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금 태조 선계는 양산 (梁山)출생,원(元) 세조 그 후예로 평산(平山)에서 났다. 일찍이 이 일을 기록한 것이 있었다.

믿음을갖자 2023. 3. 15.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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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설림초고(五山說林草藁)

오산설림초고(五山說林草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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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천로(車天輅) 찬

 

○ 서울 안에 한 선비가 있었는데, 집이 남산 아래에 있었다. 동산 가운데는 바위틈에서 나오는 샘이 맑고 차가웠으며, 또 오래 묵은 밤나무가 있기 때문에, 이름을 ‘율정(栗亭)’이라 하였고 그 집이 이 정자로 유명해졌다. 어느 날 이름난 친구 5ㆍ6명이 그 집에 모여 고회(高會 모임을 높여서 하는 말)를 가졌다. 이 가운데 높은 벼슬을 가진 사람이 말하기를, “내 집은 서울 가까이 있는데, 지대(池臺)가 그윽하고 뛰어납니다. 그대의 이 집과 바꾸려 하는데, 어떻소.” 하자, 주인은 고개를 좌우로 설레설레 흔들며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내 별장까지 더 드리겠소.” 했지만, 또 승낙하지 않았다. 그러자 다른 사람이 또 주인에게 말하기를, “악양루(岳陽樓)에다 덤으로 천하의 반을 덧붙여서 주면, 주인은 허락할 수 있겠소.” 하였으나, 주인은, “안 될 말이오.” 하였다. 옆에 있던 사람이 말하기를, “이만하면 장사가 잘된 셈인데, 주인은 왜 허락하지 않으시오.” 하자 마침내 모두들 한바탕 웃었다. 상국(相國) 용재(容齋 이행(李荇)의 호)가 이 말을 듣고, 그를 위하여 시 한 구절을 지었다.

한 골짜기에 천하의 절반을 더하는 값을 오래도록 지니고 있으니 / 一壑久傾天下半
율정을 어찌 악양루와 바꾸랴 / 栗亭寧換岳陽樓

하였다. 그 사람이 죽은 다음 용재는 이 구절에다 한 구절을 더 지어 절구로 만들어 만가(挽歌)로 하였는데, 지금 문집 속에는 이 말이 전해지지 않으니, 또한 안타까운 일이다,

○ 최표(崔豹 진(晉) 나라 사람. 자(字)는 정능(正能))의 《고금주(古今注)》에, “〈공후인(箜篌引)〉은 조선(朝鮮)의 진졸(津卒) 곽리자고(霍里子高)의 아내 여옥(麗玉)이 지은 것이다. 자고가 새벽에 일어나 배를 저어 가는데, 한 백발이 성성한 미친 늙은이가 머리를 풀어 헤치고 손에는 술병을 든 채 물에 뛰어들어 난류(亂流)를 헤치며 건너가니, 그 아내가 따라오면서 가지 말라고 소리쳤으나. 미처 손쓸 사이도 없이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그 아내가 공후(箜篌)를 잡아당겨 타며 부른 것이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이다. 그 소리가 대단히 슬펐는데, 이 곡을 끝마치자, 그 아내도 물에 몸을 던져 죽고 말았다. 곽리자고가 돌아와 그 소리를 아내에게 말해 주니, 하내 여옥(麗玉)이 슬피 여겨 공후로 그 소리를 묘사했는데, 이 소리를 듣는 사람은 눈물을 흘리면서 울지 않는 자 없었다. 여옥은 이 소리를 가지고 이웃집 여자 여용(麗容)에게 전하였는데, 이름을 ‘공후인(箜篌引)’이라 하였다.” 했는데, 조선진(朝鮮津)을 고찰해 보면, 지금의 대동강(大同江)이다. 그런데, 이태백의 〈공무도하〉에,

황하가 서로 흘러와 곤륜을 터놓았으니 / 黃河西來決崑崙
만 리를 울부짖어 용문에 와서 부딪치누나 / 咆哮萬里觸龍門

하였으니, 비록 시인의 말이라고 하더라도, 일로 하여금 실(實)을 잃어버리게 하였으니, 법 받을 것이 못 된다.

○ 《맹자》에, “어른을 위하여 절지(折枝)한다.”란 말이 있는데, 송자(宋子)는 이에 주하기를, ‘초목의 가지를 꺾는 것이다.’ 하였다. 《문선(文選)》의 〈광절교론(廣絶交論)〉을 고찰해 보면, ‘포복위이절지저치(匍匐逶迆折枝舐痔)’ 주에, 조기(趙岐)의 《맹자(孟子)》주를 인용하여서 해석하기를, ‘가려운 데를 긁는 것이다.’ 하였다. 《예기(禮記)》‘경앙소지(敬仰搔之)’ 주에, ‘절지(折枝)는 가려운 데를 긁는 것이다.’ 하였다. 명 나라 사람도 이에 대하여 변론한 사람이 있다.

○ 두시(杜詩)에,

비파는 나무마다 향기롭다 / 枇杷樹樹香

고 한 시구에 대해 해설하는 사람들이 ‘비파는 향기가 없다’고 하였는데 이는 잘못이다. 내가 일본에 갔을 때, 어느 옛 절에서 비파나무 한 그루를 보았는데, 대단히 무성하였고 키가 몇 길이나 되었다. 아래의 잎은 크고 둥글며, 위의 잎은 길쭉하고 약간 작아 모양이 북나무 잎 같았다. 10월에 꽃이 활짝 피는데, 모양은 배꽃 같고, 향기가 매우 진하여 바람이 없어도 멀리 퍼졌다. 늙은 중에게 물어 보니, ‘노귤(盧橘)’이라 하였다. 겨울에 열매가 나서 여름 5월달이 되어서야 익는다. 당시(唐詩)에,

노귤꽃이 피니 신나무 잎이 쇠했다 / 盧橘花開楓葉衰

하였고, 또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상림부(上林賦)〉에도,

노귤이 여름에 익는다 / 盧橘夏熟

라고 하였는데, 참으로 그러하다.

○ 산곡(山谷 중국의 시인 황산곡)에게 〈수선화(水仙花)〉라는 시가 있는데, 나는 무슨 꽃인지 몰랐었다. 일본에 한 가지 풀이 있는데, 10월에 처음 나고 잎은 가란(假蘭) 같은데, 키가 두어 자나 되었다. 11월에 꽃이 활짝 피는데 흰 빛이다. 12월에 꽃이 떨어지고, 1월에 줄기가 마르고, 2월에는 말라 죽는다. 중에게 이 풀의 이름을 물었더니, ‘수선화(水仙花)’라 하였다.

○ 삼신산(三神山)은 모두 바다 가운데 있다. 연 소왕(燕昭王) 때부터 방사를 보내 찾았으나, 찾지 못하였고 진시황(秦始皇)이 서불을 보내서 남녀 3천을 싣고 가서 불사약을 구하게 하였으나, 또 찾지 못하였는데, 매양 바람이 배를 휘몰아 간 것으로 해석하였다. 오피(伍被)는 말하기를, “서복(徐福)이 단주(亶州)에 이르러 평원과 넓은 못을 얻고 왕불래(王不來)에 머물렀다.” 하였는데, 곧 지금의 일본이다. 두시(杜詩)에,

