親揭其額, 蓋翊衛中原底意也。‘중원(中原)을 도와서 호위한다
영조 2년 병오(1726) 10월 4일(임술) 비가 옴
02-10-04[37] 관서(關西) 출신으로 기절(氣節)을 숭상할 만한 충신 등에 대해 진달하고 관서의 인재를 녹용(錄用)할 것 등을 청하는 의주(義州) 유학 김덕로(金德老)의 상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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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주(義州)의 유학(幼學) 김덕로(金德老)가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은 지극히 미천한 몸으로 먼 변방에서 나고 자라 밭두둑 사이에서 무릎을 안고 지냈기 때문에 아는 것이라고는 곡식과 직물을 내어 윗사람을 섬기는 것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니 조정에서 시비를 의론하는 것이나 정사의 잘잘못에 대해서는 귀머거리나 소경보다도 낫지 않습니다. 그러나 변방 정세의 이해(利害)와 인심의 향배에 대해서는 아침저녁으로 보고 들어서 우려할 만한 것이 많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관서(關西)는 바로 나라의 문병(門屛)이고 울타리입니다. 밤이면 오랑캐가 침입해 올 우려가 있어 사태가 일어나기 전에 방비할 일이 시급한데, 지금 관방(關防)은 소홀하고 인심은 이산하여 날이 갈수록 더 심해지고 다른 여지가 없으니 혹시라도 급한 일이 있으면 장차 무엇을 믿겠습니까. 신은 늘 매우 우려하고 깊이 탄식하며 우리 임금의 곁에서 한번 일깨워 드리려고 하였으나 길이 없었습니다. 신이 작년에 전하께서 구언(求言)하신 비망기(備忘記)를 삼가 보았더니, 바로 백성의 고통을 구휼하고 인재를 구하는 것을 위주로 하였는데 장횡거(張橫渠)의 〈서명(西銘)〉을 오늘날의 폐단을 바로잡을 약석(藥石)으로 삼으셨습니다. 신처럼 미천한 사람도 바로 말을 할 수 있는 때를 당하였지만 먼 변방에 살고 있어 길을 떠나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비록 제때에 미쳐 응지(應旨)하지는 못했지만 우리 전하께서는 반드시 하찮은 사람의 말도 취하려고 하는 성대한 마음을 시일이 조금 오래되었다고 해서 중단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제넘은 나라 걱정을 감히 스스로 숨기지 못하고 지금 비로소 외람됨을 무릅쓰고 대궐에 아뢰니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밝게 살펴 주소서.
신이 삼가 생각건대 우리나라는 세 변방이 모두 방수(防守)하는 곳인데, 그중 서변(西邊)이 더욱 긴급한 것은 대체로 요동(遼東)과 심양(瀋陽)을 이웃하고 있어 대국을 보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관방이 있은 이래로 변방의 백성들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것이 과연 모두 타고난 떳떳한 본성을 지키는 충정이 있어서였겠습니까. 진실로 위에 있는 사람이 어질고 은혜로운 정사를 펴고 벼슬로 표창하는 권한을 발휘하여 충의(忠義)를 격려하고 권면함으로써 사람의 사력(死力)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 선왕께서 서북의 강토를 개척한 후로 나라 안의 백성들에게 작은 허물이 있으면 반드시 양계(兩界)로 옮겨 살게 하여 그들을 위로하고 기쁘게 하며 안전하게 보호하는 방도에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그리고 인재를 녹용(錄用)할 때에도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해 주는 덕을 미루어서 문벌이 높고 낮은 것은 따지지 않고 다만 그 재덕(才德)이 어떠한가만 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가 중엽 이전에 서북에서 문무의 장상(將相)이 끊어지지 않고 나온 것은 대개 이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본도(本道)의 여지도(輿地圖)에 실린 인물을 본다면 분명하게 상고할 수 있습니다.
