 달아났던 치욕을 보상하기에 겨우 충분했지만, 마침내 아방(阿房)으로 들어가 차지하고 거만하게 스스로 황제가 되었으니 지나친 교만함이 생겨나고 상벌을 마음 가는 대로 하였습니다. 모용성(慕容盛)이 이른바 ‘공(功)이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교만이 이미 심하니, 거의 구제하기 어렵다.’라고 하였으니, 참으로 모용충을 알았다고 할 만합니다. 끝내 자기가 거느린 장군 한연(韓延)에게 시해되었고 나라도 따라서 망하였으니, 이는 교훈 삼아서 경계하기에 충분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모용성의 나이가 겨우 13세인데, 능히 모용충이 패망할 조짐을 알았으니 그 또한 기이하다.”

하였다. 아뢰기를,

“착한 자는 표창하고 죄를 지은 자는 벌을 줍니다. 이것이 본래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고 사람들을 다스리는 도리입니다. 모용충의 경우는 막 황제를 참칭하고 곧 스스로 만족하고 우쭐거리는 뜻이 있었고, 모용성은 10세를 넘기고서 능히 이러한 말을 하였습니다. ‘상벌을 마음 가는 대로 하였다.[賞罰任情]’라는 4자는 비록 모용충에게 한 말이지만, 또한 후세의 군주가 유념할 곳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뢴 바가 좋다. 비록 호로(胡虜)의 일이지만, 또한 교훈 삼아 경계할 만하다.”

하였다. 심성진이 아뢰기를,

“하늘이 차례를 펴서 질서가 있고, 하늘이 죄 있는 자를 토벌합니다. 상벌이 중도를 잃으면 문란할 따름이니, 문란하면 나라가 나라답지 못하게 됩니다. 신하에게 맡기는 방도는 반드시 인재를 얻어야 가능합니다.”

하고, 이주진이 아뢰기를,

“사랑하는 자에게 상을 주고 미워하는 자에게 벌을 준다면, 누가 기꺼이 그를 위하여 쓰이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이 마음 가는 대로 하는 것이다.”

하였다. 이주진이 아뢰기를,

“《서경》에 이르기를 ‘우(禹) 임금이 좋은 말을 듣고는 절을 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좋은 말에 절을 한 것은 또한 착한 것에 상을 주는 것입니다. 대체로 착하면 상을 주고 죄를 지으면 벌을 준다면 천하의 선악이 권장하고 징계되는 바가 있을 것이고, 사람의 마음도 자연히 흡족하게 여길 것입니다. 역사로 말하자면, 순(舜) 임금이 곤(鯀)을 우산(羽山)에서 주벌하니 천하가 모두 복종하였습니다. 한(漢)나라의 일로 말하자면, 동현(董賢)의 경우는 상을 줄 만한 의리가 없었지만 겨우 약관(弱冠)의 나이에 갑자기 경상(卿相)의 지위를 주었으니, 이것이 상벌을 마음 가는 대로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마음 가는 대로 하는 해로움은 장차 어떠한 지경에 이르게 될지 모르므로, 모용성의 4자의 말은 그 뜻이 무궁합니다. 임금이 유의해야 할 점이므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하였다. 심성진이 아뢰기를,

“공이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교만이 이미 심하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참으로 유의할 곳입니다. 무릇 정령(政令)을 시행하고 베푸는 사이에 한번 교만한 마음이 생기면, 가는 곳마다 해롭지 않음이 없습니다.”

하고, 이주진이 아뢰기를,

“하나의 ‘교(驕)’ 자는 귀천(貴賤) 상하(上下)를 막론하고 병이 되지 않음이 없습니다. 만약 함양하는 공부가 있어서 전전긍긍하면서 잡고서 놓지 않는다면, 자연히 교만이 병이 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이 교만의 상대가 되는 것이 겸손입니다. ‘겸(謙)’ 이라는 1자는 귀천을 막론하고 늘 잡고 지키면서 잠깐이라도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도 유의해야 할 곳입니다. 하번이 아뢴 바가 참으로 옳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각별히 유의하겠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부견(苻堅) 또한 일대의 영웅이다. 왕맹(王猛)에게 일임하고 결국 중원을 얻었는데, 교만한 마음이 곧 생겨나서 결국 한번 패하고 몸을 잃고 나라가 엎어지기에 이르렀다. 가령 부견이 왕맹의 말을 오로지 따랐다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겠는가. 이는 진(晉)나라를 정벌하는 한 가지 큰 오류에서 비롯한 것이다. 부견이 왕피(王皮)를 사면하며 이르기를 ‘승상이 임종하면서 경에게 10마리의 농우(農牛)를 주도록 부탁하였고 경을 위하여 관직을 부탁한 적이 없었으니, 아버지만큼 아들을 알아보는 자는 없다.’라고 하였으니, 부견은 왕맹과 의기투합하였다고 할 만하다. 그런데 왕맹이 죽은 뒤에 죽음에 임할 때의 말을 생각하지 않고 강남(江南)을 차지하려고 단단히 마음먹고 모용수(慕容垂)와 요장(姚萇) 무리의 말을 오로지 믿었다가 끝내 패망에 이르고도 뉘우치지 않았으니, 이 어찌 마음 가는 대로 해서 그러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니, 이주진이 아뢰기를,

“지당합니다. 부견의 패망은 대체로 하나의 ‘교(驕)’ 자 때문에 당하게 된 것입니다. 무릇 많은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어 몹시 취할 때까지 마시기로 하였을 때부터 그 교만한 마음이 이미 싹텄음을 대체로 알 수 있습니다. 왕경략(王景略 왕맹(王猛))의 훌륭한 계책에 힘입어 싸우면 반드시 이기고 공격하면 반드시 취하였으니, 강좌(江左 장강(長江) 동쪽 지역)의 바깥에 무릇 부견이 아니면 누가 있었습니까. 왕맹이 죽은 뒤에도 오히려 다행히 승리를 거둘 수 있었으니, 이것이 곧 굴하(屈瑕)가 배 젓는 것에 견준 것입니다. 이로부터 교만한 마음과 자만한 뜻이 나날이 불어나고 다달이 늘어나, 일찍이 정통이 서로 이어진 강동(江東)을 채찍 하나를 던져서 흐르는 강물을 차단하는 것처럼 할 수 없음을 몰랐던 것이니 마음 가는 대로 하는 해로움이 이에 이르렀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왕맹이 병이 들자 몸소 빌고 바랐는데, 왕맹이 죽음에 임하여 말하면서 오직 진(晉)을 정벌하는 것을 경계하였다. 진을 정벌하게 되자 장 부인(張夫人)과 종실들이 모두 간언하였지만 듣지 않았으니, 이는 교만에서 비롯한 것이다. 모용수가 왕업을 회복하는 것에 오직 뜻을 기울이면서도 오히려 이르기를 ‘진왕(秦王)의 옛 은혜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니, 이는 오히려 취할 만하다. 옛말에 이르기를 ‘인심을 얻는 자는 번성하고, 인심을 잃는 자는 망한다.’라고 하였다. 왕맹이 있었다면 부견이 한결같이 위임하였을 것이니, 모용수와 같은 자가 어찌 감히 이럴 수 있었겠는가. 요장의 손에 죽은 것은 다름이 아니다. 뜻이 자만하여 그러한 것이다.”

하였다. 이주진이 ‘태보안출진광릉(太保安出鎭廣陵)’으로 다시 아뢰기를,

“이것이 주자(朱子)의 필법(筆法)이 뜻이 있는 것입니다. 사안(謝安)이 비록 혁혁한 칭찬은 없지만, 능히 효무제(孝武帝)를 받들어 보좌하여 한 구석을 안무(按撫)하였습니다. 안으로는 신발을 담당하는 인재도 등용하였고, 밖으로는 백만의 외적을 물리쳤으니 그 공이 적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저 회계왕(會稽王) 도자(道子)가 권병(權柄)을 홀로 쥐고 마침내 꺼리어 틈이 생기게 되었으니, 사안의 처지가 자연히 조정에서 편안할 수 없었습니다. 스스로 진(鎭)으로 나가겠다고 청하였으니 뜻도 상상할 수 있습니다. ‘동산(東山)의 흥미가 진진함을 다시 깨달았다.’라는 말을 가지고 살피자면, 동산에서 노닌 것도 즐거움을 회복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을 참소하는데 엮여서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사람으로 하여금 개탄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남사(南史)》로 보자면, 사안이 광릉(廣陵)에 있으면서 왕실을 간절히 그리워하면서 근심하고 울적해하다가 오래지 않아 죽었습니다. 예로부터 참소하여 남을 해치는 자가 대체로 어렵습니다. 사안이 조정에 있으면 도자가 감히 홀로 멋대로 할 수 없었으므로, 꺼려서 지방의 진으로 쫓아내었습니다. 주 문공(朱文公 주희(朱熹))이 글을 쓰는 방식은 깊은 뜻이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두루 잘 다스리고 사직을 부지한 공이 사안은 본래 적지 않은데, 오히려 제갈량(諸葛亮)이 국궁진췌(鞠躬盡瘁)한 것만 같지 못하다. 이는 오직 겉면일 뿐인데 청담(淸談)이 실질이 없으므로, 참소하는 말이 들어간 것도 여기에서 비롯한다. 비록 그렇지만 효무제는 오히려 문정(文靖)이라는 시호(諡號)를 줄 수 있었으니, 사안을 대하는 예우는 오히려 가상하다.”