방장은 삼한 밖이다 / 方丈三韓外

란 구절이 있는데, 해설하는 사람들은 삼신산이 모두 우리 나라에 있는 것으로 여겨, 방장(方丈)은 지리산(智異山)이라 하고, 영주(瀛洲)는 한라산(漢拏山)이라 하고, 봉래(蓬萊)는 바로 금강산(金剛山)이라 한다. 내 생각으로는, 한라산은 바다에서 솟아 나왔고, 당 나라 때에는 일본의 부사산(富士山)이 높이가 4백 리요, 겨울 여름 할 것 없이 눈이 있다고 알려졌으니, 이것이 영주산이 아닐까. 그러나 《열자(列子)》〈귀허편(歸墟篇)〉에, “다섯 산이 있는데, 여섯 자라가 이것을 이고 있었다. 용백국(龍伯國)의 사람들이 자라를 낚은 뒤로는 이 다섯 산이 물결을 따라 오르내려 대여(岱輿)와 원교(圓嶠) 두 산은 표류하여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 다만 봉래ㆍ방장ㆍ영주 세 산만이 처음으로 뿌리를 박았다.” 하였으니, 세 산은 동해 대황중(大荒中)에 있는 것이요, 우리 나라에 있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 당(唐) 나라의 모란은 서촉(西蜀)으로부터 왔는데, 측천무후(則天武后) 때에 비로소 중국에 성하였다. 명황(明皇) 초년에 나라 금중(禁中)에 심었는데, 소위 ‘목작약(木芍藥)’이란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도 많이 심었으나 일찍이 덩굴로 나는 것은 없었다. 함경도(咸鏡道) 경흥(慶興) 땅에 바로 덩굴로 난 모란이 있는데, 식자들은 생각하기를, 금(金) 나라의 황룡부(黃龍府)는 경흥 땅과의 거리가. 6ㆍ7일의 일정 밖에 걸리지 않는다. 금 나라 사람이 송 나라의 간악(艮岳) 화목(花木)을 다 옮겨다 황룡부에 심었다는데 이것이 그 종자라고 여긴다. 또 고찰해 보면, 송경(松京 지금의 개성임)에 진봉산(振鳳山)이 있는데, 도성(都城)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몇 리 안 가서 옛 절터가 있는데, 돌틈에 덩굴로 나는 모란이 있다. 붉은 것과 흰 것이 서로 섞여 나와 돌 위에 뻗었는데, 사람들이 옮겨다 심으려고 해도 그 뿌리가 돌 사이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캐어 내지 못한다. 산불이 나서 매양 이 모란을 태우지만, 죽지 않는다.

○ 《사기》〈진승상세가(陳丞相世家)〉에, ‘사왈주신(謝曰主臣)’이란 말이 있는데, 장안(張晏)이 주하여 말하기를, “오늘날 남에게 사례하면서, ‘황공(惶恐)합니다.’ 라고 하는 것과 같다.” 하였다. 마융(馬融)의 〈용호부(龍號賦)〉에.

용맹 있는 자나 겁장이가 보더라도 / 勇怯見之
주신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 莫不主臣

하였고, 〈풍당전(馮唐傳)〉을 고찰해 보면, 또한 ‘주신’이란 말이 있다. 한문공(韓文公)의 〈평회서비(平淮西碑)〉에, “내외를 막론하고 모두 주(主)요, 모두 신(臣)이다.” 하였는데, 이 말을 쓴 것이다. 그러므로 《운부군옥(韻府群玉)》에서 신(臣) 자에 대해 이것을 인용하였다.

한문공(韓文公)의 〈서언왕묘비(徐偃王廟碑)〉에, 언왕탄당국(偃王誕當國)이라는 말이 있는데, 읽는 사람들이 모두 탄(誕) 자에 와서 글귀를 끊어 탄을 언왕(偃王)의 이름으로 여긴다. 이것은 방회(方回)의 잘못을 답습한 것이니, 방회가 《영규율수(瀛奎律髓)》주에 있어서 서언왕의 이름은 탄(誕)이라 하였다. 이것은 바로 한문공의 비문을 보고 그것을 이름으로 오인한 것이다. 《박물지(博物志)》를 상고해 보면, 서(徐) 나라 궁인(宮人)이 잉태하여 알을 낳았다. 상서롭지 못한 것으로 생각하여 물가에 내다 버렸다 외로운 홀어머니가 곡창(鵠蒼)이란 개를 길렀는데, 곡창이 버린 알을 물고 돌아왔다. 덮어서 따뜻하게 하였더니 바로 어린애가 나왔는데 궁인이 듣고 다시 가져다 길렀다. 자라서 가계를 이어 받아 서군(徐君)이 되었다. 뒤에 곡창(鵠蒼)이 죽을 때 뿔이 나오고 꼬리가 아홉이 되어 황룡(黃龍)으로 변화하였는데, 곡창을 혹은 후창(后蒼)이라 한다. 시자(尸子)는 말하기를, “서언왕(徐偃王)이 힘줄은 있으나 뼈가 없다”고 하였는데, 배인(裴駰)이 말하기를 “언(偃)이라고 이름한 것은 이 때문이다.” 하였다. 이것으로 본다면, 언은 바로 그 이름이다. 또 한문공이 비문을 지을 때 일찍이 그 사람의 이름을 바로 가리켜 쓰지 아니하고, 반드시 ‘휘(諱)는 아무 자(字)는 아무’라 하였다. 이제 언왕의 비문을 지으면서 바로 가리켜 ‘언왕탄’이라 한다면, 서□부(徐□夫)는 바로 언왕의 후세손인데, 어찌 남의 선조를 위하여 비문을 지으면서 그 이름을 휘(諱)하지 않겠는가. 내 생각에는 탄(誕) 자는 시서(詩書)의 ‘탄수궐명(誕受厥命)’의 탄(誕)과 탄치지한빙(誕寘之寒氷)의 탄 자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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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맏형님의 휘는 은로(殷輅)이다. 5세 때부터 글을 잘 지어 신동으로 이름을 날렸다. 상공(相公) 한규(韓㞳)가 강화 유수(江華留守)가 되었는데, 그때 선군께서는 성균관의 직강(直講) 벼슬을 그만두고 집에 돌아와 계셨다. 맏형께서 겨우 아홉 살 되던 해, 어쩌다가 기와 조각 던진 것이 잘못되어 남의 집 장독에 떨어졌다. 이웃 사람은 누구의 짓인지 알지 못하고 불손한 말로 욕을 했다. 맏형은 이것을 듣고 그 사정을 하나하나 유수에게 호소했다. 유수는 잘 생긴 어린이가 뜰에 들어섬을 보고, 물어서 직강 집 아들임을 알게 되자, 앞으로 나오라고 하여 묻기를, “너는 시를 지을 수 있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겨우 운이나 맞출 줄 압니다.” 하였다. 이때에 가뭄이 심하였으므로, 유수가 민우시(悶雨詩)를 짓도록 명하고 운(韻)자를 천(天) 하고 불렀다.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대답하기를,

구름발이 공연히 하늘을 가렸네 / 雲霓空蔽天

하니, 또 전(田) 자를 가지고 짓도록 명했다. 대답하기를,

거북 등에 마른 논이 갈라졌네 / 龜背坼乾田

하였다. 또 연(年) 자를 가지고 지으라 하니,

노나라에서 무당을 불태우던 날이요 / 魯國焚巫日
은나라 탕 임금이 손톱 깎던 해일세 / 成湯剪爪年

하니, 유수가 무릎을 치며 칭찬하였다. 처음에는 사운(四韻 네 구로 된 율시임)을 짓도록 명하고자 했으나 서너 구절을 보더니, 곧 그만두었다. 아마도 재주를 세상에 알리고 싶지 않아서였으리라. 이어서 불러들여 약과와 음식을 먹이는 동시에, 지ㆍ필ㆍ묵도 내주었다. 그리고 그 이웃 사람을 불러다 매를 때렸다. 그 뒤 한공(韓公)이 아버지께 말하기를, “그대 아들의 재주가 매우 기특하니 꼭 숨기시오. 시를 지어서 여러 사람에게 보이지 마시오. 내 손녀를 시집보내리다.” 하였다.

○ 우리 집 맏형은 어렸을 때부터 뛰어난 재주가 있었다. 열 살 전에 고문(古文)과 《운부군옥(韻府群玉 시 짓는 데 쓰여 지는 참고서)》를 읽어 시학(詩學)이 대성되었다. 항상 입 안에서는 글 외는 소리가 흥얼거렸다. 열여섯 살에 경기우도(京畿右道)의 향시 진사 초시(鄕試進士初試)에 합격하였으나, 회시(會試)에는 병으로 나가지 못하였다. 나이 열일곱 되던 병진년(丙辰年) 7월 29일에 경성 제생원동(濟生院洞)에 있는 남의 집에서 죽었다. 선군께서 지으신 〈삼몽부합전(三夢符合傳)〉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선군께서 고향 친구 10여명과 계를 맺었는데, 맏형께서 시를 짓기를,

오백년 도읍 터는 으뜸가는 고을이요 / 五百王都第一州
선비들 계 닦으니 가장 좋은 놀음일세 / 儒林脩禊最佳遊
3월엔 들풀 밟아 긴 낮을 보내고 / 踏靑三月消長晝
9월엔 국화 띄워 늦은 가을 읊조리네 / 泛菊重陽詠晩秋
굽이진 물에 잔 띄우니 부러울 게 무엇이며 / 曲水流觴何足羨
용산에서 모자 날리니 이에 짝할쏜가 / 龍山落帽亦難儔
삶을 누리고 죽음을 맞으매 유감없이 하세 / 養生送死當無欠
사람의 한 세상엔 기쁨과 슬픔 다 있나니 / 做得人間樂與憂

하였다. 맏형께서 행서(行書)를 잘 쓰시어 당신이 손수 쓰신 것만 하여도 무려 수십 권이 되는데, 나도 그것을 얻어 읽었다.

