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수와 회수사이의 임진왜란 전투
향산집 제12권 / 비(碑)
부장 증 병조 참판 관란 허공 신도비명 병서 〔部將贈兵曹參判觀瀾許公神道碑銘 幷序〕
[DCI]ITKC_BT_1252A_0120_010_0020_2013_004_XML DCI복사 URL복사
왜란이 일어났던 임진년이 다시 돌아오매, 내가 그 당시의 충성스러웠던 선비들을 추념해 보니, 그때에는 의병을 일으켜서 왕을 위하여 적개심을 불태운 사람들이 저처럼 많았었는데, 어찌하여 요즈음 사람들은 위축되어 떨쳐 일어나지를 못하고 와신상담(臥薪嘗膽)하려는 뜻이 없는가? 가슴속에 치솟는 의분을 이길 수가 없구나.
하루는 진양(晉陽 진주(晉州))의 사인(士人) 허균(許▼(禾+勻))이 찾아와서 그의 선조로서 병조 참판에 추증된 관란 허공의 행록(行錄)을 보여 주면서 비석에 새길 명문을 청하였다. 아아, 공은 바로 임진왜란 때의 의사(義士)이며, 초유사(招諭使) 김학봉(金鶴峯) 선생의 막료였다. 그의 위대한 업적을 상고해 보니 이송암(李松巖)의 일기 속에 모두 적혀 있으므로 믿을 만한 증거가 있다.
공의 휘는 국주(國柱), 자는 중간(仲幹)으로 관향은 김해(金海)이다. 고려 말에 전리 판서(典理判書)를 지낸 휘 옹(邕)이 있었고, 이분이 휘 소주(少㕀)를 낳았는데 사헌부 장령을 지냈으며 부모님의 상을 잘 치러서 정려되었다. 우리 왕조에 들어와서 휘 추(錘)가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출사하지 않았는데, 이분이 공의 증조이다. 조부의 휘는 공작(公綽)인데 음보(蔭補)로 현감을 지냈으며, 부친의 휘는 유(裕)로 통례원 좌통례(通禮院左通禮)를 지냈다. 모친 숙인(淑人) 함종 어씨(咸從魚氏)는 진사 득한(得漢)의 따님이며, 대사헌 관포(灌圃) 득강(得江)의 종녀(從女)이다.
공은 가정(嘉靖) 무신년(1548, 명종3)에 진주의 승산리(勝山里)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였고 신의로써 널리 알려졌다. 의지와 기개가 우뚝하여 개연(慨然)히 손자(孫子)와 오자(吳子)의 병법을 사모하였으며, 일찍이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여 부장(部將)에 천거되었으나, 마침내 불우한 처지로 여러 해 집안에만 계셨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김 선생이 본도를 초유(招諭)하자, 공은 소매를 떨치고 일어나서 가산을 기울여 의병을 모집하니 군중이 6, 7백 명이나 모였다. 약속을 엄히 하고 대오(隊伍)를 정돈하여 적과 더불어 함께 죽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이때에 김면(金沔)은 거창(居昌)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박사겸(朴思兼)과 박사제(朴思齊)는 삼가(三嘉)에서 의병을 일으켰는데 그 무리가 각각 8, 9백 명이 되었다. 단성(丹城)의 권세춘(權世春)과 초계(草溪)의 전치원(全致遠)과 이대기(李大期)도 의병을 일으켜 응해 오니 초유사가 크게 기뻐하여 그날로 장계를 올렸다. 본주의 판관 김시민(金時敏)도 두류산(頭流山 지리산)에서 소식을 듣고 와서 회동하니 모인 병사가 수천 명이었다.
분장을 의논하여 성을 지키는데, 전 군수 김대명(金大鳴)을 소모관(召募官)으로 삼고 손승선(孫承善)을 수성 유사(守城有司)로 삼으며 하천서(河天瑞)를 조도(調度)에 임명하고, 강덕룡(姜德龍)은 갑옷과 무기 수선을 담당하고 신남(申楠)은 취사와 군량을 담당하였다. 공과 정유경(鄭惟敬)은 복병장(伏兵將)이 되었다. 이때에 초유사가 명령하기를,
“진양이 없으면 호남(湖南)도 없고, 호남이 없으면 나라가 나라 구실을 할 수 없다. 적이 탐내는 곳이 바로 여기이니 수비를 늦추어서는 안 된다.”
하였다. 공은 한결같이 초유사의 통제를 따라서 일에 맞추어 계획을 세웠으며, 적진에 임하여서는 선봉이 되고 보루를 마주하여서는 복병이 되었다. 정유경과 더불어 남강 밖에서 분탕질하는 왜적을 공격하여 적을 많이 베어 죽였으니, 그 공으로 본도의 병마우후(兵馬虞候)가 되었다. 그 후에 선무 공신(宣武功臣) 3등에 녹훈되었으나 공은 조용히 물러나 공로를 자랑하지 않았다.