하였다. 이주진이 아뢰기를,

“대체로 진(晉)나라 시대의 인물은 단지 청허(淸虛)함을 숭상하여 실지가 전혀 없습니다. 사안의 자품은 몹시 고결한데 학식이 전혀 없으니 이것이 단점입니다. 그의 아량은 조야(朝野)를 진정시키고 복종시킬 수 있습니다. 별장을 걸고 바둑을 둔 일에 이르러서는 왕탄지(王坦之)나 환충(桓沖)과 같은 사람들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승전보를 들은 뒤에 문서를 거두어 책상에 놓은 뒤에 이르기를 ‘아이들이 드디어 이미 적을 격파하였다.’라고 하면서 전처럼 바둑을 두었습니다. 심정을 감춘 것이라고는 하더라도 사람을 진압할 만한 역량은 참으로 가상합니다. ‘강좌의 위인’이라는 칭찬은 참으로 헛된 것이 아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학식은 부족하지만 그 인품은 고결하다. 이를 가지고 살피건대, 당시 사안이 없었다면 나랏일을 맡길 만한 사람이 실로 없었을 것이다.”

하였다. 심성진이 아뢰기를,

“사안의 그날의 일은 진실로 사직을 보존한 공이라고 할 만한데, 오히려 사람을 참소한 자가 이간하는 일이 있었으니, 어찌 개탄스럽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모용수가 부견에게 진(晉)나라를 정벌하도록 권한 것은 대체로 때를 틈타 회복을 도모하려는 계책이었다. 이것이 바로 모용수가 아름답지 못한 점이다. 요장의 경우는 더욱 차마 할 수 없는 짓을 하는 사람이다. 모용수는 오히려 본래 부견의 옛 은혜를 잊지 않았다. 부비(苻丕)에게 서쪽으로 돌아갈 길을 열어 준 일을 가지고 살피자면, 본래 악한 사람은 아니다. 요장과 입장을 바꾸어 본다면, 포위하고 핍박하며 찬탈하고 시해한 것이 요장의 악함에는 이르지 않는다.”

하니, 이주진이 아뢰기를,

“모용수의 사람됨은 요장과 같은 사람들에 비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비록 그렇지만, 이미 중원을 삼키려는 마음이 있었으니 또한 어떠한 지경에 이르렀을지 모른다. 모용수는 오히려 부견을 살려 줄 수 있었을 것인가? 어찌 그러한가?”

하니, 이주진이 아뢰기를,

“당시의 인물은 다투고 빼앗는 것을 일삼는 것이 본래 기량이었습니다. 만약 모용수로 하여금 맡도록 하였다면 부견을 죽이는 데 이르지는 않았을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진 무제(晉武帝)가 손호(孫皓)에 대한 것과 모용수가 부견에 대한 것은 그 차이가 어떠한가?”

하니, 이주진이 아뢰기를,

“진 무제와 손호의 경우, 손호는 본래 평범한 사람입니다. 회제(懷帝)와 민제(愍帝) 무리의 경우 또한 모두 푸른 옷을 입고 술을 돌렸는데, 죽어도 돌아가지 못하였습니다. 부견은 오히려 오호(五胡)의 차례가 있어서 무릎을 꿇었을 리가 절대로 없으니, 살지 못했을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 생각으로는, 모용수는 요장보다 나으니 절대로 부견을 죽이지 않았을 것이고, 부견도 항복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니, 이주진이 아뢰기를,

“임금이 인재를 얻으면 흥하고, 인재를 잃으면 망합니다. 맡길 만한 심복을 얻는다면 나라를 흥하게 할 수 있습니다. 옛날에 잘 다스리는 신하 10인이 있으니 주(周)나라 왕실이 융성하였고, 한(漢)나라가 소하(蕭何)와 장량(張良)을 얻어서 왕업을 세웠습니다. 공명(孔明 제갈량(諸葛亮))은 후주(後主)로도 오히려 옛 문물을 부흥시키려고 하였으니, 명군(明君)으로 하여금 책임 지워 맡겨서 성과를 이루도록 했다면 한나라의 왕업이 회복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뜻있는 선비들이 한탄하는 까닭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마공(司馬公 사마광(司馬光))의 의론은 어떠한가? 부견도 임금을 시해했는데 강목에 썼고, 요장이 부견을 시해했는데 강목에 썼다. 속수(涑水 사마광)가 이르기를 ‘의론하는 자들은 모두 「부견이 망한 것은 모용수와 요장을 죽이지 않은 것에서 비롯되었다.」라고 하지만, 신은 홀로 그렇지 않다고 여깁니다. 만일 부견이 나라를 다스림에 바른 도리를 잃지 않았다면, 모용수와 요장은 모두 진(秦)나라의 유능한 신하였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 뜻이 과연 어떠한가?”

하니, 이주진이 아뢰기를,

“대체로 모용수의 사람됨은 비교하면 매를 기른 것과 같습니다. 회오리바람이 일어난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늘 하늘을 넘보려는 뜻이 있었습니다. 부견이 망한 것이 비록 모용수 때문은 아니지만, 모용수의 마음은 본래 부견의 패망을 이롭게 여겨서 옛 왕업을 회복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항우(項羽)가 비록 패공(沛公 유방(劉邦))을 죽였다고 하더라도, 천하에 패공이 없었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모용수의 사람됨은 끝내 오랫동안 남의 아래에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니, 이주진이 아뢰기를,

“왕경략이 모용수를 죽이려고 했으니, 그 도량도 몹시 얕고 좁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공명은 오히려 위연(魏延)을 죽이려 했지만, 이는 이상할 것이 못 된다. 사마공의 의론은 공명정대한 큰 원리와 법칙으로 말하였으니, 그가 말한 ‘만일 부견이 나라를 다스림에 바른 도리를 잃지 않았다면, 모용수와 요장은 모두 진나라의 유능한 신하였을 것이다.’라는 것은 또한 통달한 의론이라고 할 만하다. 과연 만일 부견에게 나라가 없었다면, 비록 모용수와 요장이 과연 충신이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본래 몸이 망하고 나라가 없어질 걱정은 없었을 것이다.”

하니, 신하들이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지당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덕을 닦지 않으면 배 안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적국(敵國)의 사람이 된다. 치세에는 간웅(奸雄)이 유능한 신하가 된다. 이 이야기가 가까울 듯한데, 모용수와 같은 자는 끝내 남의 아래에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니, 이주진이 아뢰기를,

“연(燕)나라는 모용위(慕容暐)에 이르러 망하였습니다. 만약 모용각(慕容恪)이 아직도 살아 있었다면 절대로 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관동(關東)의 인민은 모용각을 아버지처럼 대하였으니, 모용각은 현인(賢人)이라고 할 만합니다. 당시는 전국 시대와 같아서 각각 한 구석을 보전하였는데, 연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은 모용각이 있어서입니다. 모용각이 죽으면서 모용수를 힘껏 천거하였는데, 모용수는 끝내 조정에 받아들여지지 않아 진(秦)나라로 망명하였습니다. 모용수의 아들 모용농(慕容農)도 인걸입니다. 당시 신윤(申胤)이 이르기를 ‘복덕성(福德星)이 연나라에 있으니, 연나라를 다시 세우는 것은 1기(紀 12년)를 넘기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고, 태사(太史) 황홍(黃泓)도 이르기를 ‘오왕(吳王 모용수)에게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대체로 모용수는 본래 부견의 신하가 아닙니다. 그런데 속수의 의론에서는 단지 공명정대한 큰 원리와 법칙으로 말하기를 ‘부견이 나라를 다스림에 바른 도리를 잃지 않았다면, 모용수와 요장은 모두 진나라의 유능한 신하였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비록 그들이 과연 충성스럽고 유능한 신하가 될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부견이 만약 잘 부렸다면 결국 부견의 시대에는 모용수가 끝내 신하의 절개를 지켰을 것입니다. 부견이 죽은 뒤에는 장담할 수 없을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부견이 요장에게 치욕을 받은 것은 더욱 심했다고 할 만하다.”

하니, 이주진이 아뢰기를,

“부견과 요장은 임금과 신하의 분별이 정해진 지 오래되었는데 이렇게 심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요장은 본래 흉악한 사람이다.”

하였다. 이주진이 아뢰기를,

“양주(涼州)에 큰 기근이 들어서 사람이 서로 잡아먹었습니다. 짐승이 서로 잡아먹어도 사람들이 싫어하는데, 사람이 서로 잡아먹었다니 어찌 지극히 큰 변괴가 아니겠습니까. 이 때문에 주자가 특별히 썼습니다. 쓴 뜻을 가지고 살피자면, 마음에 근심스럽고 두려움이 있으므로 우러러 아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하였다. 이주진이 26판 ‘범녕위예장태수장(范甯爲豫章太守章)’으로 다시 아뢰기를,