○ 상공(相公) 윤춘년(尹春年)은 아버지와 계묘년(癸卯年)에 같이 과거에 합격하였다. 시를 감상하는 눈이 있었는데, 선군께서 지으신 율시 한 수를 보고 말하기를, “그대는 성당시(盛唐詩)를 읽었으되, 그 가운데에서도 필시 노두(老杜 두자미의 별칭)를 읽었을 것입니다.” 하였다. 선군께서, “그렇습니다. 지금 두시에 힘쓰고 있습니다.” 하였다. 그 시에,

강을 건너기는 풀 길을 따르고 / 渡江緣草徑
취함을 타서 강성에서 잠자네 / 乘醉宿江城
흰 달은 봉우리마다 비치고 / 白月千峯照
봄 두견은 홀로 밤에 우누나 / 春鵑獨夜鳴
물 마을에 돌아가는 꿈을 깨니 / 水村歸夢罷
두메 어귀에 나그네 넋이 놀라네 / 山郭旅魂驚
소쩍새 봄 마음을 위탁하니 / 望帝春心托
외로운 신하 괴로운 정 한결 더하네 / 孤臣再拜情

하였다. 그 뒤 당(唐) 나라 때의 고취(鼓吹 군대 행진곡) 곡조를 읽고 시를 지어 보이니, 윤공이 말하기를, “이것은 만당(晩唐) 냄새가 풍깁니다. 반드시 당시의 고취 곡조일 것입니다.” 하였다. 선군이 또 두시(杜詩)를 읽으셨는데, 윤공이 지은 시를 보고, “이건 또 성당(盛唐) 음률이 있는데, 반드시 두율(杜律)을 읽었을 것입니다.” 하여, 말하는 것마다 모두 들어 맞았다. 이에 선군이 그에게 경복(敬服)하였다. 이내 선군께서 시를 보냈는데 그 시에,

시문에 나아가 시험 삼아 한 번 들어 보면 / 欲詣詩門試一聽
힘써 다듬은 곳에 스스로 영감이 살아 나오리 / 功夫着處自生靈
맑은 하늘 해와 달 낱낱이 비추고 / 靑天日月昭昭影
넓은 땅과 산천을 샅샅이 그려 / 大地山河歷歷形
봄기운 무르녹아 만물이 피어나고 / 春氣和融陶萬物
센 물결 늠실거려 바다를 뒤흔드네 / 波濤洶湧起滄溟
이름을 만고에 남김이 어려운 일 아니요 / 留名萬古非難事
온 세상이 어두울 때 나 홀로 깨어 있네 / 擧世沈冥也獨醒

하였다.

○ 고려 왕씨는 부처를 섬기기를 매우 공손히 하였다. 도성 내에 이름난 절이 3백 개나 되었는데, 그 가운데 연복사(演福寺)가 가장 커 5층 불전이 높이 하늘에 치솟아, 영광(靈光)이 우뚝 홀로 있는 것 같았다. 이건(李楗) 공이 유수(留守)로 있을 때, 사위를 맞이하기 위하여 비둘기를 잡게 하였더니, 관인이 횃불을 들고 올라가 잡다가, 불똥이 떨어져 불이 일어나 타버렸다. 계해년에 내 나이 겨우 여덟 살이었는데, 불꽃이 밤에 하늘로 치솟던 것을 아직도 기억한다. 귀부(龜趺 비석의 대(臺)와 비석이 지금도 옛터 가운데 있다.

○ 송악산(松岳山) 밑 불운사(佛雲寺)에 동불(銅佛) 세 좌가 있는데, 좌고(座高)가 다섯 길이므로, 세상에 전하기를 제일좌불(第一座佛)이라 한다. 그 뱃속에 이태백의 〈촉도난(蜀道難) 〉초본(草本)을 간직해 두었는데, 바로 이태백이 손수 쓴 것으로서, 오늘날 본과 매우 다름이 있고 뭉개고 고친 곳도 많다. 첫 구의 희(噫)ㆍ우(吁)ㆍ희(희嚱) 석 자가 처음에는 ‘우돌재(吁咄哉)로 되어 있었는데 뒤에 엷은 먹으로 고쳤다. 개성에 도사(都事)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아들인 정문진(鄭文振)이 이 초본을 찾아 가지고 갔다 한다. 그 부처는 뒤에 복령사(福靈寺)로 옮겨졌는데 나도 가 보았다. 뒤에 녹여서 총대를 만들었다 한다.

○ 복령사 벽에 수십 사람의 이름을 쓴 것이 있는데, 자획이 뚜렷하여 바래지 않았다. 이색(李穡)ㆍ이숭인(李崇仁)ㆍ정몽주 ㆍ정도전(鄭道傳)ㆍ권근 등 여러 분이 있는데, 나도 요즘에 직접 보았다. 나머지는 쓰지 않는다.

○ 문충당(文忠堂)은 바로 정포은 선생의 옛집 터에 세운 사당(祠堂)이다. 선조께서 사액(賜額)하기를, ‘숭양서원’(嵩陽書院)이라 하였다. 그 앞 작은 시내를 건너 언덕에 대나무 우거진 곳은, 바로 이익재와 여러 현인들이 살던 곳이다. 이 대나무 숲은 곧 죽림당의 옛 물건이다. 아래 작은 연못이 있는데 지금도 전한다. 그 뒤 작은 봉우리와 시내 밑에 상국 이규보의 옛 집터가 남아 있었으나, 지금은 산전(山田)이 되고 말았다.

○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과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선생이 같이 목은(牧隱)의 집에 모여서 밤이 깊도록 담론했다. 도은이 포은을 보고 하는 말이, “달가(達可 포은 선생의 자(字))의 문장은 나와 서로 오르내리는 적수이지만, 운어(韻語)와 편장(篇章)으로 말한다면 어찌 나의 고명(高名)을 따르겠소.” 하자, 포은은 아무 말 없이 얼굴빛이 변했다.

○ 도선국사(道詵國師)에 대해 말하는 자들이 당 나라의 중 일행(一行)의 제자라고 말하는데 잘못이다. 일행은 바로 당 나라 현종(玄宗) 때 사람이다. 도선은 바로 왕건 태조의 아버지 왕륭(王隆)과 동시대 사람이며, 왕 태조의 고려는 바로 조씨(趙氏)의 송 나라와 같이 섰다. 그렇다면 도선과의 시대적인 차이가 수백 년이 될 뿐만이 아니니, 일행의 제자라고 말하는 것이 어찌 망령이 아니겠는가.

○ 고려의 수창궁(壽昌宮)은 우리 나라 들어와 개성부의 양곡을 저장하는 창고가 되었으니, 바로 내금위청이 그것이다. 내금위청은 임진왜란 때 왜적에게 불타버리고, 마당 가운데 있는 연못은 오늘날 돼지 기르는 구역이 되고 말았다. 임견미(林堅味)의 집 수십 칸은 헐리지 아니하고 아직도 있는데, 민가가 되었다.

○ 신돈(辛旽)의 집은 아직도 층루(層樓) 한 구역이 남아 있어, 그 전에는 혜민국(惠民局)이 되었더니, 심락(審樂)이 여기에서 살았다. 이창(李敞)이 도사(都事)가 되었을 때, 그 위층을 헐어 합쳐서 한 채로 만들었는데, 지금은 상평창(常平倉)이 되었다. 나의 아버지 집도 그 앞에 가까이 있었으므로, 내가 어릴 적에 그 누에 올라간 일이 있었다. 곳곳에 우묵하게 구부러진 방을 만들어 대낮에도 깜깜하였다. 이는 신돈이 요직에 있었을 때, 고의로 조정 관리들을 속여 폐간(狴犴 감옥. 옛날 감옥 문에 사나운 폐간을 그려 붙인 데서 나온 말)에 가두고 그들의 아내가 와서 애걸하게 되면, 신돈은 흰 말을 잡아 그 음경(陰莖)을 말려 갈아서 가루를 만들어 두었다가, 그들의 아내에게 술에 타 먹여 취하게 한 다음, 이 누(樓)에서 음행(淫行)을 저질렀다고 한다.