물러나서는 염강(濂江) 가에 정자를 짓고 관란(觀瀾)이라고 편액하였다. 노파(蘆坡) 이흘(李屹), 부사(浮査) 성여신(成汝信), 독촌(獨村) 이길(李佶)과 더불어 소요하면서 술 마시고 시를 읊조리는 것으로 말년의 계책을 삼았다. 또한 독촌 등 여러 명사(名士)들과 더불어 호음(湖陰)과 정암(鼎巖) 사이에서 기로회(耆老會)를 운영하여 풍류와 운치가 강우(江右 경상 우도)를 빛내었다. 회갑이 되던 해(1608, 광해군 즉위년) 3월 29일에 별세하였다. 처음에는 병조 참의에 추증되었는데, 순조(純祖) 임신년(1812, 순조12)에 많은 선비들의 요청으로 병조 참판으로 올려 추증되었다. 부인 파평 윤씨(坡平尹氏)는 참의에 추증된 사형(思亨)의 따님이고, 수찬 효빙(孝聘)의 증손녀이다. 만력(萬曆) 어느 해 7월 13일에 돌아가시니, 진주 동쪽 용봉리(龍鳳里) 청원(淸源)의 묘좌(卯坐) 언덕에 합장하였다. 1남 3녀를 두었다.
아들 감(玵)은 군자감 정(軍資監正)을 지내고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딸은 유형춘(柳亨春), 조이곤(曺以坤), 현감 윤보벽(尹輔辟)에게 출가하였다. 서자〔餘男〕는 용(瑢)이다.
참판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병마사 동립(東岦)과 현령 중립(仲岦)이다. 병마사는 세 아들을 두었는데 통덕랑 서(曙), 부사 성(晟), 통덕랑 만(晩)이다. 현령은 딸 넷을 두었는데 참봉 이익화(李翊華)와 이현주(李玄柱), 권두첨(權斗瞻), 송지식(宋之栻)에게 출가하였다. 증손 이하는 많아서 다 기록하지 못한다.
조용히 공의 행록을 살펴보니 다만 초두에 의병을 일으켜 성을 지킨 행적만이 서술되어 있고 그 후의 일은 도리어 자세하지 않으니 어찌된 일인가? 혹여 당시에 막부의 여러 사람들이 다른 진으로 나뉘어 배속되어 가면서 공도 그 가운데에 있었는데, 오장원(五丈原)에 별이 떨어지고 형주(荊州)의 성이 함락될 때에 그 기록을 가져다가 지키지 못했기 때문인 것인가? 또 이미 우후(虞候)가 되었다면, 우후는 부장보다 높은 벼슬인데도 공신녹권(功臣錄券)에는 어찌하여 부장(部將)으로 기록된 것인가? 고대의 문헌과 전적(典籍)에 대해서는 태사공(太史公) 또한 소루(疏漏)함을 탄식하였으니, 수백 년이 지난 오늘날, 도리어 어떻게 널리 수집하여 그 빠진 글을 보충할 수 있겠는가.
아아, 바야흐로 강력한 이웃 나라가 몰래 쳐들어오던 날에 저 웅번(熊幡)을 안고 호부(虎符 병부(兵符))를 차던 자들도 도리어 성을 버리고 달아나 숨는데, 오직조정에 앉지도 못하고 진연(進宴)에 참여하지도 못했던 사람이 홀로 피를 튀기고 울음을 삼키면서 장대를 들고 나무를 베어서 한 하늘 아래에서 함께 살 수 없는 원수들을 치는 의리를 세우고, 북쪽을 향하여 죽음으로써 싸우는〔北首爭死〕 계책을 이루었으니, 비상시에 쓸 인재를 평상시에는 기르지 않는다〔所用非所養〕는 말이 이것을 두고 이름인저!
큰 고을에 성주가 있고 용감한 의병이 사방에서 모이매, 재능을 따라서 임무를 부여할 때에 가장 어려운 것은 복병만 한 것이 없다. 저 왜적들이 승승장구 유린해 들어올 때에, 그 흉악하고 모질며 교묘한 속임수에는 진실로 당당한 깃발과 질서정연한 진형(陣形)만을 전적으로 사용하여 제지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기병(奇兵)을 설치하고 매복을 설치하여야만 제지할 수가 있다. 공이 이 임무를 맡아서는 사양하지 않았고 주장(主將)이 이 임무를 맡기고는 의심하지 않았으니, 공의 지혜와 용기가 여러 장수들보다 특출하고 기이한 계책이 적을 억제하여 승리하는 데에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강수(江水)와 회수(淮水) 사이를 보호하고 지키며 흉악한 칼끝을 저지하여 막아서 수복(收復)하는 업적을 도와서 이룩한 것은 누구의 공인가? 그 당시에는 비록 큰 나무 밑이나 지키고 있거나 양을 도살하는 것에 만족하였다 하더라도, 높은 충절과 성대한 공적이라야만 능히 백년토록 역사의 기록을 빛낼 수가 있는 것이다. 나라에서 한 번 추증하였는데 거듭 추증한 것은 덕 있는 이를 높이고 어진 사람을 숭상하는 것이니, 국가의 공의(公議)가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사라지지 않음을 볼 수 있다. 그러니 어찌 그리도 성대한가. 명은 다음과 같다.