“효무제는 친히 정사를 돌보아 위엄과 권위가 자기에게서 나왔습니다. 이내 또 주색(酒色)에 빠졌으므로 상서령(尙書令) 육납(陸納)이 탄식하기를 ‘좋은 집을 어린아이가 쳐서 부수려고 하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육납이 임금을 섬기는 바는 잘못되었습니다. 임금이 현명하지 못하면 이치로서 올바르게 간언해야 마땅하고, 간언하였는데 듣지 않으면 떠나면 됩니다. 그런데 육납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임금의 잘못을 보고 한 마디 간언도 없이 궁궐을 바라보며 비로소 이렇게 운운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신하로서 임금을 섬기는 절개가 되겠습니까. 허영(許營)은 능히 상소하여 힘껏 간언하였으니, 허영을 육납에 견주면 어찌 현명하지 않습니까. 다만 그 상소하여 아뢴 내용을 살피지 않았으니 언로가 막혔습니다. 효무제는 본래 명철하고 의로운 임금의 일을 가지고 책망할 수는 없지만, 만약 당시에 언로를 넓게 열고 아름다운 말이 그대로 묻히지 않도록 했다면 내란(內亂)이 어찌 일어나고 외구(外寇)를 어찌 두려워했겠습니까. 대체로 임금은 천둥 벼락 같은 위엄이 있으므로 신하들이 말을 다 하며 꺼리지 않는 것을 용의 비늘을 치는 것으로 일컬었으니, 대체로 지극히 두렵기 때문에 말한 것입니다. 그 말이 좋으면 쓰고 좋지 않으면 물리치면 본래 안 될 것이 없는데, 효무제는 상소하여 아뢴 내용을 살피지 않았으니 어찌 개탄스럽지 않겠습니까. 당(唐)나라의 태종(太宗)은 평범한 임금에 불과했지만, 위징(魏徵)의 매우 간절한 말은 받아들이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그가 이르기를 ‘이 고루한 시골 늙은 이를 죽이리라.’라고 한 것은 비록 잘난 체하며 남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뜻에서 나왔다고 하더라도, 끝내 황후의 말을 듣고 가상하다는 말을 하기에 이르렀으니 이 어찌 본받을 만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대명(大明) 신종황제(神宗皇帝)의 일을 가지고 말하자면, 섭대(葉臺)의 41번의 상소를 끝내 살펴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끝내 상소를 품고 달아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로써 신종은 말년의 재앙을 벗어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지금껏 분통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현재로 말하자면 대간의 말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 진실로 많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전하의 도리에서는 진실로 간언하도록 이끄시어 입을 다물고 잠자코 있는 폐단을 없애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참으로 성대한 덕이 되는 일입니다. 신이 평소에 늘 절실하게 염려되는 마음이 남아 있으므로, 마침 글뜻을 풀이한 김에 황공한 마음으로 감히 아룁니다. 삼가 바라건대 유의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각별히 유의하겠다.”

하였다. 심성진이 아뢰기를,

“상번이 아뢴 바가 좋습니다. 언로가 통하느냐 막히느냐는 나라가 흥하느냐 망하느냐에 관계됩니다. 언관을 너그러이 포용하여 간언을 마음껏 할 수 있게 한다면 나라가 다스려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근래 소장에 대한 비답을 보건대, 너그러이 포용하시는 도량은 더러 부족함이 있습니다. 또 신하들의 상소에 분명한 처분을 보이지 않고 다만 이르시기를 ‘그대는 사직하지 말고 직임을 살피라.’ 하실 뿐입니다. 이는 신하들이 몹시 걱정하는 바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하번의 말도 좋다. 대체로 시비(是非)를 지적하는 것을 좋지 않게 여긴다. 나의 대답은 단지 ‘삼가 바라건대[伏乞]’ 이하에 있다.”

하였다. 이주진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의도하시는 바를 신들도 어찌 모르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시비에 치우치는 것은 위에서 그것을 격렬해지도록 조장하는 것이다. 유엄(柳儼)의 일을 가지고 말하자면, 이석신(李碩臣)의 계사(啓辭)에서 점점 한층 더하였으니 이것은 몹시 지나치다. 위에 있는 자가 처음부터 끝까지 호오(好惡)에 치우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이기기를 좋아하는 무리가 혹시라도 점점 그칠 듯한데, 끝내 재미가 없으면 자연히 점점 격렬해지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자, 이주진이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지당합니다. 한쪽을 부추기고 한쪽을 억누르면 피차 호오의 치우침이 없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양쪽을 부추기고 양쪽을 억누르는 것도 이러한 도리는 없으므로, 처분이 더러 분명하지 않은 것이다.”

하였다. 이광보가 아뢰기를,

“소신이 승정원에 있으면서 전하를 바라보기를 마치 요순(堯舜)처럼 여기는데, 삼가 엿보건대 우리 성상께서는 말씀하고 명령하시는 사이에 오히려 아랫사람의 마음에 흡족하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윤취함(尹就咸)의 상소에 대한 비답에서 ‘얼마나 치욕스러운가?[何其辱哉]’라는 4자는 말에 조용하고 화평한 기상이 부족합니다. 윤취함이 아뢴 바가 설령 옳지 못한 점이 있다면 물리치고 죄를 주어도 진실로 안 될 것이 없는데, 하필 ‘욕(辱)’이라는 1자를 비답 중에 표현하십니까? 이를 가지고 살피자면, 삼가 우리 성상의 함양하는 공부가 아직도 순수함이 미진한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뢴 바는 가상하지만, 윤취함의 일은 참으로 괴이하다. 이미 순(舜) 임금과 도척(盜跖)의 일을 가지고 하교한 말이 있지만, 나도 지나친 줄 알고 있다. 나는 향상해 나가는 공부에 대하여 그러한 마음이 없지는 않지만, ‘욕’이라는 1자를 쓴 것도 깊은 뜻이 있다. 이는 내 글이 뜻을 전달하지 못한 탓이다.”

하였다. 이주진이 아뢰기를,

“승지가 아뢴 바가 옳습니다. 성상의 하교도 지당합니다. 윤취함이 유건기(兪健基)를 지적하며 탓한 것은 지나치다고 할 만하지만, 유건기에게는 본래 고집을 부릴 단서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이 유건기를 만날 때마다 절대로 지나치게 혐의하지 말라는 뜻으로 말하였습니다. 이번에 연석에 나올 때에도 간절히 패초를 청하려고 하였습니다. 승지가 이미 말을 꺼냈으므로 감히 아룁니다.”

하고, 이광보가 아뢰기를,

“근래 대간이 시사를 아뢴 적이 있습니까? 남들의 비난이 잠자코 있는 중에, 윤취함이 소원한 신하로서 능히 아뢴 바가 있었습니다. 이 또한 우연이 아닙니다.”

하였다. 이주진이 아뢰기를,

“27장에 범녕(范甯)이 상소하여 이르기를 ‘옛날에는 백성을 부리기를 3일을 넘지 않았는데, 오늘날은 수고롭고 성가시게 하는 것이 거의 3일의 휴식도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무릇 위에서 백성을 부리기를 때에 맞게 하면 백성은 모두 그 삶을 편안히 여기고 그 업을 즐겨서, 공사(公私)가 부유하고 풍족하며 나라가 다스려지고 편안합니다. 효무제의 시대에는 백성을 사역하는 것이 너무 번거로워서 백성들이 그 명을 감당하지 못하였습니다. 일찍이 3일의 겨를도 없어서 아이를 낳고도 기를 수 없고 홀아비와 과부가 감히 시집 장가를 가지 못하기에 이르렀으니, 백성들의 사정에 다급하게 고통을 호소하는 것이 어떠한 지경에 이르렀겠습니까. 더구나 또 13세를 반정(半丁)으로 삼았으니, 그 천리(天理)를 해치게 하고 백성을 괴롭게 함이 참으로 범녕의 상소와 같습니다. 이는 더욱 임금이 교훈 삼아 경계해야 할 곳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알았다. 유념하겠다.”

하였다. 이주진이 아뢰기를,

“소신이 3년 동안 시골에 있으면서 백성들의 사정을 충분히 보았습니다. 지난해와 올해에는 농사가 조금 풍년인데, 농민들은 도리어 풍년을 우환으로 여깁니다. 왜냐하면 풍년에는 공사(公私)의 포흠(逋欠)을 일시에 거두도록 독촉하니, 비록 소출을 다 털어도 갚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풍년을 바라지 않으니 또한 그 딱한 사정을 볼 수 있습니다. 조정에서 감사를 각별히 신칙하고 감사는 수령을 칙려하여 백성을 너무 가혹하게 대하지 않도록 하고, 혹은 염문(廉問)하는 어사(御史)를 보내 탐장(貪贓)을 자세히 조사하도록 한다면 또한 징계하는 도리가 될 듯합니다. 현재는 장법(贓法)이 엄하지 않아서 탐학이 갈수록 극에 달하니, 불쌍한 것은 죄 없는 백성입니다. 아, 살갗을 벗기고 뼈에 사무치도록 토색질이 한이 없고 부역이 그치지 않아서 1년에 3일의 휴식도 없다면, 불쌍한 우리 백성들은 어떻게 살겠습니까. 이것을 유의하셔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뢴 바가 절실하니, 각별히 유의하겠다.”

하였다. 이주진이 아뢰기를,

“전광도(全光道)의 군정(軍政)이 몹시 어렵습니다. 신해년(1731, 영조7)과 임자년(1732) 두 해에 유랑하여 떠도는 자들이 아직도 회복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들었다. 참으로 몹시 불쌍하다.”

하였다. 이주진이 아뢰기를,

“29판에 있습니다. 범녕은 유학(儒學)을 좋아하고 성품이 꾸밈없이 정직하여, 늘 왕필(王弼)과 하안(何晏)의 죄가 걸주(桀紂)보다 심하다고 하였습니다. 대체로 이 시대의 사람들은 원래 학문이 없었고, 다만 근거 없는 말과 겉만 화려한 것을 위주로 하여 확실하게 말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두 황제가 막북(漠北)으로 간 것은 대체로 여기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범녕의 이 말은 절통한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른바 ‘한 대의 재앙은 가볍고 역대의 재앙은 중하며, 자기 몸을 망친 죄악은 작고 무리를 미혹시킨 해악은 크다.’라는 것은 참으로 격렬하고 절실한 의론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하였다. 이주진이 아뢰기를,

“39판에서 이료(李遼)가 공자(孔子) 사당을 수리할 것을 청한 것은 참으로 가상합니다. 당시에 이적(夷狄)이 온 땅에 가득하고 더러운 비린내가 우주를 가득 채워서 사람들은 성사(聖師 공자)가 있는 줄 모르고 세상에서는 학교를 살피지 않았는데, 이료가 홀로 표문(表文)을 올려 ‘일에는 여유 있는 듯하지만 실로 급한 것이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당시에 군사(君師) 된 자라면 진실로 이 말로 인하여 학교를 흥하게 하고 예악(禮樂)을 닦아서 교화의 근본으로 삼아야 하는데, 상소를 살피지 않아서 말이 행해지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탄식할 점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라가 있으면 학교가 있다는 말이 어찌 있겠는가? 이적도 오히려 공자룰 높일 줄 아는데, 효무제는 상소하여 아뢴 내용을 살피지 않았으니 더욱 괴이하다.”