○ 강헌대왕(康獻大王 이성계)이 아직 등극하기 전, 일찍이 칠성(七星)님께 기도한 일이 있었다. 어떤 사람이 밤에 길가의 나무 구유통에 들어가 자게 되었다. 아직 밤이 깊지 아니했는데 어떤 자가 밖에서 부르기를, “오늘 밤에 이 시중(李侍中)이 아무 신(神)에게 정공(淨供)을 드리는데, 내가 제사 밥을 얻어 먹으러 가니, 그대도 같이 가세.” 하니, 나무통 속에서 어떤 자가 대답하기를, “오늘 저녁 우리 집에 손님이 와서 나는 못 가겠으니, 자네나 다녀오게.” 하였다. 얼마 있다가 또 밖에서 부르기를, “내가 갔더니오늘 밤에 여러 성인이 왕림하셨지만 ‘제사 음식이 불결하다.’ 하면서, 노하여 갔네. 그래서 나도 얻어먹지 못하고 오는 길일세.” 하였다. 그 사람은 날이 새자, 바로 강헌대왕 저택으로 달려가 뵙기를 청했다. 문지기가 거절하기를, “주공(主公)께서 지금 재계하고 계셔서 여쭈어도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그 사람이 재삼 억지를 쓰면서, “내가 일 때문에 왔는데, 말할 내용이 오늘을 넘겨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했다. 문지기도 괴이하게 생각하게 생각하고, 드디어 그 말을 강헌대왕에게 아뢰었다. 강헌 왕이 앞으로 불러오게 하였더니, 그가 아뢰기를, “오늘 밤에 무슨 치성을 드릴 일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태조(太祖)가 “아무 일도 없다.” 하자, 그 사람은, “제가 징험이 있어서 아뢰는 말이오니 숨기지 마옵소서.” 하였다.

이렇게 되어 태조는 사실대로 그에게 말하여 주었고, 그도 바로 밤에 들은 말을 낱낱이 고했다. 태조는 드디어 그 사람을 관(館)에다 두고 수십 일을 재계한 뒤, 제사 지내는 밤에 그 사람으로 하여금 다시 전에 자던 나무 속에 가서 자도록 하였다. 그 사람은 말대로 나무로 갔는데, 밤중이 되어 밖에 와 부르는 자가 말하기를, “이 시중이 또 신에게 치성을 드리는데, 자네 나하고 같이 가려나.”하자, 나무 속에서 대답하기를, “먼저 자고 간 손님이 또 오셔서 난 못 가겠네.” 했다. 얼마 뒤에 또 밖에서 부르기를, “오늘 밤에 이 시중이 정성껏 재개하고 제사지냈으므로, 여러 성인들이 모두 흠향하고 갔네. 그런데 맨 첫자리의 한 성인이 말하기를, ‘이 시중의 정성스러운 공양이 이 같으니, 보답이 없을 수 있겠소. 무엇으로써 답례함이 옳겠소,’ 하자, 그 아래 여섯 사람이 모두 말하기를, ‘그렇다면 무슨 물건을 가지고 영험을 나타내겠소.’ 하였다. 맨 첫 자리의 성인이 말하기를, ‘삼한 땅으로써 상 줌이 옳을까 하오.’ 하자, 모두들 좋다고 허락하였네. 이 말을 듣고 또 음식을 얻어 먹은 뒤에 돌아오는 길일세.” 하니, 나무의 귀신이, “내 따라가지 못한 것이 한이오.” 하였다. 그 사람이 곧 강헌대왕의 처소에 가서 이것을 자세히 말씀드렸더니, 태조는 마음에 홀로 기쁘고 자부심이 생겨, 그 사람을 후하게 대접하였다. 얼마 안 있어 그 사람은 하직하고 물러갔다. 태조께서 귀하게 되자 그 사람을 찾았으나 어디 있는지 찾을 수 없었다.

○ 태조께서 영흥(永興)에 있는 외할아버지 집에서 나셨으니, 곧 지금의 준원전(濬源殿)이다. 환조(桓祖)서 돌아가셨을 때 태조는 함흥에 계셨는데, 복된 땅을 얻어서 장례 지내려 하였으나, 아직 좋은 지관(地官)을 만나지 못하였다. 어느 날 나무꾼 아이가 산에 갔다가 두 중이 먼저 산에 와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 산을 오르내리면서 앉기도 하고 서기도 하더니, 나이 많은 중이 말하기를, “아랫것은 비록 지법(地法)에 응하기는 하나 장상(將相)이 날 자리에 불과하고, 약간 위 것은 당세에 왕후(王侯)가 날 자리네.” 하고, 두 사람이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나무꾼 아이가 숲 속에 숨어서 그 말을 듣고 태조에게 달려가 고했다. 태조는 말에 안장 얹을 사이도 없이, 그대로 말을 달려 바로 따라갔다. 10여리를 따라가니, 두 중이 길가에 지팡이를 멈추고 쉬고 있었다. 태조께서 말에서 내려 재배하고 말하기를, “저의 집이 누추하지만 스님들께서 잠시 들렀다 가시기를 원합니다.” 하니, 두 사람은 갈 길이 멀다고 사양하면서 듣지 아니하였다. 태조께서 머리를 조아리며 다시 두 번 절하고 청하기를 매우 정성껏 하니, 두 사람이 말하기를, “사람이 지극한 정성으로써 청하니, 헛되이 욕보일 수도 없지 않소.” 하고, 마침내 같이 갈 것을 허락했다.

태조께서는 두 스님을 조용한 방에 거처하게 하고, 예(禮)로 대접하기를 정성껏 했다. 두 사람이 하루를 묵고 떠나려고 하자 태조께서 애써 만류하여 하루를 더 묵게 하였다. 태조께서 자리에서 일어나 재배하고 말씀하기를, “제가 지금 아버지 상을 당하였습니다. 좋은 곳을 가려서 모시고자 하옵는데, 스님 어른께서 가르쳐 주시옵소서,” 하자, 두 사람이 옷을 떨치고 일어나면서, “빈도(貧道)는 단지 구름처럼 떠돌아다니며 놀 뿐이요. 청오금낭(靑烏錦囊 비결)의 술법은 아직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하였다.

태조께서 맨 땅에 엎드려 절하고 억지로 붙잡으며 눈물 흘려 사례하자, 두 사람은 마침내 또 하루를 머물게 되었다. 태조께서 재배하고 다시 청하니, 나이 많은 중은 잠자코 있는데, 젊은 중이 말하기를, “남의 성의를 어찌 차마 저버리겠소.” 하니, 늙은 중이 “그러면 어찌할 것이오.” 하자, 젊은 중이 “그곳을 가리켜 주면 좋지 않겠소.” 하고, 두 사람은 마침내 태조와 함께 산으로 올라가 지팡이를 꽂고 말하기를, “첫째 혈(穴)은 왕후(王侯)의 조짐이 있고, 둘째 혈은 장상의 자리이니, 이 둘 가운데서 하나를 고르시오.” 하였다. 태조께서, “첫째 것을 가지기를 원합니다.” 하니, 나이 많은 이가 말하기를, “너무 지나치지 않소.” 하였다. 태조께서 대답하기를, “사람의 일이란 상(上)을 얻으려 하여도 겨우 하를 얻게 되는 법이므로, 그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니, 두 사람은 웃으며, “원대로 하시오.” 하고, 돌아보지도 않고 가버렸다. 늙은 중은 나옹장로(懶翁長老)이고, 젊은 중은 무학상인(無學上人)이었다.