근대의 일로 말하더라도 우리 효종대왕(孝宗大王)께서 큰일을 할 뜻을 가지고서 즉위한 초기에 특별히 명을 내려서, 서울에 와 있는 서북 지역의 무사로 하여금 별부료청(別付料廳)에 등록하여 거두어 쓰이기를 기다리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송(宋)나라에서 하북(河北) 오로(五路)에 별도의 과거를 시행한 제도와 같이 서북 양계 지역에 간간이 과거를 설행하였는데, 우리 숙묘조(肅廟朝)에 이르러서 더욱 진념(軫念)하여 매번 이조와 병조에 신칙하여 반드시 서북의 인재를 수용하게 하였습니다. 오군문(五軍門)에 있어서도 서북 지역의 무사 각 1인을 배치하여 정식으로 삼아 시행하였으며, 만약 주의(注擬)할 때는 또한 반드시 이름 아래에 주(注)를 달게 하여 주의하는 대로 낙점하였기 때문에 이에 서북 지역 사람들이 비로소 흥기할 희망을 가지게 되었으니, 아 훌륭하였습니다. 우리 숙묘께서는 깊고 성대한 인덕(仁德)으로 비록 천만세를 지나더라도 서쪽 지역 백성을 위하는 마음을 어찌 감히 잠시라도 잊거나 소홀히 하셨겠습니까.
또 을축년(1685, 숙종11)에는 별도로 연석(筵席)에서 하교하고 이어서 이조와 병조에 비망기를 내려서 문신과 무신을 통청(通淸)하도록 신칙하셨는데, 이조와 병조에서 약간 인만 통청하고 책임을 때운 뒤로부터 다시는 이어서 의망(擬望)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올해 봄에 연경(燕京)에 부사(副使)로 사신 간 김유경(金有慶)이 경자년(1720) 봄에 마침 대사간으로 있으면서 관서를 보장(保障)할 계책을 상소로 아뢰었는데, 인재를 조용(調用)하여 청직(淸職)에 허통(許通)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뜻으로 삼았습니다. 이에 숙묘께서 특별히 우악(優渥)하게 비답을 내려서 묘당으로 하여금 품계(稟啓)하게 하였는데, 그때 묘당의 품계에 ‘관직을 위하여 사람을 선택하는 데 있어 참으로 문벌만을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다시 신칙하여 재능에 따라 감별하여 녹용하는 바탕으로 삼을 수 있도록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숙묘께서 승하하셔서 시행되지 못하였고 오군문에서 이미 정식으로 시행되던 것도 따라서 시행되지 않게 되었으니, 아 가슴 아픕니다.
아, 우리 숙묘의 뜻과 일을 이어받는 책임이 우리 전하에게 달려 있으니, 전하께서는 관서를 어떤 지역이라고 여기고 계십니까? 우리 동방의 인자하고 어진 교화는 실로 이곳에 기반을 두었습니다. 고구려 시대에는 삼한(三韓) 중의 하나로서 그 강한 병력이 감히 수(隋)나라와 당(唐)나라에 대항할 수 있었으니 서관(西關)의 땅이 영험하고 인물이 걸출하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임진년(1592, 선조25)의 중흥과 갑자년(1624, 인조2)의 재조(再造)에 있어서도 거의 대부분 본도 사람들의 힘에 의지하였으니, 난을 당하여 적의 침입을 막아 내는 용기와 윗사람을 친애하고 관장(官長)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의리는 실로 다른 지방 사람에게 양보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높은 벼슬아치들은 항상 ‘서쪽 지방 사람들은 대체로 기절(氣節)이 없고 사대부가 없으니, 비록 계속해서 거두어 청현직(淸顯職)에 허통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다.’라는 말을 꼭 합니다. 이를테면 작년에 청북(淸北 청천강 이북) 암행 어사 조명교(曺命敎)가 본도에는 참된 사대부가 없다고 말한 것이 그것입니다. 이 말은 어찌 더욱 서북 사람으로 하여금 억울하여 장탄식을 하며 통곡하게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은 우리 왕조에 들어온 후로 기절을 숭상할 만한 충신(忠臣)이나 의사(義士)와 가계(家系)가 순수하고 밝은 명문 귀족들을 대략 들어 보겠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밝게 살펴 주소서.