하였다. 이주진이 아뢰기를,

“하편 제6판에 이른바 ‘장성(長星)아, 너에게 술 한 잔을 권하노라.’라고 하였는데, 이는 더욱 괴이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기괴하다, 말할 만한 것이 없다.”

하였다. 이주진이 아뢰기를,

“임금은 수많은 백성의 위에 처하며 두려워하는 바는 오직 하늘이니, 재앙을 보이면 공경하고 두려워하며 자신의 몸을 닦고 소멸시킬 방도를 이르도록 하는 것이 바로 하늘에 응하는 실제입니다. 형혹성(熒惑星)이 자리를 옮겼다는 말을 가지고 보자면 하늘이 보응(報應)하는 것이 이처럼 헛되지 않은데, 지금 효무제는 전혀 두려워하는 뜻이 없습니다. 하늘을 두려워하는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이 어찌 말할 만한 것이겠는가.”

하였다. 이주진이 아뢰기를,

“유건기가 고집을 부리는 것은 끝내 너무 지나칩니다. 하번으로 패초를 청하는 것은 온당치 못할 듯하지만, 감히 아룁니다. 유건기와 민형수(閔亨洙)를 모두 패초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유건기는 굳이 지나치게 고집을 부리기를 일삼을 필요가 없다. 민형수가 문례관(問禮官)으로 갔을 때의 일은 몹시 잘못이다. 그가 이미 숙배한 뒤에 어찌 감히 이처럼 고집을 부리는가. 내일 아침에 모두 패초하라.”

하였다. - 탑교를 내었다. - 상이 이르기를,

“홍문관의 직임에 공무를 행하지 않는 자가 많다. 홍문록(弘文錄)을 하지 않은 지도 이미 오래되었다.”

하니, 이주진이 아뢰기를,

“홍문록은 계축년(1733, 영조9)에 했는데, 신은 그때에 권혁(權爀)의 일로 인하여 70여 일을 의금부에 내려서 추고를 받는 중에 있었습니다. 지금은 홍문관의 동료들이 원래 이를 가지고 고집을 부릴 단서가 없습니다. 소신은 어제 처음 하였는데, 한 번도 사직 상소를 올리지 않고 나왔습니다. 처음에 고집을 부리고 뒤에 곧 나오는 것은 모두 지키는 바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방에는 몇 사람이 있는가?”

하니, 심성진이 아뢰기를,

“모두 4인입니다.”

하였다. 이주진이 아뢰기를,

“소회가 있는데 아뢰지 않으면 신하의 의리가 아니므로 감히 아룁니다. 심성진이 권혁의 상소로 인하여 고집을 부리는 것은 참으로 잘못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신도 만나 보고 말을 하고 편지를 보내 타일렀지만 아직 출사하지 않았는데, 예사롭지 않은 엄한 하교를 받들고는 다른 것을 돌아볼 겨를이 없이 즉시 나와 공무를 행하였습니다. 무릇 임금의 말은 가느다란 실 같아도 영향력이 큰 법인데, 지난번의 판부(判付)에서 삼척(三尺)과 태공망(太公望)의 일을 인용하여 비유한 것은 아마도 화평함이 부족하고 너무 지나친 듯합니다. 전하께서 이렇게 신하들을 두렵게 하는 것은 성심으로 아랫사람을 대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임금의 말이 한번 나오면 사방에 전해지게 됩니다. 이미 삼척을 이야기하고 또 태공망의 일을 인용하였으니, 이것이 심성진에게 어찌 매우 황공하면서 크게 민망하고 두려운 점이 아니겠습니까. 이 판부를 혹시 도로 거두어들인다면 성상의 덕망에 큰 빛이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판부할 때에 마침 보았으므로 그대로 썼다. 대체로 제 태공(齊太公)이 어찌 지나친 일을 했는가? 저 화사(華士)라는 자는 신하로 대해도 오지 않았고 벗으로 대해도 오지 않았으니, 바로 ‘역민(逆民)’이라고 하고 다른 사람이 말렸지만 끝내 죽였다. 더구나 지금 벼슬길에 종사하는 것은 은거하는 사람과는 다른데, 소명(召命)이 두세 차례뿐이 아니었다. 삼척이라고 한 것은 법을 이르는 것이고 기강을 이르는 것이다. 내가 삼척이라는 글자를 쓴 것은 기강과 같은 것을 이른 것이다. 이를 가지고 보자면 참으로 글이 뜻을 전달하지 못한 것이다. 이는 내가 지나친 것이 아니라 신하들이 지나친 것이다. 만약 지나치다고 한다면 나도 스스로 힘쓸 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체로 홍문록을 한 뒤에 유신(儒臣)이 있는가?”

하니, 이주진이 아뢰기를,

“신하 중에는 어쩔 수 없이 나온 자가 있고, 염치를 지나치게 지키는 자가 있습니다. 홍문록으로 말하자면 조명택(趙明澤), 오원(吳瑗), 윤득화(尹得和), 심성진과 소신 외에는 그 밖에 전원이 고집을 부리는 중에 있습니다. 지방에 있는 옥당을 승정원으로 하여금 각별히 재촉하여 올라오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리하라.”

하였다. 이주진이 아뢰기를,

“소신이 매양 신하들과 연락을 주고받은 일이 있습니다. 이름이 나온 자는 고집을 부리는 것이 괴이하지 않지만, 이름이 나오지 않은 자는 또 무슨 일로 고집을 부리기를 일삼습니까? 이정제(李廷濟)는 홍문록을 하고서 또한 가볍고 천하다는 배척을 받고도 오히려 공무를 행하였습니다. 현재는 염치를 지키는 것이 심하다고 할 만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아무개를 지적했으니, 달리 걸림돌이 될 단서가 없다.”

하였다. 신하들이 차례로 물러 나갔다.