○ 태조께서 등극하신 뒤 팔도(八道) 방백(方伯)에게 하교하여 무학을 물색하여 찾게 하였으나, 해가 넘어도 찾지 못하였다. 경기ㆍ황해ㆍ평안 3도의 방백이 한때 합동하여 찾았다. 황해도 곡산(谷山) 고달산(高達山)에 이르자, 산 밑에 초가집 몇 칸이 있는데 한 고승이 홀로 거처한다는 말을 듣고, 3도 방백이 부하를 데리고 그 동네로 들어가 세 사람의 인끈을 소나무 가지에 걸어 두고, 짚신을 신고 걸어서 그 초암(草菴)에 당도하니, 한 늙은 중이 쇠코잠방이를 입고 몸소 남새밭을 매고 있었다. 3도 방백이 앞으로 나아가 묻기를, “이 암자는 누가 처음 세웠습니까.” 하니, “내가 손수 세운 것이오.” 하였다.

“무엇을 보신 바가 있어서 이곳에 자리를 잡았습니까.” 하니, “저 삼인봉(三印峯) 때문에 자리 잡았습니다.” 하였다. “어찌하여 삼인이라 하십니까.” 하니, “삼봉이 앞에 있으므로 삼인이라 합니다. 만일 이곳에 집을 짓게 되면, 3도 관찰사가 골짜기