씩씩한 진양성은 / 額額晉城
국가의 울타리이며 방패로다 / 有國藩蔽
태평세월 백 년에 / 昇平百載
문관들은 안일하고 무관들은 놀기만 했네 / 文恬武嬉
교만한 오랑캐가 멋대로 날뛰니 / 天驕陸梁
변방의 요새가 와해되었네 / 鎖鑰瓦解
위풍당당한 초유사께서 / 堂堂招諭
충성과 정절을 다하였네 / 克篤忠貞
왕께서 말씀하기를 “네가 가서 화합시켜 / 王曰汝諧
남쪽 고을을 안정케 하라.” 하시기에 / 乃奠南服
설욕의 눈물로 격문을 날리니 / 雪涕飛檄
의로운 군대가 구름처럼 일어났네 / 義旅雲興
아흔아홉 고을에 / 九十九坊
몸을 떨쳐 일어나 / 能無一士
크게 부르짖을 한 선비가 없으랴 / 奮挺大呼
오직 우리 허공은 / 曰惟許公
문무를 겸비하여 / 文武全材
활 쏘고 말 몰아 일찍이 천거되니 / 射御宿薦
사람들이 모두가 믿고 복종하였네 / 人人信服
한 부대도 오히려 많다 여겨 / 一旅爲多
부대와 진지가 정돈되고 가지런하며 / 部陣整齊
약속과 맹세가 엄격하고 긴밀했네 / 約誓嚴密
초유사께서 돌아보고 웃으며 / 招諭顧笑
“그대들과 함께 맹세하리라.” 하였네 / 曰爾同盟
왕께서 서쪽 변방에 계시매 / 王在西方
바로 장계를 올려 알렸네 / 立以馳啓
관군들도 이날에 / 官軍是日
또한 다시 돌아왔네 / 亦復來之
위기일발 위태한 성을 / 一髮危城
힘을 합쳐 굳게 지켰네 / 合勢固守
수많은 충직한 용사들이 / 林林忠勇
각기 임무를 맡으매 / 各職其官
군량을 조달하고 / 饔餼爾調
갑옷과 무기를 수리했네 / 兵甲爾理
가장 어려운 것은 매복으로 / 最是設伏
더욱 적임자를 얻기가 어려웠네 / 尤難其才
공이 이 일을 담당하여 / 公乃承當
밤낮으로 힘을 아끼지 않으셨네 / 晝宵殫力
남강 밖의 사나운 왜적들이 / 江外豕突
자취를 감추고 도망하였네 / 斂跡以亡
이에 중영으로 승진하여 / 迺陞中營
계획하고 도움에 부지런히 힘쓰셨네 / 畫贊密勿
공적을 이루고는 자신은 물러 나와 / 功成身退
영원히 은둔하리라 맹세했네 / 永矢考槃
쇠로 만든 궤짝에 공훈을 새겨 넣고 / 金匱勳盟
재상으로 봉하여 증직하셨네 / 卿月封贈
앞 임금과 뒤 임금들께서 / 前聖後聖
“두터이 생각하여 잊지 않겠노라.” 하셨네 / 曰篤不忘
내 남강 가에 와서 / 我臨長江
한 자루 칼로 혼을 부르네 / 一劍招侑
장사는 죽지 않으니 / 壯士不死
공께서도 여기 오소서 / 公亦來些
읍하고 당에 오르니 / 揖而之堂
용이 날고 봉황이 춤추네 / 龍飛鳳舞
번창한 귀한 자손들이 / 振振玉葉
해마다 제사를 받들어 올리네 / 歲執豆籩
모두가 우리 왕의 신하이니 / 莫非王臣
고금에 구별이 없네 / 無今無古
붓을 달려 권면하는 글을 쓰니 / 奮筆以勸
한 편의 《춘추(春秋)》일세 / 一部春秋
[주-D001] 왜란이 …… 돌아오매 :
임진왜란이 일어난 임진년은 선조 25년인 1592년이고, 향산이 맞이한 임진년은 고종 29년인 1892년이다. 왜란이 일어난 지 꼭 300주년 되는 해이다.
[주-D002] 이송암(李松巖) :
송암은 이로(李魯, 1544~1598)의 호이다.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즉시 조종도(趙宗道)와 함께 귀향하여 의병을 일으켰으며, 학봉 김성일(金誠一)의 막료로 활동하면서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용사일기(龍蛇日記)》를 남겼다. 이것은 임진왜란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사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