옛날 고려 말에 우리 태조 강헌대왕(太祖康獻大王)께서 용만(龍灣)에 군사를 주둔하셨을 때 본주(本州)의 호걸 장사길(張思吉)이 스스로 그 휘하에 나아가 신주(神州 중국)를 범할 수 없다는 것을 힘써 아뢰니, 태조께서는 그 말을 기이하게 여기고 그 용기를 장하게 여겨서 회군하던 날 선봉으로 발탁하셨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좌명 공신(佐命功臣)들 중에 공이 으뜸이 되었고 벼슬은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에 이르렀으며 이어서 태조의 묘정(廟廷)에 배향되었습니다.
임진년의 변란이 일어났을 때 용강(龍岡) 사람 김경서(金景瑞 김응서(金應瑞)의 고친 이름)는 밤에 적의 군영에 들어가 홀로 왜장을 베고 이어서 명(明)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의 군영으로 나아갔습니다. 이여송은 조선 제일의 용맹한 장수라고 칭찬하고 강서(江西), 용강 등 다섯 현의 군사를 거느리게 하였는데 평양의 왜적을 협공할 때에 여러 군사들 중에 용맹이 으뜸이어서 가는 곳마다 맞서는 자가 없었습니다. 이로부터 승직되어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가 되어 병마(兵馬)를 통솔하였으며 적이 가장 강한 곳은 반드시 김경서에게 맡게 하니 마침내 가장 으뜸가는 중흥의 공을 세웠습니다. 애석하게도 무오년(1618, 광해10)의 전역(戰役)에 역적 강홍립(姜弘立)이 혼조(昏朝 광해군)의 밀지(密旨)를 받고서 부원수의 관함(官銜)을 김경서에게 주지 않고 도리어 김경서를 혼자 적진에 사신으로 가게 하였는데, 그 이튿날 강홍립이 온 군사를 들어 투항해 버리니 김경서는 마침내 절개를 지키다 죽었습니다.
중화(中和) 사람 임중량(林仲樑)의 경우는 역시 임진왜란 때 의병을 불러 모아 왜적과 40리 되는 곳에 흙을 쌓아 성을 만들고 왜적의 뒤를 막았습니다. 그리고 늘 유격병으로 대동강 남쪽 언덕에서 싸움을 도발하였으니 적병이 감히 평양 서쪽으로 멀리 쳐들어가지 못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사헌부의 차자(箚子)에 ‘이정암(李廷馣)은 외로운 성에서 겹겹이 충돌해 오는 적을 능히 꺾었으며 임중량은 무너진 성루(城壘)에서 사납게 압도해 도는 적을 능히 물리쳤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갑자년 역적 이괄(李适)의 난에 평양 사람 김태흘(金泰屹), 김양언(金良彦), 최응수(崔應水) 등은 모두 안현(鞍峴) 전투에서 승리한 공으로 관작(官爵)이 봉군(封君)되는 데에 이르렀습니다. 김양언의 경우는 그 아비가 무오년에 죽은 것을 애통하게 여겨 이괄의 난이 일어나기 몇 년 전에 본도 의사 500명과 사적으로 결사를 맺어 군대의 호칭을 ‘복수(復讎)’라고 하고, 변경을 방어하는 관군과 힘을 합쳐서 오랑캐를 섬멸하여 군부(君父)의 원수를 갚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다 역적 이괄의 난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500명의 의사를 거느리고 고(故) 원수(元帥) 장만(張晩)을 따라서 원종 공신(原從功臣) 일등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아직 아비의 원수를 갚지 못했으니 작록은 영예롭지 않다고 여겨서 관직을 굳게 사양하고 본영으로 돌아갔습니다. 정묘년(1627, 인조5)에 이르러 고 병사 남이흥(南以興)과 함께 안주성(安州城)에 들어갔는데 주장(主將)이 그의 계책을 따라 주지 않아서 마침내 좌군(左軍)이 패전하게 되어 용감하게 500명의 의사와 함께 성안의 전투에서 전사하였습니다. 그래서 고 상신(相臣) 김육(金堉)은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에 그의 충효 대절을 낱낱이 기록하였습니다.