가운데 있는 나무 위에 세 개의 인(印)을 걸 때가 있을 것이라는 것이 그 응험(應驗)입니다.” 하였다. 3도 방백이 크게 기뻐하여 그의 손을 잡으며, “이 분이 무학임에 틀림없다.” 하고, 그와 같이 돌아와 태조에게 아뢰었다. 태조는 크게 기뻐하여 스승의 예로써 대접하고, 이내 정도(定都)할 고을 물으니, 무학이 바로 한양을 점쳐 말하기를, “인왕산(仁王山)을 진산(鎭山)으로 삼고, 백악(白岳)과 남산을 청룡과 백호로 삼으시오.” 하였다.
정도전(鄭道傳)이 난색을 보이며 말하기를, “예로부터 ‘제왕은 모두 남면(南面)하고 다스렸다.’는 말은 들었어도 동향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무학이 말하기를, “내 말을 듣지 아니하면, 2백 년을 지나서 내 말을 생각할 것입니다.” 하였다. 태조가 또 원하기를, “내 일생을 마친 뒤에 유물을 간수할 만한 자리를 보아 주십시오.” 하니, 무학이 한 곳을 가리켜 말하기를, “전하의 아들과 손자를 대대로 모두 여기에 장사지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바로 오늘의 건원릉(建元陵)이다. 또 일설에는 정로위(定虜衛) 최산(崔山)이란 사람이 대대로 이곳에 살았었는데 매우 잘 살았다 한다.
바로 그 집을 태조에게 바치며 말하기를, “제가 약간 땅 보는 법을 아옵는데, 이곳은 제왕의 인산(因山 제왕을 장사 지내는 것)하는 상(相)에 해당하는 곳이옵니다.” 하였다. 태조는 이 말을 따라 드디어 큰 집을 다른 곳에 짓게 하고, 이어서 토지 백결(百結)을 주었다 한다. 아마도 최산이 바치고 무학이 자리 잡은 것이리라. 지금까지도 최장군의 묘석이 있다 한다.
《산수비기(山水祕記)》를 보면, “도읍을 선택하는 자가 만일 중의 말을 믿게 되면 약간 오래 갈 희망이 있고, 정가(鄭哥) 사람이 나와 시비를 하게 되면 5대를 가지 못하여 자리다툼의 화가 생기고, 2백 년이 못 가서 나라가 어지러워 흔들리는 난이 날 것이니 조심조심 하라.” 고 하였는데, 《산수비기》는 바로 신라(新羅)의 고승 의상대사(義相大師)가 지은 것으로, 8백 년 뒤의 일을 미리 알아 착착 들어 맞혔으니, 어찌 성승(聖僧)이 아니겠는가. 이제 와서 보면, 《비기(祕記)》에서 이른바 중이란 무학을 말함이요, 이른바 정가 사람이란 바로 정도전을 말함이다. 무학도 또한 우리 나라 일을 불을 봄과 같이 밝게 알았으니, 또한 신승(神僧)이라 할 만하다.
정도전이 무학의 말이 옮음을 알지 못함은 아니었다. 그는 다른 마음이 있어서 나라에 틈이 있게 되면 빼앗으려 했기 때문에 듣지 아니한 것이다. 소인의 ‘빼앗지 않으면 만족하지 못한다.’는 마음이 집안을 해치고 나라를 흉하게 하려는 계책이 이와 같았으니 통탄할 일이다.
○ 이방번(李芳蕃)과 이방석(李芳碩)의 난으로 태조가 함흥에 내려가 숨었다. 한 늙은이가 찾아왔는데 바로 태조의 고향 친구였다. 그는 닭 한 마리와 말술을 가지고 와서 위로하였다. 태조가 취한 뒤에 즉석에서 절구 하나를 불렀는데,
비늘 달고 북해에서 날아올랐음을 이르지 말고 / 休道騰鱗北海間
오늘날 비단옷으로 돌아온 것도 말하지 마소 / 莫言今日錦衣還
내 감히 풍패(豐沛 한나라 고조의 고사에서 인용)를 노래하려 함이 아니니 / 我行不是歌豊沛
도리어 당명황(唐明皇)의 촉도난(蜀道難)을 부끄러워하노라 / 却愧明皇蜀道難
하였다.
○ 태조는 처음 덕원(德源)에 물러가 계시다가 또 함흥으로 갔다. 공정대왕(恭定大王 태종)이 사신이 보내어 문안을 드리자, 그 뒤부터 문안 행차가 그치지 아니하였는데, 태조는 사신을 보기만 하면 반드시 죽이니 죽는 사람이 잇달았다. 그 때 사람들이 죄 없이 죽는 것을 마음 아프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태조가 마음에 두지 아니함을 슬피 여겼다. 공정대왕이 돌아오기를 청하고자 하였으나, 어떻게 나올는지 짐작 못하여 근심하고 있을 때, 어떤 이가 말하기를, “무학의 힘이면 태조의 마음을 돌릴 수 있다.”고 하였다. 공정대왕이 수소문하여 찾아 가지고 굳이 청하니, 무학이 말하기를, “부자지간에 어찌 이런 일이 있사옵니까. 내가 장차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하고 개의(介意)치 않았다. 오래 되자 무학이 마지못해 그 말을 따르자, 태종이 가는 차비를 차려서 보냈다. 함흥에 이르러 태조를 뵈니, 태조는 노하여 말하기를, “너는 아무를 위하여 유세(遊說) 온 것이 아니냐.” 하였다. 무학이 웃으며 말하기를, “전하 왜 믿지 않으시나이까. 빈도(貧道)와 전하가 서로 알고 지낸 것이 몇 해이오니까. 오늘은 전하를 위하여 한 번 위로할 뿐입니다.” 하니, 태조의 얼굴빛이 약간 풀어졌다. 이렇게 되어 머물러 같이 자게 되었는데, 태종(太宗)의 단점을 말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같이 하기를 수십 일이 되니, 태조는 무학이 태종에게 가담하지 않은 사람으로 여겨 더욱 그를 믿게 되었다. 그 뒤 수십 일이 되어 무학이 태조를 모시고 같이 자게 되었다. 야밤에 무학이 태조에게 말하기를, “태종이 참으로 죄과가 있습니다, 그러하오나 전하께서 사랑하는 아들들은 다 이미 죽었습니다. 단지 이 사람만 남았사온데 만일 끊어 버리신다면, 전하께서 평생 고생하여 이룬 대업을 앞으로 누구에게 부탁할 것입니까. 남에게 부탁하기보다는 차라리 나의 혈속(血屬)에게 주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세 번 다시 생각하시기 원하옵니다.” 하니, 태조도 자못 그 말을 옳게 여겨, 마침내 환궁할 뜻을 가졌다. 무학이 이내 급히 돌아오기를 권하였으나, 태조께서 성안에 들고자 아니하므로, 처음에는 소요산(逍遙山에 이르러 수개월을 머무르다가, 마침내 풍양(豐壤 평양)으로 가서 궁을 짓고 지내셨다. 이 뒤로 무학의 종적은 어디 있는지 찾을 수 없게 되었다.
○ 화담(花潭) 선생은 항상 등이 시린 증세가 있어서 비록 더운 여름이라 하더라도 솜저고리를 벗지 못하였다. 그가 두류산(頭流山 지리산)에 놀러 갈 때는 한더위인데도 불구하고 솜옷을 입고 갔다. 60리를 걸어간 이날 땀이 흘러 뼈에까지 젖었는데, 그 병이 바로 나아버렸다. 이 때부터 여름에 솜옷을 입지 않았다.
○ 서 선생은 역리(易理)에 깊었다. 그러므로 수(數)를 추리하는 것을 일삼지 않더라도 그 학문이 그윽히 소강절(邵康節)에 부합하였다. 그러나 한 번도 소강절을 언급한 적이 없었다. 어느날 선생은 소강절이 지은 《자미수(紫微數)》를 보다가 말하기를, “이것은 바로 술수가(術數家)인 진희이(陳希夷)의 극묘(極妙)이다.” 하였다. 선생의 아우 숭덕(崇德)이 일찍이 이 수를 가지고 선생에게 물었는데, 선생은 말씀하기를, “만일 심지(心志)가 밝지 못하다면, 꼭 이것을 배울 필요는 없다.” 하고, 드디어 그 책을 불살랐다.
○ 화담 선생이 젊을 때 금강산에 가 놀았는데, 바다를 끼고 가다가 도중에서 양식이 떨어졌다. 쌀을 고성(高城) 태수에게 빌리러 갔더니, 태수는 무인(武人)이므로 서생(書生)을 경시하고 누워서 대하며 이내 묻기를, “산 구경을 하니, 무슨 장관(壯觀)이 있었소.” 하였다. 선생은 대답하기를, “불정대(佛頂臺)에 올라가 해 뜨는 것을 본 것이 가장 기관(奇觀)이었습니다.” 하니, 태수는 또, “그것이 어떻습니까.” 하고 물었다. 선생이 말하기를, “새벽이 되어 절정(絶頂)에 발걸음을 날려 굽어 만 리를 내다보니, 구름과 안개는 자욱하고 하늘과 바다는 한데 붙어 뒤범벅이 되어 분별이 없는 듯 하였습니다. 갑자기 밝은 기운이 점점 열리고, 상하 사방이 걷혀 올라가기 시작하자, 가볍고 맑은 것은 하늘이 되고, 무겁고 흐린 것은 땅이 되는 듯하더니, 건곤(乾坤)이 정하여지고 만상이 나뉘어졌습니다. 조금 있다가 오색구름이 바다를 뒤덮고, 붉은 기운이 하늘에 치솟았으며, 물결은 겹겹이 늠실거리고, 둥근 해를 치받쳐 올리니, 바다 빛이 밝아지고 구름 기운이 흩어졌습니다. 상서로운 햇빛이 가득하니 눈이 부셔 볼 수 없고, 점점 높아져서 우주가 광명하고, 먼 봉우리와 가까운 산부리가 비단같이 얽히고 실처럼 나뉘어져서, 붓으로 그릴 수 없고 입으로 형용하여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제일 장관이었습니다.” 하였다. 태수는 벌떡 일어나 말하기를, “자네 말이 매우 통쾌하여 사람에게 세상을 초월하여 독립하는 뜻이 있게 하였다.” 하고, 마침내 후하게 대접하여 보냈다.
○ 서 선생이 남으로 지리산(智異山)에 가 놀았다. 산에 들어간 지 오래되어 식량이 떨어져 밥을 못 지어 먹게 되었다. 하루는 마침 호남 도백(道伯)의 행차를 만났었다. 명함을 전하고 만나 보려고 하였으나, 종자(從者)들이 거부하여 통하지 못하였다. 이때에 도백이 반석 위에 앉아 있었는데 그 높이가 열 길이나 되었다. 선생이 한 걸음에 뛰어 올라 서니, 도백이 이상하게 생각하여 누구냐고 물었다. 선생은 대답하기를, “저는 한 청빈한 선비입니다. 천성이 산수를 좋아하여 구름처럼 사방으로 떠다니며 노는 길에 여기까지 이르렀습니다. 식량이 떨어져 호구할 길이 없어서, 절하(節下 존칭)께 밥 지을 식량을 얻으려고 했으나, 종자들이 거절하므로 감히 이같이 당돌하게 하오니, 만나 뵙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감사는 앉으라고 명하고 서로 이야기해 보니, 선생이 보통 사람이 아닌 줄 알자, 쌀과 생선을 많이 주어 돌아가게 했다.
○ 선생이 지리산에 있을 때 장차 최고봉에 다다라 보고자 아침내 점을 쳤다. 그리고 종자에게 말하기를, “오늘은 틀림없이 이인(異人)을 만나겠다.” 하고, 드디어 신을 메고 지팡이 짚으며 올라가 정상에 다다랐다. 소나무에 의지하고 돌에 걸터앉았는데, 조금 있자 한 대장부가 반공(半空)에 우뚝 서서 길게 읍하고 말하기를, “내 그대가 올 줄 알았노라.” 하니, 선생께서도, “나 또한 그대가 나를 방문할 줄 알았노라.” 하였다. 그 사람이 말하기를, “기(氣)를 가다듬고 정신을 수양하면, 상등은 백일 충천(白日沖天)할 수 있고, 중등은 팔극(八極)을 휘두를 수 있으며, 하등은 천춘(千春)에 정좌할 수 있으니, 공은 나를 따라 놀 수 있겠소.” 하고 물었다. 선생이 말하기를, “신선(神仙) 황백(黃白)의 술법은 비록 혹 전하지만, 유자(儒者)는 말하지 않는 법입니다. 나는 공자를 배우는 자입니다. 더욱이 구전묘결(九轉妙訣 도가에서 장생불사의 단약(丹藥)을 아홉 번 굽는 신기한 방법)을 비록 배울 만하더라도 나는 원하지 않습니다.” 하니, 그 사람은 웃으며 말하기를, “도가 같지 아니하니, 서로 꾀할 수 없구려. 내 또 그대의 고고함을 알았노라.” 했다. 이날 종자들은 모두 이 사람을 보지 못하였는데, 선생만이 홀로 말을 주고받고 하여, 종자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이윽고 한 손을 번쩍 드니 번개와 같이 사라졌다. 이 일을 선생은 일찍이 제자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선생의 병세가 악화되자 선군께서 서울에서 송도로 가서 선생을 뵈었더니, 선생이 자세히 말하였다 한다. 또 말하기를, “그 사람은 몸에 우의(羽衣)를 입었고, 두 팔에는 털이 한 자 남짓씩 났으며, 나이는 30세 남짓하더라.” 하였다.
○ 서 선생이 일찍이 말하기를, “천하에 세 도가 있는데, 유도(儒道)가 최상이고, 불도(佛道)가 다음 가며, 선도(仙道)는 또 그 다음 간다. 학술도 또한 그러하다.” 하였다.
○ 서 선생이 화담 초당에 계실 때, 어느 날 못가를 거닐다가, 뛰노는 피라미가 문득 호량(濠梁)의 뜻이 있음을 보고 종이를 한 치쯤 잘라 글 몇 자를 써서 물 가운데 던졌다. 길이가 석 자쯤 되는 한 쌍의 고기가 물 속에서 뛰어 나와 돌 위에 자빠져 있었다. 선생은 손으로 주워 보고 웃으면서 도로 물에 던진 다음 말하기를, “옛 사람의 말이 거짓이 없구나.” 하였다. 이 때에 선생은 장자(莊子)를 읽고 있었다. 내 선군께서 어릴 때부터 선생 문하에서 글을 배우셨기에 그 일을 눈으로 직접 보시고, 일찍이 말씀하셨다.
○ 목조(穆祖)는 전주(全州) 대성(大姓)으로 용기(勇氣)를 자부(自負)하였다. 사랑하는 관기(官妓)가 있었는데, 관찰사가 그녀를 수청 들게 하였다. 밤이 되어 목조는 곧장 객관 서쪽 채 방으로 가서 그 기생을 나오라 하였다. 그 기생은 다리를 떨면서 일어났다. 관찰사가 크게 노하여 급히 소리쳐 종자를 부르면서, “도둑이 문 밖에 왔으니, 빨리 오백(五伯 형을 집행하는 사람)을 명하여 잡아라.” 했다. 목조는 장막 속으로 곧장 들어가 검으로 관찰을 찌르고, 드디어 그 기생을 안고 말을 채찍질하여 나왔다. 밤에 백 여리를 달려가다가 그 길로 영북(嶺北)으로 갔다. 처음에는 의주(宜州)의 적전(赤田)에 가 머물렀는데, 곧 지금의 덕원(德源)이다. 뒤에 경흥(慶興)으로 가 살았다. 말 달리기와 활쏘기를 잘하고 사냥을 좋아하니, 오랑캐들이 두려워하였다. 어느 날 밤 어떤 사람이 꿈에 나타나 말하기를, “나는 바로 아무 못의 용입니다. 아무 못의 용이 내가 사는 못을 빼앗고자 하여 내일 만나 싸우기로 했는데, 그가 강하여 내가 격투를 하지 못할까 걱정이니, 부디 그대는 나를 구하여 주시오.” 하였다. 목조는 말하기를, “무엇으로써 주객(主客)을 알겠습니까.”하니, “그는 희고 나는 누런빛이므로 분별할 수 있습니다.” 하니, 목조는 허락하고 다음 날 아침 일찍이 활을 들고 갔다. 갑자기 못 물이 끓어오르고 물결이 용솟음치기 시작하더니, 황ㆍ백 두 용이 서로 얽혀서 물 위에 엎치락뒤치락하였다. 목조는 한 화살로 흰 놈을 맞히니 못물이 새빨개지고, 백룡이 도망갔다. 이날 밤에 또 꿈에 와 고하기를, “당신을 힘입어 생명을 보전했으니, 앞날에 꼭 두터운 보답이 있을 것이오. 자손 때에 가서 보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이 때문에 적(赤) 자로써 못 이름을 지었다. 목조가 사냥 갔다 돌아오는 길에 목이 말라 물을 찾는데, 어떤 할미가 표주박에 물을 떠 가지고 와 드리고, 이어서 말하기를, “우리 애들이 공(公)을 해치고자 하는데, 힘으로 대적할 수 없어 이미 깊숙이 있는 오랑캐에게 청병했으니, 곧 올 것입니다.” 하였다. 목조는 뒤 봉우리로 말을 달려 올라가 바라보니, 수천 기(騎)가 구름처럼 덮이어 와서 황진(黃塵)이 하늘을 가리었다. 드디어 급히 말을 타고 그녀를 옆에 끼고 달려갔다. 따라오는 오랑캐가 뒤에 있어 일이 급하자, 바다 가운데 있는 섬으로 달려 들어갔는데, 물이 말의 배밖에 닿지 않았다. 쫓아오는 자들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그만두고, 서로 이상한 눈으로 마주 보며 흩어져 갔다. 그 뒤 목조는 함흥으로 옮겨와 살았다. 올라가 오랑캐를 바라보던 뒤 봉우리를 뒷사람들이 망적봉(望狄峯)이라 불렀다.
○ 선춘령(宣春嶺)은 갑산(甲山)과 닷새 길 거리에 있는데, 백두산 밑에 가깝다. 짤막한 비(碑)가 풀 가운데 묻혀 있었는데, 신입(申砬) 공이 남병사(南兵使)가 되었을 때에 끌어왔으므로 나도 볼 수 있었다. 높이는 다섯 자쯤이고 넓이는 두 자쯤인데, 글자는 필진도(筆陣圖)와 비슷하나 작고 태반이 뭉그러졌다.