[주-D001] 승상이 …… 없다 : 승상은 전진(前秦)의 왕맹을 가리킨다. 부견에게 등용되어 승상에 오른 뒤 호강한 귀족을 억제하고 농업을 중시하였다. 그의 아들 왕피가 태원(太元) 7년(382)에 가난을 모면하려고 모반에 가담하였다가 발각되었는데, 부견은 “승상이 임종하면서 경에게 10마리의 농우(農牛)를 주어 농사 밑천을 삼아 주라고 부탁하였고 그대를 위해 관직을 부탁한 적이 없었으니, 아버지만큼 자식을 잘 아는 자는 없다.”라고 하며 사면하였다. 《資治通鑑 卷104 晉紀》[주-D002] 채찍 …… 것 : 382년에 부견이 신하들을 태극전(太極殿)에 모이게 하고는 진(晉)나라를 토벌할 뜻을 보이니, 신하들이 반대하였다. 이에 부견은 “지금 우리 군대로 볼 때 채찍만 강에 던져 넣어도 충분히 흐르는 강물을 차단시킬 수가 있는데, 또 어찌 험고함을 믿을 수 있단 말인가. 이뿐만 아니라 길가에 집을 지으면 이설(異說)이 많아 완성될 날이 없을 것이니, 내 마음속에 결단하겠다.”라고 하였다. 《資治通鑑 卷104 晉紀》[주-D003] 진왕(秦王)의 …… 있겠는가 : 384년에 모용수가 연왕(燕王)에 올라, 전진(前秦)의 장락공(長樂公) 부비(苻丕)를 업성(鄴城)에서 포위하였다. 업성 안에 식량과 말꼴이 모두 떨어지자 모용수가 이르기를 “부비는 곤궁한 적이다. 반드시 항복할 리가 없으니, 후퇴하여 신성(新城)에 주둔해서 부비가 서쪽으로 돌아갈 길을 열어 주어 진왕(秦王)의 옛 은혜에 사례하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고는 포위를 풀고 신성으로 달려갔다. 옛 은혜는 369년에 모용수가 진(秦)나라로 도망쳐 왔을 때, 진왕 부견이 교외에서 맞이하여 그를 관군장군(冠軍將軍)으로 삼았던 일을 가리킨 것이다. 《資治通鑑 卷105 晉紀》[주-D004] 두루 잘 다스리고 : 원문은 ‘䌤綸’이다. 문맥에 근거하여 ‘䌤’를 ‘彌’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주-D005] 별장을 …… 일 : 383년에 전진의 부견이 침입하자 도성이 모두 놀라고 두려워하는 중에 효무제가 사안을 정토 대도독(征討大都督)에 제수하였다. 사안은 태연하게 수레를 몰고 산야(山野)로 나가서 벗들이 모두 모인 가운데, 자신의 조카인 사현(謝玄)과 함께 별장을 걸고 내기 바둑을 두고서 한밤중에야 돌아와 출정하였다고 한다. 《資治通鑑 卷105 晉紀》[주-D006] 진(晉)나라를 정벌하도록 : 원문은 ‘代晉’이다. 문맥에 근거하여 ‘代’를 ‘伐’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주-D007] 푸른 …… 돌렸는데 : 회제는 서진(西晉)을 건국한 무제(武帝)의 아들로 3대 황제이고, 민제는 회제의 조카로 서진의 마지막 황제이다. 회제는 흉노에게 포로가 된 후 치욕을 당하다 짐독에 의해 독살되었고, 민제도 흉노에게 포로가 되어 18세의 나이에 살해되었다. 313년 흉노(匈奴)인 한(漢)의 군주 유총(劉聰)은 포로가 된 회제에게 푸른 옷을 입고 연석(宴席)에서 술잔을 돌리게 하였다. 푸른 옷은 비천한 사람이 입는 옷이다. 또 이후 317년 유총은 회제를 이어 즉위한 민제에게 술을 따르고 잔을 씻게 하였으며, 옷을 갈아입고 일산을 쥐게 하였다. 《資治通鑑 卷88 晉紀, 卷90 晉紀》[주-D008] 덕을 …… 된다 : 원문은 ‘修德則舟中皆敵國’이다. 《사기(史記)》 〈손자오기열전(孫子吳起列傳)〉에 근거하여 ‘修’ 앞에 ‘不’을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전국 시대 위(魏)나라 무후(武侯)가 배를 타고 서하(西河)의 중류(中流)를 내려가다가 오기(吳起)를 돌아보고는 산천이 험고한 것이야말로 위나라의 보배라고 자랑하자, 오기가 “사람의 덕에 달려 있지, 산천의 험고함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통치자가 덕을 닦지 않으면 이 배 안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적국의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주-D009] 이 …… 죽이리라 : 당 태종이 조회를 마치고 위징을 지목하며 “이 고루한 시골 늙은이를 죽이리라.” 하였는데, 장손황후(長孫皇后)가 “임금이 현명하면 신하가 강직하다고 합니다.” 하니, 태종이 그 말을 듣고 노기를 가라앉혔다고 한다. 《資治通鑑 卷194 唐紀》 《新唐書 魏徵列傳》[주-D010] 왕필(王弼)과 …… 심하다 : 왕필과 하안은 모두 삼국 시대 위(魏)나라의 유학자이고, 범녕은 진(晉)나라 때 유학자이다. 범녕이 이르기를 “왕필과 하안의 죄가 걸주보다도 심하다.”라고 하니, 혹자가 말하기를 “폄하하기를 너무 지나치게 한다.” 하였다. 그러자 범녕이 말하기를 “왕필과 하안은 경전과 문헌을 멸시하고 인의(仁義)를 인멸시켜 근거 없는 말과 겉만 화려한 말로 후생들을 미혹시켰다. 그러므로 나는 생각건대 한 대의 재앙은 가볍고 역대의 재앙은 중하며, 자기 몸을 망친 죄악은 작고 무리를 미혹시킨 해악은 크다고 여긴다.” 하였다. 《資治通鑑 卷101 晉紀》[주-D011] 장성(長星)아 …… 권하노라 : 장성은 혜성(彗星)으로, 이 별이 나타나면 병란(兵亂)이 일어날 조짐이라고도 하고, 이 별이 왕자(王者)의 죽음을 주관한다고도 한다. 동진(東晉)의 효무제(孝武帝)가 일찍이 장성이 나타난 것을 보고는 마음속으로 매우 혐오한 나머지, 밤에 화림원(華林園)에서 술을 마시다가 술잔을 들어 장성을 향해 권하면서 말하기를 “장성아, 너에게 술 한 잔을 권하노라. 예로부터 그 어느 때에 만 년 동안 살았던 천자가 있었더냐?” 하였다. 《資治通鑑 卷108 晉紀》[주-D012] 형혹성(熒惑星)이 자리를 옮겼다 : 송 경공(宋景公) 때 어느 날 형혹성이 출현하여 송나라 분야(分野)를 지키고 있자, 경공이 우려하였다. 이에 사성(司星) 자위(子韋)가 그 책임을 재상에게 돌릴 수 있다고 하였으나, 경공은 “정승은 나의 팔과 다리 같은 자이다.”라고 하였고, 자위가 그 책임을 백성에게 돌릴 수 있다고 하였으나, 경공은 “임금은 백성이 없으면 임금이 될 수가 없다.”라고 하였고, 그 책임을 해[歲]에다 돌리라고 하니, 경공은 “흉년이 들어 백성이 곤궁하면 내가 누구의 임금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자위가, “하늘은 높지만 작은 말까지 듣습니다. 백성들의 임금이 될 수 있는 말씀을 세 번이나 하셨으니, 형혹성이 이동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과연 형혹성이 자리를 옮겼다고 한다. 《史記 宋微子世家》

 

 승정원일기 > 영조 > 영조 10년 갑인 > 6월 18일 > 최종정보

영조 10년 갑인(1734) 6월 18일(임술) 아침에는 쇄우가 오고 해 질 녘에는 맑음

10-06-18[26] 희정당에서 소대를 행하는 자리에 참찬관 정언섭 등이 입시하여 《춘추좌씨전》을 진강하며 조헌의 공렬을 기리고 후손을 등용할 것을 하교하고, 양역의 폐단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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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酉時)에 상이 희정당에 나아갔다. 소대를 하였다. 참찬관 정언섭(鄭彦燮), 시강관 김상성(金尙星), 검토관 유최기(兪㝡基), 가주서 허후(許逅), 편수관 권덕재(權德載), 기주관 노이형(盧以亨)이 입시하였다.

김상성이 일어났다가 엎드려 아뢰기를,

“어제도 읽을 범위에서 지나치게 나갔는데 오늘 또 그러하십니다. 강독하는 규범은 본디 많이 읽는 것을 욕심내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게다가 좌씨(左氏)의 글은 문장이 볼만할 뿐만 아니라 또한 거울삼을 만한 부분이 매우 많습니다. 대충대충 보고 지나치는 데에 그쳐서는 안 되지만 또 매우 더운 때에 오랫동안 강연에 임하는 것도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하고, 정언섭이 아뢰기를,

“입시한 신하로 하여금 읽게 하고서 들으소서. 바른 강연과 비록 다르지만 지금 극심한 무더위를 만나 성상의 체모가 피곤하실까 염려되기에 유신이 이렇게 우러러 진달한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처음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봤을 때에는 특별히 깊이 새길 문의가 없었기에 간혹 읽을 범위에서 지나치게 나갔으니, 유신이 아뢴 말이 옳다. 지금 이후로는 읽을 범위에서 지나치지 않겠다.”

하였다. 김상성이 아뢰기를,

“전(傳) 4년에 초 무왕(楚武王)이 마음이 흔들린다고 한 부분은 대개 평소에 혈기에서 나온 용기를 숭상하고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재숙(齋宿)할 때가 되어 이렇게 군대가 놀라서 흩어질까 하는 걱정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탕(蕩)’ 자는 방탕(放蕩)의 탕 자와 같은 의미인가?”

하자, 김상성이 아뢰기를,

“이는 쉽게 방탕하는 것입니다. 강함을 믿고 스스로 신중히 하는 뜻이 없으며, 군사를 믿고 반드시 이기겠다는 뜻만 있기에 마음이 홀연히 쉽게 방탕해져서 이와 같이 된 것입니다. 성인은 비록 걱정과 즐거움이 앞에 당면해도 그 마음이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역산(歷山)에서 밭을 갈고, 오현금(五絃琴)으로 남풍(南風)을 연주하던 순(舜) 임금의 마음이 자여(自如)하였습니다. 유리(羑里)에 구금되고, 기산(岐山)에 봉황이 날아와 울었던 문왕(文王)의 마음도 자여하였습니다. 비록 평범한 사람이라도 마음을 우선 바르게 한 뒤에야 일에 임할 수 있고 그릇되는 실수가 없게 됩니다. 하물며 제왕가의 다스리는 도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뢴 내용이 좋다.”

하였다. 유최기가 아뢰기를,

“전(傳) 6년에 등 기후(鄧祈侯)의 여러 생질이 초 문왕(楚文王)를 죽이려고 했던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등후(鄧侯)가 덕을 수양하도록 권면하지 않고 등후가 살인을 도모하도록 권면하였으니, 이는 스스로 수양하는 도리에 소홀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왕 노릇 하는 자는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도리에 대해 어두운 점이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범증(范增)이 항우(項羽)에게 패공(沛公)을 죽이도록 권한 것과 같다.”

하였다. 김상성이 아뢰기를,

“나라의 사방에 이웃 나라가 있는 것은 하늘에 육기(六氣)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하늘의 노여움을 두려워하여 몸을 닦고 허물을 반성하여 지극한 정성으로 상제를 대한다면 수한(水旱)과 풍상(風霜)이 재해가 되기에는 부족하고, 이웃 나라와 사귐에도 도가 있으니 신의로써 서로 믿는다면 강성한 이웃 나라의 포악한 도적도 스스로 감격할 것입니다. 저 세 조카는 비록 초자(楚子)가 등나라를 멸망시킬 것을 분명하게 알기는 했지만 덕을 수양해서 제압하는 방법은 알지 못하였고 그저 급급하게 제거하여 훗날의 화를 면하기를 도모하였으니, 매우 근본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뢴 내용이 옳다.”

하였다. 김상성이 아뢰기를,

“전 8년에 장공(莊公)이 이른바 ‘고요(皐陶)는 힘써 덕을 폈다.’라고 말하였으니, 옛것을 인용하여 스스로 경계한 뜻이 간절합니다. 그렇지만 제(齊)나라는 불공대천의 원수인데 이미 그와 내통하였고 또 그를 위해 일한 것은 패륜이 극악하니, 어찌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장공의 일은 말할 만한 것이 없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제나라의 무지(無知)가 그 임금 저아(諸兒)를 시해했으니, 부자의 필법이 엄정하다.”

하니, 김상성이 아뢰기를,

“이러한 부분은 천 년 이래로 난적을 두렵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제나라에 도가 없어 변란이 마침내 일어났지만 그 당시 임금을 위해 목숨을 바친 분여(紛如)와 맹양(孟陽) 같은 자들이 있었으니, 이는 참으로 기특합니다. 게다가 양공(襄公)을 숨겨 두고 문 안에서 싸우다 죽었던 도인(徒人) 비(費)로 말하면 진실로 타고난 충의(忠義)가 아니라면 어찌 천한 역인(役人)으로 이와 같이 할 수 있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것도 또한 후대에 두마음을 품은 자를 부끄럽게 하기에 충분하다.”