또 철산(鐵山) 사람 정봉수(鄭鳳壽)는 정묘년의 난을 피하여 용골산성(龍骨山城)에 들어갔는데 그때 오랑캐 기병이 산야에 가득하고 주장은 성을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정봉수는 이에 동지 몇 사람과 함께 결의하고 일어나서 흩어진 군졸을 불러 모으고 다시 그 성을 지켰습니다. 오랑캐가 포위한 지 40여 일 동안 백번 싸우면 백번 물리치니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였습니다. 그때 철산 사람 김여기(金礪器)는 운암산(雲暗山)에 요새를 구축하고 용천(龍川) 사람 이립(李立)은 소우포(小牛浦)에 목책을 세워, 정봉수와 함께 서로 도와서 호응하는 진세(陣勢)를 만들어서 나고 들며 전투와 수비를 하여 적을 죽인 것이 셀 수 없이 많았습니다. 이립의 경우는 용골대(龍骨大)가 가도(椵島)의 병사를 침범하는 것을 홀로 감당하여 적은 숫자로 많은 무리를 공격해 하루에 세 번이나 승전을 하였습니다. 이립의 용략(勇略)과 정봉수의 기절(氣節)은 가도의 장수 모문룡(毛文龍)이 명나라 조정에 자세하게 상주하여서 은패(銀牌)를 하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무릇 정묘년에 오랑캐 기병이 계속해서 몰아치지 못하고 도중에 강화(講和)를 한 것은 이 세 사람의 의로운 군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묘년의 강화 후에 선천(宣川) 사람 차예량(車禮亮)과 의주(義州) 사람 최효일(崔孝一)은 모두 초야의 미천한 사람으로서 명나라를 위해 설욕할 뜻을 품고서 피를 마시고 함께 맹세를 하여 의로운 무리를 사적으로 결성하였으며 장차 남조(南朝 명나라)에 은밀하게 붙어서 북경(北京)을 회복하려고 하였습니다. 이에 수로(水路)로 먼저 최효일을 보내서 황조(皇朝)의 형편을 탐색하게 하였는데, 차예량은 전별하는 자리에서 시를 지어 말하기를 ‘북쪽 사막은 아직 구름이 검고, 남쪽 하늘은 해가 오히려 밝도다. 신주(神州)를 중흥할 큰 사업을, 그대의 이 한 뱃길에 부친다오.’라고 하였고 최효일도 그 시에 화운(和韻)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이별하였습니다. 이 두 사람의 강개함과 충성스러운 지략은 평소에 깊이 쌓은 바가 있었음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최효일은 황조를 배반한 장수 마등(馬登)이 일을 그르치는 바람에 오랑캐에게 붙잡혀서 끝내는 최효일, 차예량 두 사람이 함께 멸족의 화를 당하였는데,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일어난 일이고 문헌이 부족하여 그들의 명성이 묻혀 버린 채 일컬어지지 않은 지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다행히도 차예량의 유복자(遺腹子) 후손인 차운오(車雲五)라고 하는 자가 서울에 유학하여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의 유고(遺稿) 중에서 약간의 사실을 얻어 낱낱이 들어 상언(上言)하여 기리고 추증하는 은전을 입었습니다.
병자년(1636, 인조14)의 난을 당하여 칠도(七道)에 있는 근왕(勤王)의 군사들이 모두 중도에 무너져 흩어졌는데 오직 본도의 군대만이 김화(金化)에 이르러서 갑자기 극악한 적을 만나, 감사(監司)와 함께 온 자들은 감사와 함께 모두 죽음을 맞았고 병사(兵使)와 함께 온 자들은 병사와 함께 승전을 올렸습니다. 이로써 보건대 본도의 인심과 풍속을 알 수 있습니다.