여기서 ‘황제 함은 고구려왕이고 ‘탁부(啄部아무개 67이라고 했는데나는 탁부가 어떤 관직[]인지 알지 못하였다  하곡(荷谷허봉(許封) 말하기를, “일찍이 고사(古史) 보니탁부는 지금의 대부와 같다.” 하였다.

○ 이징석(李澂石)과 이징옥(李澂玉)은 아산(牙山) 사람인데, 징옥은 징석의 아우이다. 징석이 열여덟 살 때 징옥은 열네 살 때, 그들의 어머니가 두 아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산 멧돼지를 보고 싶구나.” 하였다. 두 아들은 곧 물러갔다. 징석은 이날 돼지 한 마리를 쏴 가지고 돌아오니, 어머니가 보고 크게 기뻐하였다. 징옥은 이틀 뒤에야 비로소 맨손으로 돌아왔다. 그 어머니는 의아하게 여겨 말하기를, “사람들이 그 전에 말하기를, ‘네 형의 용력(勇力)이 매우 너에게 못 미친다.’ 했는데, 네 형은 바로 산 멧돼지를 붙들어와 나에게 보여 주었고, 너는 이틀이나 되어서 빈손으로 돌아 왔으니 웬 일이냐.”고 물었다. 징옥은 꿇어 앉아 말하기를, “어머니께서 시험 삼아 문 밖에 나아가 보십시오.” 하므로, 그 어머니가 따라 나가니, 큰 돼지 한 마리가 문 밖 마당에 자빠져 눈을 부릅뜨고 씨근거리는 것이 보였다. 아마도 징옥이 꼭 어머니로 하여금 산 멧돼지를 눈으로 보게 하기 위하여 뒤 밟아 쫒아, 어떤 때는 몰고 어떤 때는 역습을 당하면서, 산을 넘고 들을 건너면서 밤낮을 다하여 발로 차고 협박하여 그 놈을 굴복시키고, 반드시 기진맥진하게 만든 다음에 발로 차서 몰고 왔을 것이다.
○ 이징옥은 맹호 쏘기를 좋아하였다. 활을 쏠 때마다 눈을 부릅뜨고 호통을 치면 호랑이는 눈을 감고 머리를 떨어뜨리니, 호랑이를 한 발(發)에 거꾸러뜨렸다.
○ 이징옥이 일찍이 김해 부사의 집에 갔었는데, 부사는 사절하고 만나주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 한 젊은 부인이 매우 슬프게 우는 것을 보고, 그 연고를 물었더니, “내 남편이 호랑이에게 잡혀 가서 현재 대밭 가운데 있습니다.” 하였다. 징옥은 팔을 걷어 올리고 대숲으로 들어가 맨손으로 호랑이를 잡아 끼고 나와 그 배를 가르고, 그 사람의 육신을 다 빼내니, 아직 소화가 되지 않았다. 부인으로 하여금 그 육신을 싸게 하고, 호랑이 가죽을 벗겨서 그 부인에게 주면서 부사에게 말하게 하였더니, 부사는 크게 놀라 사람을 시켜 쫓아와 사례하고 돌아오게 하였으나.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 이징옥의 아내가 교만하여 징옥을 배반하고 갔다. 징옥은 그것을 억지로 말리지 않았다. 뒤에 징옥이 영남절도사가 되었는데, 그 부인은 벌써 남에게 시집간 지 오래되었다. 징옥이 여러 고을을 합하여 크게 사냥하고, 그 뒷남편 집 앞에서 많이 잡고 적게 잡은 것을 검사하여 보고, 뒷남편 된 사람을 불러 사냥하여 잡은 새와 짐승 수백 마리를 모두 다 주었다. 이것은 주매신(朱買臣)의 고사와 비슷하다.
○ 이징옥은 열여덟 살에 강계 부사가 되었다. 김종서 공이 사표를 내고 돌아오게 되자, 세종이 그 후임을 물색하기 어려워, “누가 경을 대신할 수 있는가.” 하고 묻자, 김 공이 징옥을 추천하니 허락하였다. 세종은 드디어 그를 채용하여 북도(北道) 절도사로 삼고, 이어서 은밀히 유시하기를, “나라에 큰일이 있지 않으면 너를 소환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 징옥이 북도 절도사가 되자, 6진 가운데 오랑캐로서 말 잘 타고 활 잘 쏘는 자를 뽑아, 모두 부하로 예속시키고 각각 나누어 편대를 만들었는데, 회령(會寧) 오랑캐는 모두 흰 말에 흰 옷이요, 종성(鍾城) 오랑캐는 모두 푸른 말에 푸른 옷을 입힌 것과 같이, 다른 오랑캐도 모두 그렇게 하였다. 날마다 교련을 시키니 두어 해 뒤에는 정예가 된 자들이 모두 3천 명이나 되었다. 여러 고을을 순찰할 때마다 각각 경계에 나와 맞이하고 보내게 했다. 징옥이 두만강을 순찰하면서 살펴보다가, 오랑캐를 만나면 귀순자를 물어 강가에 살게 하고, 귀순을 원하지 않는 자는 쫓아 보냈다. 약속하기를, “내 명령을 범하는 자는 죽을 것이니, 만일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가 있으면 목을 베겠다.” 하니, 강을 지나 열흘길을 가도록 오랑캐의 자취가 하나도 없게 되었다. 그 후에 조정에서의 의논이 오랑캐를 뽑아서 졸오(卒伍)를 만들고, 군중(軍中)에 편입시키면 징옥은 이들을 좌우할 수 있으나, 다른 사람이 맡게 되면 필시 잘 하지 못하여 후환이 있을까 두려우니, 이것을 그만두게 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마침내 이징옥이 오랑캐를 좋은 말로 타이르기를, “너희들이 이미 의(義)를 향하여 귀화하였으니 우리 사람과 같다. 다만 농사짓는 데 편안하도록 하고, 토지세와 부역을 없앰이 옳겠다. 그러나 만일 법령으로써 묶고 척적(尺籍 호적)과 오부(伍符 병적)에 편입시키면 곧 이것은 너희들을 구속시키는 것이니, 이제부터 시작하여 그것을 해제한다.” 하였다. 그러나 오랑캐들은 징옥을 두려워하면서도 사랑하였고, 먼 곳 사람까지도 사모하였다.
○ 세조가 반정(反正)하자 다른 사람으로서 북도 절도사를 대체하고 징옥을 불렀다. 징옥이 교대를 하고 길주에 이르러 생각하기를, ‘조정에서 큰일이 있지 아니하면, 나를 부르지 않겠다고 한 임금의 교(敎)가 일찍이 있었는데, 이제 일 없이 나를 체직시키니,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이다 하고 도로 달려 경성(鏡城)에 이르러 신임 절도사에게 물으니 말하지 아니하였다. 징옥은 종자를 돌아보고 신임 절도사를 움켜잡아 내리라 명령하고, 교의에 앉아 꾸짖기를, “네가 만일 말을 하지 않으면 목을 베겠다.” 하니, 그 사람은 숨기지 못하고 사실을 말했으나 마침내는 죽였다. 군사를 이끌고 남쪽으로 서울을 향하면서 말하기를, “내 위신(威信)이 본래부터 산융(山戎 되놈을 가리킴)에 드러났으니, 이제 마땅히 강을 건너가 대금황제(大金皇帝)의 손발이 되라라.” 하고, 내일 군대를 인솔하고 가기로 약속하였다. 이때에 육진(六鎭) 판관들이 모두 편장(偏將)과 비장(裨將)으로 있었다. 회령 판관이 사람을 판자 위에 잠복시켰다. 이날 밤에 징옥은 동쪽 채에서 자고 있었는데 역사 두 사람이 장검을 쥐고 판자에서 줄을 잡고 내려와 깊이 잠든 틈을 타서 찍으니 징옥의 오른팔이 떨어졌다. 징옥이 놀라 일어나 그 검을 빼앗아 역사를 찍고, 알몸으로 날듯이 나와 왼손으로 후려갈기니, 죽은 사람이 수십 수백이 되었다. 마침내 비 오듯 하는 화살 속에서 죽었는데 그때의 나이 24세였다. 내가 어렸을 때, 정평부사 이충백(李忠伯)과 영흥부사 이언화(李彦華)가 모두 말하기를, “일찍이 야사(野史)를 보았는데 그 말이 위와 같았다.” 하였다. 징석은 세조조에 이시애(李施愛)를 평정할 때에 공이 있었다 한다.