하였다. 유최기가 아뢰기를,

“전 10년에 조궤(曹劌)가 ‘충에 속한 일이다.’라고 말한 것은 실로 지극히 당연한 말입니다. 천하에서 가장 살피기 어려운 것은 옥사입니다. 한번 잘못 판결이 나면 당사자는 원통하고 괴로운 심정을 이루 다 말할 수 없고 또한 화합을 손상시키고 재앙을 불러들이는 단서가 되기에 충분합니다. 크고 작은 옥사는 반드시 실정으로 살펴야 하니 백성을 이롭게 하는 방도가 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고, 김상성이 아뢰기를,

“옛날에 자로(子路)가 위(衛)나라에서 혼란을 만났는데 살길을 가르쳐 준 사람이 있었습니다. 혼란이 안정이 되고 그에게 물어보니, 바로 자로가 읍재였을 때 월형(刖刑)을 당한 사람이었는데 대답하기를 ‘월형은 나의 죄이고 그대가 형벌을 시행할 때 움츠러드는 기색이 있었기에 내가 이 때문에 감격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옥사라는 것은 사람이 죽게 되는 일이니 옥사를 다스리는 자는 신중히 살피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모두 실정으로 살핀다면 형을 당하는 자가 원망하지 않아서 본디 죽을힘을 다해 사람을 얻는 효과가 생길 것입니다. 게다가 조궤는 한 시대의 일개 천민에 불과하지만 몸을 던져 스스로 드러내어 제나라 군대를 쫓아내는 공을 이루었습니다. 만일 조궤가 그 시대를 만나지 못했다면 무슨 수로 후대에 이름을 남겼겠습니까. 초야에 있는 인재가 등용되지 못한 경우는 예로부터 그래 왔습니다. 이는 마땅히 미루어 살펴 반드시 막혀 있는 인재를 드러내는 것을 임무로 삼아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뢴 내용이 좋다. 유사시에 벼슬에 있는 자와 더불어 계획을 세우는 것은 우리나라의 경우가 더욱 심하다. 옛날에는 바위 아래에서 구슬을 꿰는 자도 일을 도모할 충성을 지녔는데 지금은 비록 재능을 품고 도를 지니고서 이 세상에 뜻을 가진 자라고 해도 상소를 올리는 데 불과할 뿐이니 어찌 직접 나서서 스스로 드러내어 조궤처럼 하겠는가.”

하였다. 정언섭이 아뢰기를,

“임금께서 구중궁궐에 깊이 머물러 있으니, 비록 초야에 현사가 있다 해도 무슨 방법으로 그의 현명함을 알아서 천거하여 등용하시겠습니까. 삼가 먼저 조정에서 사람을 얻는다면 초야의 현명하고 재주 있는 이들은 천거하여 선발할 방도가 절로 있을 것이니, 또한 정성을 다하여 찾아내는 데 달려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늘 글의 의미로 인해 감회가 생겼다. 내가 마침 고 상신(相臣) 이정귀(李廷龜)가 지은 《항의신편(抗義新編)》을 보았다. 그 당시에 조헌(趙憲)은 이름이 드러나지 않았고 직질(職秩)도 낮았다. 그런데 나와서 의(義)를 위해 항거하여 마침내 700의사(義士)들과 함께 왜란에 달려가 순절하였다. 그 절의가 어찌 위대하고 빛나지 않겠는가. 노나라의 조궤는 일개 천민에 불과하였다. 당시 노나라 임금을 뵙기를 청하였다가 향인의 비난을 받기까지 하였으니, 누군들 제나라를 이기는 공을 달성할 줄 알았겠는가. 그러나 조헌이 성취한 것은 조궤에게 견줄 수가 없을 정도이다. 오래전의 사람에게 세상에 드문 감회를 느끼기보다는 차라리 우리 조정의 충신을 사모하고 숭상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조헌의 시호는 무엇인가?”

하자, 김상성이 아뢰기를,

“문열(文烈)은 그의 시호이고, 중봉(重峯)은 그의 호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봉은 어느 관직에 머물렀는가?”

하니, 정언섭이 아뢰기를,

“문열공은 어렸을 적에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와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벼슬하지 않았을 적에는 상소를 올려 논의를 바로잡다가 당시에 배척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벼슬에 나온 뒤로 교서관 정자가 되어 향실(香室)에 입직하였습니다. 그 후에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렸고 여러 차례 유배를 갔으니, 관직은 예조 좌랑과 전라 도사(全羅都事)에 불과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항의신편》 중에 고개를 넘어간다는 말이 있다. 고개라고 말한 것은 곧 어느 고개인가?”

하니, 정언섭이 아뢰기를,

“아마도 길주(吉州)로 유배되어 고개를 넘어가던 때의 일인 듯합니다. 옥천(沃川)에서 도보로 2000여 리인데 당시에 비록 채서산(蔡西山)이 다리에 피가 나도록 걸은 것처럼 하더라도 지나갈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임진왜란 이전에 필시 이미 왜구의 변란이 있을 것을 알고서 강개하여 상소를 올리고 마침내 의병을 일으켜 순절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승지가 호서와 호남을 다녀왔으니, 순절한 유적지를 알았는가?”

하니, 정언섭이 아뢰기를,

“금산(錦山)에는 전투에서 패망한 유허지가 있는데 700의사의 유골을 거두어 묻어 하나의 큰 무덤을 만들었고 곁에다가 비석을 세워 ‘순의비(殉義碑)’라고 이름하였습니다. 그리고 서원은 옥천에 있고 사적은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문열공의 행장에 자세히 실려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횡(田橫)의 500의사(義士)는 지난 역사에서 의롭게 여겼다. 그런데 조헌이 이끈 사람은 700명이나 되었고 한시에 목숨을 바친 자가 모두 초야에서 일어나 몸을 던져 나라를 위해 죽었으니 또한 전횡과 나란히 놓고 말할 수 없다. 예로부터 어찌 절의(節義)를 위해 순절한 사람이 없었겠는가마는, 어찌 일찍이 조헌처럼 공을 세운 자가 있었겠는가. 이 《항의신편》을 보고는 나도 모르게 감동하였다.”

하였다. 김상성이 아뢰기를,

“절의와 공렬을 표창하여 명성을 세워 주는 것은 바로 예로부터 성왕(聖王)의 급선무였기에 일찍이 선조(先朝)께서는 관원을 파견해서 치제(致祭)하게 하는 규례를 두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유신이 선조의 일로 진달하니 내가 참으로 감회가 있다. 특별히 예관을 보내어 문열공 조헌이 절의를 위해 순절한 유허지에 치제하되 선왕조의 전례대로 거행하며 제문의 경우 다른 지제교가 지어 올리지 못하게 하고 오늘 입시한 유신이 지어 올리도록 하라. 이미 문열공에게 사제(賜祭)하게 하였으니 칠백의총(七百義塚)에도 함께 제사 지내도록 하라.”

하였다. - 거조를 내었다. - 상이 이르기를,

“중봉 조헌은 자손이 있는가?”

하니, 정언섭이 아뢰기를,

“충성스럽고 현명하며 절의가 뛰어난 사람의 자손은 예로부터 으레 대부분 빛을 발하지 못하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문열공의 아들 한 명은 함께 순절하였고 그 뒤로 조광한(趙匡漢)이라는 자는 선조 때에 관직에 제수되었지만 이미 죽었습니다. 그의 자손이 옥천에 있을 적에 가난하여 스스로 보전하지 못하여 신축년(1721, 경종1)과 임인년(1722) 두 해에 거의 구걸하다시피 하다가 지금 현재 살아 있는 자는 적서(嫡庶)가 어느 곳에서 거주하는지 모르고 또한 약관을 넘은 자가 몇 사람인지 모르지만, 그중에 14, 5세쯤 되는 자가 현재 민 봉조하(閔奉朝賀)의 집에서 수학하고 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그 자손이 여전히 유학을 배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조(銓曹)에 분부하여 본도로 하여금 그 자손을 방문해서 적파(嫡派)와 지손을 막론하고 각별히 자리에 따라 녹용(錄用)하고 주(註)를 달아서 들이라.”

하였다. 유최기가 아뢰기를,

“조헌이 의를 떨쳐 순절한 것은 너무도 훌륭합니다. 그리고 역적 정여립(鄭汝立)이 역모 사건을 일으키리라고 미리 알았던 것으로 살펴보더라도 그의 사람됨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글을 보고 감회가 일어나 자손을 녹용하라는 하교까지 내리시니, 이것이 어찌 명성을 세워 주고 무너져 가는 세속의 도를 일으키는 방법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와 같은 승전(承傳)을 전조에서 쉽게 봉행(奉行)하지 못하고 있으니, 끝내 형식적인 일에 그치고 말까 두렵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과연 하번의 말과 같다. 이번 녹용은 다른 때와 다르니, 이는 특별히 거행하여 예전 문성공 자손을 녹용하라는 승전이 즉시 거행되지 못했던 폐단처럼 되지 않도록 하라.”

하였다. - 거조를 내었다. - 정언섭이 아뢰기를,

“의열(義烈)을 일으켜 세우는 것은 국가에 도움이 많이 됩니다. 지금 다행히도 성상의 생각에 감회가 일어나 문열공 자손을 녹용하라는 하교까지 내리시니 삼가 저도 모르게 매우 흠앙하고 찬탄하였습니다. 성상께서 그 사적을 자세히 알고 싶으시다면 선정신이 지은 행장을 한번 읽어 보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김상성이 아뢰기를,

“문열공의 문집 속에도 그 내용이 자세히 실려 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문집이 세간에 나와 있는가?”