태조(金太祖) 선계(先系) 양산(梁山) 사람이다. () 세조(世祖) 후예로서 평산(平山)에서 났다. 일찍이 일을 기록한 것이 있었다.

○ 이충백(李忠伯) 공이 말하기를, “그의 할아버지의 이름은 빙(砯)이다. 아우 아무개가 있는데 용모가 뛰어나 천신(天神) 같았으므로, 사람들이 옥인(玉人)이라 지목하였다. 나가 다니면 기생과 창녀들이 다투어 따라다니므로, 낮에는 시내에 감히 나가지도 못했다. 성종(成宗)이 풍진풍정연(豐進豐呈宴)을 베풀어 관기와 사창이 뜰에 가득 찼었는데, 종일토록 그들이 모두 한곳만 주목하였다. 성종이 괴이하게 여겨 하문하니, 시신(侍臣)이 대답하기를, ‘선전관 이 아무개가 시열(侍列)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하루는 성종이 편전(便殿)에 있을 때, 시신(侍臣)이 들어가 입시하였는데 이모(李某)도 입시했다. 때는 바야흐로 한여름이라 임금이 용포자락에서 백첩선(白貼扇)을 꺼냈는데, 흰 명주가 석 자쯤 매어 있었다. 손으로 두세 번 부치더니 이어서 시신에게 묻기를, ‘이 부채를 누구에게 줄 것 같은가’ 하니, 어떤 사람은 정승, 어떤 사람은 주병상서(主兵尙書), 어떤 사람은 종백(宗伯)으로 문형(文衡)을 장악한 사람에게 ……”라고 하였다. 임금이 잠자코 돌아보다가 마침 이모(李某)가 약간 멀리 입시함을 보고 그 앞에 던지며 말하기를, “네가 가질 만하다.” 하였다. 좌우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 사랑 받음을 영광이라고 하였지만 속으로는 질투하여, 그는 종신토록 벼슬을 얻지 못하고 선전(宣傳)의 직함에서 그쳤다 한다.
○ 성종 때 한 환관(宦官)이 명을 받들어 호서(湖西)에서 돌아왔다. 임금이 조용히 백성들이 괴롭게 여기는 것과 한가한 일을 물었다. 환관은 대답하기를, “충주에 한 한사(寒士 가난한 선비)가 있었습니다. 목사(牧使)의 객(客)이 되었는데, 목사는 친구로 대해 주었고, 또 한 기생으로 시침을 들게 하였습니다. 그 선비는 사랑을 쏟았으나, 기생은 그에게 정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 기생을 이별함에 미처 선비는 눈물을 흘리며 놓지 못했습니다. 그 고을의 광문(廣文 교수의 별칭)은 바로 문관인데, 또한 이별하는 자리에 참여했습니다. 그 선비가 또 광문의 손을 잡아 그 기생과 같이 끈에다 매어 놓고 광문에게 말하기를, ‘그대 홀로 나와 이별한(離別恨)을 할 수 없겠는가.’ 하였습니다. 광문이 그를 위하여 율시 한 구를 지었는데, 그 첫 대구에,
붉은 빛 높은 띠는 가는 허리에 비꼈는데 / 紫芝崔帶橫腰細
검은 빛 큰 신은 발에 신기 편안하네 / 黑黍張靴着足安
라고 하였습니다. 그 선비는 이어 그 시를 기생에게 주며 말하기를, ‘잊지 않기를 바란다.’ 하였습니다. 또 이틀이 되었으나 차마 이별하지 못하니, 보는 사람이 눈웃음을 치지 아니 하는 자 없어도, 그 선비는 돌아보지도 않았다 하옵니다.” 하였다. 임금이 듣고 나서 빙그레 웃고, 따라서 광문(廣文)의 이름을 기둥에 적었다. 그 뒤에 임금이 특히 광문의 이름으로 홍문(弘文)의 녹(錄)을 주니 백부(柏府 어사대)에서 이것을 논란하기 여러 날이 되었다. 하루는 임금이 성상소(城上所)에 입알(入謁)한 장령(掌令)을 불러 입대(入對)하기를 명하였다. 이르기를, “어찌하여 이 논란이 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예로부터 홍문의 기록은 일시의 공론을 따랐지 일찍이 내지(內旨)에서 나온 일은 없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권세가와 요로에 달려가서 얻은 것이 공(公)인가? 이름이 임금에게 통하여 알아줌을 얻는 것이 공인가?” 하였다. 그 장령이 힘껏 아뢰었으나, 그만두게 하지 못하였다. 임금이 말소리와 얼굴빛을 매우 엄하게 하고, 책하며 그 사람을 나가도록 명하니, 떨면서 물러갔는데, 잘못하여 어도(御道)로 갔다. 임금이 자세히 보고 좌우에 이르기를, “제가 마땅히 가야 할 길을 아직도 스스로 가지 못하면서, 도리어 남의 앞길을 막으려 하는가.” 하였다. 간관이 그 장령을 탄핵하여 벼슬을 떼었고 광문은 마침내 옥당(玉堂)에 들어오게 되니, 바로 기재(奇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