하니, 김상성이 아뢰기를,

“있습니다. 그리고 옥당에도 있는 듯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옥당에 있다면 봉입하도록 하라.”

하였다. - 거조를 내었다. - 김상성이 아뢰기를,

“문열공 조헌의 충의와 절렬(節烈)은 예로부터 백 년 이래로 가장 뛰어나 여전히 사람들을 감동시켰고 성상께서는 글을 읽고 감회가 일어나 제사를 지내고 후손을 녹용하는 은전을 내리시어 영원히 명성을 세울 수 있게 되었으니, 실로 성상의 덕이 밝게 빛날 것입니다. 다만 신은 지손과 적파를 막론하고 각별히 거두어 녹용하라는 하교에 대해 삼가 구구한 소회가 있습니다. 조정에서 후손은 녹용하는 것은 본래 좋은 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사를 받드는 적장자 외에 다시 지파(支派)까지 녹용한다면 이는 길을 한번 터 주어 점차 은혜를 구하는 풍속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 조헌처럼 충의와 절렬이 저와 같이 우뚝한 자의 경우에는, 비록 격식을 벗어난 특별한 은혜를 내리더라도 또한 성왕께서 진작시키는 하나의 큰 정사가 되기에 충분합니다. 그렇지만 훗날 은혜를 구하는 자가 이 전례를 끌어다 인용하여 응당 행해야 할 법으로 삼지 않을 줄 또 어찌 장담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문성공의 자손을 녹용하는 일에 대해 일찍이 지손과 적파를 따지지 말고 녹용하라는 하교를 내렸다. 문성공과 문열공 두 사람의 경우는 다른 명현(名賢)과는 참으로 다르며 지손과 적파를 따지지 말고 녹용하라는 하교는 지금 두 번째이다. 나중에 이 예를 끌어다 사용하는 것이 아마도 이상한 일이 아니게 될 듯하다고 유신이 아뢴 내용이 참으로 옳다. 이번 하교와 유신이 아뢴 내용을 가지고 자세히 거조를 내되 문성공과 문열공 두 사람의 자손 이외에 다시 예를 끌어다 쓰지 않도록 각별히 신칙하도록 하라.”

하였다. - 거조를 내었다. - 김상성이 아뢰기를,

“전 11년에 장문중(臧文仲)이 ‘우왕(禹王)과 탕왕(湯王)은 자신에게 죄를 돌리더니 그 흥성함이 힘찼고, 걸왕(桀王)과 주왕(紂王)이 남에게 죄를 돌리더니 그 망함이 갑작스러웠다.’라고 말한 부분이 참으로 좋으니, 후대 왕이 거울로 삼을 만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장문중이 경전에 또 보이는가?”

하자, 유최기가 아뢰기를,

“《논어》에 있습니다.”

하였다. 김상성이 아뢰기를,

“전 14년에 부하(傅瑕)는 진실로 죄가 있었는데 선유들이 ‘원번(原繁)의 죄는 부하에 비하면 더욱 심하다. 만약 《춘추》의 필법으로 다스린다면 마땅히 원번이 먼저이고 부하가 나중일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른바 ‘사직에 주인이 있는데, 외국에 나가 있는 분에게 마음을 둔다면 이보다 더한 두마음이 어디 있겠습니까.’라고 말한 부분은 종묘와 사직의 존망을 돌아보지 않고 가운데 서서 주저하는 마음을 드러내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여공(厲公)의 말은 비록 잘못되었으나 원번의 말은 옳은 듯하다.”

하자, 김상성이 아뢰기를,

“외면으로 보건대 의리가 그럴듯합니다. 그러나 선유들의 판단이 엄정합니다.”

하니, 유최기가 아뢰기를,

“선유들의 의논이 또한 그를 허여한 점이 있습니다.”

하였다. 김상성이 아뢰기를,

“전 18년에 옥(玉) 5쌍과 말 3필의 상은 예의가 아니라고 말한 것은 타당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번영(繁纓)은 작은 물건인데도 공자께서 안타까워하셨으니 아마도 이 뜻과 같을 것이다.”

하였다. 김상성이 아뢰기를,

“전 19년에 육권(鬻拳)의 일은 신하가 임금에게 간언하는 도리는 마땅히 나에게 있는 정성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임금이 그 말을 따르지 않자 그를 병사로 대하였으니, 논할 것이 없습니다.”

하니, 유최기가 아뢰기를,

“좌씨가 임금을 사랑해서라고 일컬은 것은 그 말이 잘못되었고, 소주에 ‘신하의 법이 아니다.’라고 한 것이 타당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육권은 한 가지 일이라도 절실히 간언하는 정성이 없지 않았는데 이 일은 족히 신하의 난역(亂逆)하는 습관을 열어 줄 만하다. 옛사람들이 이른바 이윤(伊尹)의 마음을 가지는 것은 가하지만 이윤의 마음이 없다면 불가하다는 것은 바로 이런 부류이다.”

하였다. 정언섭이 아뢰기를,

“옛날 직언하는 신하 중에는 임금의 잘못을 굳건히 아뢰는 자는 있었지만 병사로 임금을 대하는 자는 듣지 못하였으니, 병사로 자기 임금을 대하는 자는 비록 난역이라고 하더라도 가할 것입니다.”

하고, 김상성이 아뢰기를,

“만약 곧장 난역이라고 이른다면 지나침을 면치 못하나 그 흐름의 폐단은 필시 장차 몰래 난역하게 될 것이니 성상의 하교를 살펴보면 참으로 적당하고 타당합니다.”

하고, 유최기가 아뢰기를,

“이는 전국 시대의 습성에서 나온 것인데 그 후로는 스스로 월형을 당하는 자와 자살하는 자는 심정을 스스로 밝힐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봉황이 날 때에 조화롭게 쟁쟁 운다.’라고 한 것은 문장이 좋다. 점치는 말의 징험함이 또한 기이하다.”

하니, 김상성이 아뢰기를,

“문장이 기이한 부분은 다만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그런데 복서(卜筮)를 인용한 것이 앞뒤로 하나가 아니니 가는 곳마다 기이하게 들어맞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옛사람들이 점치는 방법이 간혹 그렇기도 하지만 끝내 들뜨고 과장하는 습관이 상당합니다.”

하였다. 유최기가 아뢰기를,

“전 24년에 어손(御孫)이 ‘검약은 덕 중에 큰 것이고, 사치는 악 중에 큰 것이다.’라고 한 말은 매우 옳습니다. 또한 임금 된 자가 거울삼아 경계할 부분입니다.”

하고, 상이 이르기를,

“아래 장의 ‘남녀의 구별은 나라의 큰 예절이다.’라고 말한 부분도 이치가 있는 말이다.”

하였다. 강관이 마침내 책을 덮었다.

김상성이 나아와 엎드려 아뢰기를,

“신이 오랫동안 경연을 떠나 있었지만 근래에 연일 입시하였으니 어찌 아뢸 만한 말이 없겠습니까. 신이 지방 고을을 맡고 있을 때에 삼가 내려 주신 큰 가르침을 보았는데, 전하께서 지극정성으로 분발하시어 천지를 감동시키기에는 충분하였으니 우리나라가 잘 다스려질 희망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입니까. 그렇지만 간혹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 견고하지 못할까 하는 걱정에 염려되었습니다. 외람되이 강연에 참석하여 친히 하교를 받들었는데, 전하께서 다스리는 방도를 구하는 마음이 오늘날까지도 혹여 조금도 해이해지지 않으셨으니, 비록 매우 힘들고 매우 막힌 운세를 만나더라도 어찌 평안한 다스림을 만들지 못할까 걱정하겠습니까. 이 마음을 넓히셔서 훌륭한 일을 하는 사이에 드러내셔야 할 따름입니다. 지금 뭇사람이 전하께 우러러 바라는 점은 일시적으로 구차하게 미봉하는 계책에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삼가 보건대, 근래에 강독은 부지런히 하시지만 체득하는 공효는 미처 보지 못하였고 인접(引接)은 비록 자주 하지만 우선 떨치고 새롭게 일어나는 정사가 없으시니, 한결같이 평범하여 전날의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전하께서 총명하고 지혜로워 덕을 갖추고 계시지만 엄하고 굳센 부분이 부족하니, 모든 일 또한 임시변통으로 처리하는 병통이 있습니다. 이러한 병통은 단칼에 잘라 버려 맑은 하늘의 밝은 달처럼 티끌 하나 남기지 않는다면 국가는 매우 다행일 것입니다. 신은 항상 우리 임금을 요순과 같은 임금이 되게 하려는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감히 이렇게 우러러 아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방 고을을 다스릴 때에 아뢴 상소를 내가 이미 가상하게 여긴다. 그런데 지금 아뢴 내용을 들으니, 또한 지성스러운 충심과 사랑에서 나온 것이므로 각별히 유념하겠다.”

하였다. 김상성이 아뢰기를,

“근래에 호랑이가 인명을 살상하였다는 장계가 계속 이르니 매우 놀랍습니다. 그런데 헌납 이광도(李廣道)의 소본(疏本)을 보니 더욱 놀랍고 참담하기 그지없습니다. 그 상소에 ‘지난해에 광양현(光陽縣)의 굶주린 백성 하나가 그의 어린 자식 둘을 데리고 넉넉히 사는 족인에게 가서 구걸하였는데, 혹 양역(良役)에 편입될까 두려워 스스로 거세하기까지 하였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대간의 상소에서 이와 같이 논하였으니 거짓이 아닌 듯하고 허실이 어떠한지를 막론하고 이목(耳目)을 담당하는 관리가 이미 상소에 표출하였으니, 조정에서는 놀랍고 측은해하며 가엽게 여기는 도리를 보이셔야 합니다. 양역의 피해는 심지어 어린아이까지도 스스로 거세하게 하였으니, 백성을 사랑하는 정사를 손상시키는 정도가 어떠하겠습니까. 성왕(聖王)께서 한 남자나 한 여자를 자신이 밀쳐 구렁텅이에 빠뜨린 것처럼 생각한 도리로 볼 때, 마땅히 진념하여 구휼하는 방도를 행해야 하므로 감히 이렇게 우러러 아룁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근래에 풍문으로 전해지는 말은 간혹 떠도는 폐단이 없지 않지만 지난번에 대간의 상소를 보고 참으로 참담하였다. 그러나 이는 수령에게 달려 있기 때문에 우선 내버려 두었다. 지금 유신이 아뢴 내용이 또 이와 같으니, 도신으로 하여금 각별히 조사해서 즉시 계문하도록 하라.”

하였다. - 거조를 내었다. - 신하들이 드디어 물러 나갔다.

[주-D001] 오현금(五絃琴)으로 …… 임금 : 순(舜) 임금이 오현금을 만들어 〈남풍가(南風歌)〉를 지어 부르면서 “훈훈한 남쪽 바람이여, 우리 백성의 수심을 풀어 주기를. 제때에 부는 남풍이여, 우리 백성의 재산을 늘려 주기를.”이라고 했다는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禮記 樂記》[주-D002] 등 기후(鄧祈侯)의 …… 것 : 초 문왕이 신국(申國)을 토벌하러 갈 때 등(鄧)나라를 지났는데, 등의 기후(祈侯)가 생질들과 함께 문왕을 머무르게 하고는 연회를 베풀어 접대하였다. 추생(騅甥), 담생(聃甥), 양생(養甥)이 초자(楚子)를 죽이라고 요청하였으나 등후가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초자가 돌아오던 해에 등나라를 토벌하였고, 노 장공(魯莊公) 16년에 초자가 다시 등나라를 토벌하여 멸망시켰다. 《春秋左氏傳 莊公6年》[주-D003] 범증(范增)이 …… 것 : 유방(劉邦)이 진(秦)나라의 서울인 함양(咸陽)을 함락시켜 함곡관(函谷關)을 지켰는데, 얼마 뒤에 항우가 홍문(鴻門)에 주둔하였다. 장량이 항백(項伯)과의 만남을 주선해서 홍문에서 잔치를 열고 항우와 유방이 함께 술을 마셨는데, 연회 도중에 범증이 항장(項莊)에게 명하여 유방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러자 항백이 일어나서 칼춤을 추면서 몸으로 유방을 가렸고, 최후에는 번쾌(樊噲)가 칼을 들고 뛰어들어 혼란을 일으켜 시간을 벌어 주자 유방은 그 틈을 타서 무사히 탈출하였다. 《史記 項羽本紀》[주-D004] 육기(六氣) : 여섯 가지의 기운으로, 곧 음(陰), 양(陽), 풍(風), 우(雨), 회(晦), 명(明)을 말한다.[주-D005] 제나라의 …… 엄정하다 : 《춘추좌씨전》 장공 8년 기사에 “겨울 11월 계미일에 제(齊)나라 무지가 그 임금 저아를 시해하였다.”라고 하고는 소주에 “무지라고 신하의 이름을 칭한 것은 신하의 죄임을 드러낸 것이다.”라고 하였기 때문에 부자의 필법이 엄정하다고 한 것이다. 《春秋左氏傳 莊公8年》[주-D006] 제나라에 …… 있겠습니까 : 《춘추좌씨전》 장공 8년 겨울 12월에 제나라 양공이 사냥 나갔다 돌아왔는데, 사냥 나갔다가 잃어버린 양공의 신발을 찾지 못한 도인 비가 채찍을 맞고 궁문을 나가다가 궁으로 쳐들어오는 반란군과 만났다. 도인 비가 채찍질당한 등을 보여 주며 반란군의 신임을 받고서 다시 궁으로 들어와 양공을 숨겨 주었다. 그 후 반란군과 싸우다 죽었고, 분여는 섬돌 밑에서 죽었고, 임금 대신 자리에 앉아 있던 맹양도 죽었다. 《春秋左氏傳 莊公8年》[주-D007] 바위 …… 자 : 제(齊)나라 재상 전단(田單)이 치수(淄水)를 건널 때 추워하는 노인을 보고는 자기 갖옷을 벗어서 입게 하자, 양왕(襄王)이 그가 인심을 크게 얻어 왕위를 잃게 될까 두려워하여 전단을 죽이려 하였다. 그러자 바위 아래에서 구슬을 꿰던 자가, 전단의 선행을 표창하여 백성들의 고통에 관심을 갖는 것이 바로 양왕의 뜻임을 알게 하라고 진언하였다. 《資治通鑑 卷1 周紀 赧王中》[주-D008] 이정귀(李廷龜)가 지은 항의신편(抗義新編) : 《항의신편》은 의병장 조헌(趙憲)의 유문(遺文) 및 행록(行錄)을 수록한 책으로 안방준(安邦俊)이 편찬하고, 이정귀가 서문을 지었는데, 영조가 착각한 듯하다.[주-D009] 채서산(蔡西山)이 …… 것 : 서산은 송나라 학자 채원정(蔡元定)의 호이다. 그가 위학(僞學)으로 몰려 도주(道州)로 귀양 갈 때 3000리 길을 도보로 갔는데, 적소(謫所)에 도착하고 보니 발꿈치가 온통 피투성이였던 것을 가리킨다. 《宋史 儒林列傳 蔡元定》[주-D010] 전횡(田橫)의 500의사 : 전횡은 전국 시대 제(齊)나라 왕 전영(田榮)의 아우이다. 제나라의 왕이 되었으나 한나라 고조(高祖)가 황제에 오르자 무리 500여 명을 거느리고 바다 가운데 섬으로 들어갔다. 그 후에 고조의 부름에 응하였으나 가는 중에 자살하자 그 무리도 모두 자살하였다. 《史記 田橫列傳》[주-D011] 문성공 …… 폐단 : 1733년(영조9) 11월 28일 기사 내용에, 문성공(文成公)의 자손에게 관직을 제수하는 명을 내렸는데, “봉사손 이연(李綖)은 얼마 전 죽었고, 이연의 아들 이진오(李鎭五)는 접때 부 참봉(部參奉)에 제수되었다가 일 때문에 즉시 체차되어 지금은 초야에 있습니다.”라고 한 내용으로 보아 그때까지 제수된 자손이 없었던 듯하다. 《承政院日記 英祖 9年 11月 28日》[주-D012] 논어에 있습니다 : 《논어》 〈공야장(公冶長)〉과 〈헌문(憲問)〉에 장문중(臧文仲)과 관련된 내용이 보인다.[주-D013] 전 …… 있습니다 : 《춘추좌씨전》 장공 14년에 “정(鄭)나라 여공(厲公)이 정나라의 도성을 침략하기 위해 가다가 대릉(大陵)에 이르러 부하(傅瑕)를 만났는데, 부하가 자기를 놓아준다면 여공이 다시 임금의 자리에 오르도록 주선하겠다고 하자, 여공은 그와 맹약하고서 놓아주었다. 나중에 부하가 정자(鄭子)와 그의 두 아들을 죽이고 여공을 임금으로 맞아들였다. 여공이 후에 부하를 죽이고는 임금에 대해 두마음을 품지 않은 자들에게 상을 주겠다고 원번과 상의하려고 하자, 원번이 ‘자기는 대대로 종묘를 지키는 신하로서 사직에 주인이 있는데, 외국에 나가 있는 분에게 마음을 둔다면 이보다 더한 두마음이 어디 있겠습니까.’라고 하고는 자결하였다.”라고 한 내용이 보인다.[주-D014] 전 …… 것 : 《춘추좌씨전》 장공 18년에 “괵공(虢公)과 진후(晉侯)가 주왕(周王)에게 조현(朝見)하니, 주왕이 단술을 대접하고 그들에게 폐물(幣物)을 내리라고 명하여 두 사람 모두에게 옥(玉) 5쌍과 말 3필(匹)씩을 하사하였으니 예가 아니다. 후(侯)에게 공(公)과 똑같이 준 것이 바로 신분에 맞지 않은 예를 베풀어 준 것이다.”라고 한 내용이 보인다.[주-D015] 육권(鬻拳)의 일 : 초자(楚子)가 파군(巴軍)을 방어하다가 진(津)에서 대패하고 파인(巴人)의 공격을 막다가 도리어 파인에게 패했을 때, 육권이 성문을 닫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초자는 어찌 할 수 없어 발길을 돌려 드디어 황국(黃國)을 토벌하였다. 당초에 육권이 초자에게 강력히 간언하였으나 초자가 따르지 않자, 무기를 들고 위협하니 초자는 겁이 나서 그의 말을 따랐다. 그러자 육권은 “내가 무기를 들고 임금에게 겁을 주었으니 이보다 큰 죄는 없다.”라고 하고는 스스로 두 발을 잘랐다. 《春秋左氏傳 莊公19年》[주-D016] 지방 …… 때 : 1732년(영조8) 8월 7일에 김상성을 부평 부사(富平府使)로 삼았다. 《承政院日記 英祖 8年 8月 7日》[주-D017] 헌납 …… 보니 : 이광도가 이달 13일에 올린 상소를 가리킨다. 《承政院日記 英祖 10年 6月 13日》[주-D018] 성왕(聖王)께서 …… 때 : 《맹자》 〈만장 상(萬章上)〉에 “이윤은 천하의 백성 중에 한 남자나 한 여자라도 요 임금과 순 임금의 혜택을 입지 못한 자가 있으면 마치 자기가 그들을 밀쳐 구렁텅이에 빠뜨린 것처럼 생각하였다.[伊尹 思天下之民 匹夫匹婦 有不被堯舜之澤者 若己推而內之溝中]”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