아, 이는 뚜렷하게 드러난 자들이고 그 밖에 충의의 인사와 절의의 인물들이 전후로 어깨를 나란히 하여 손가락으로 꼽을 수 없이 많은데 번거롭게 해 드릴까 두려워서 감히 세세하게 열거하지는 못합니다. 대저 장상(將相)은 씨가 없고 서인(庶人)의 자식도 공경(公卿)이 될 수 있으니, 앞에서 일컬은 난리 통에 우뚝 일어선 자들 중 태반은 당대에 현달하고 영예롭게 되었으며, 그 자손으로서 선조의 가업을 이어받고 대를 이어 과거에 급제한 자들도 없지 않습니다. 또 태조조(太祖朝) 때부터 중엽에 이르기까지 100여 년간 문신과 무신으로 벼슬이 장상에 이른 자들이 끊임없이 이어졌으며 그 자손으로서 전해 온 계통을 잃지 않은 자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 세상에서 운운한 것은 어찌 관서 지역을 심하게 무고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중간에 침체하여 떨치지 못한 것은 연유가 있습니다. 중묘조(中廟朝) 때부터 소세양(蘇世讓)이라는 자가 천사(天使)의 관반사(館伴使)로서 서관을 왕래한 것이 여러 해가 되었는데, 번번이 산대(山臺)를 설치하고서는 예(禮)를 익힌다고 말하고 또 기생을 두어서 아들이 있고 손자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도내의 한 선비가 시를 지어 조롱하기를 ‘산대에는 참새가 깃들여 살고, 원접사(遠接使)는 자손을 기르네.’라고 하였습니다. 산대는 지금 칙사를 맞이할 때의 의장용 물건이고 참새는 자손을 비유한 것인데, 접반사가 기생첩에게 빠져서 자손을 두기까지 하였으니 실로 명교(名敎) 중의 불행입니다. 그래서 이 시가 전파되어 온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었는데 소세양은 조롱을 벗어날 수가 없자 이내 사감(私憾)을 품고 온 도의 풍속을 모함하고 날조하여 이맥(夷貊)의 고장에 비겼으며 문관ㆍ무관의 청현직에 나아가는 것을 힘써 막았습니다.
아, 소세양은 기묘사화(己卯士禍) 후에 문자를 약간 잘해서 당세에 등용이 되었는데 오랫동안 전형(銓衡)의 자리에 있으면서 인물을 출척(黜陟)하기를 오직 그 마음대로 하였으니 비록 드러내 놓고 배척하지는 않았더라도 의당 그 당시에 버림받았을 것입니다. 더구나 이미 허무맹랑한 말로 성상께 아뢰었고 또 조정에 함께 있는 사람들과 그 의론을 주고받았으니, 서도 사람들은 비록 실정을 아뢰어 억울함을 씻으려고 해도 이미 힘이 부족하고 말도 막히게 되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최하의 방책으로 여러 문신ㆍ무신들이 대부분 관직을 버리고 돌아갔으며 이후부터는 온 도의 문과ㆍ무과 응시생들도 모두 해체되어 과장(科場)에 나아가지 않은 지가 40여 년이 되었고 조정에서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관서 지역이 침체되고 떨치지 못한 것은 바로 여기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른바 선비라고 하는 자들은 겨우 가문을 보존할 계책으로 향리에 살면서 향록(鄕錄)이나 유안(儒案)에 불과한 것을 스스로 양반의 호칭으로 삼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선묘(宣廟)의 중흥에 이르러 고 상신 최명길(崔鳴吉)이 전조(銓曹)의 장이 되어 본도의 고치기 어려운 폐단을 연석에서 아뢰기를 ‘서관 사람들이 청현(淸顯)의 벼슬길이 막혀 버린 것은 원래 조종조(祖宗朝)에서 예전부터 내려오는 관례가 아닙니다. 지난날 중묘조(中廟朝) 때에 문형(文衡)을 맡은 어떤 재상이 본도의 선비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아 잘못된 말을 지어내고 문신과 무신의 청현직을 힘써 막아 버렸습니다. 지금 나라가 중흥하여 만물과 함께 다시 새로워지고 있으니 의당 별도의 진작하는 조치가 있어야 합니다.’라고 하였는데, 이른바 문형을 맡은 재상이란 바로 신이 말한 소세양입니다. 이에 평양 사람 황윤후(黃胤後)가 청현의 벼슬길에 통청되어 벼슬이 참의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이 한 사람이 통청된 후에는 여전히 벼슬길이 막혀서, 문신으로는 일찍이 대시(臺侍)를 거친 사람의 자손도 괴원(槐院)에 낙점을 받지 못하고, 무신으로는 일찍이 병사(兵使)를 지낸 사람의 자손도 선전관에 추천을 받지 못하였으며, 목숨을 바쳐 절개를 지킨 사람의 자손도 음보(蔭補)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아아, 관서 42주를 통틀어 참으로 사대부가 없고 기절이 없어서 이와 같이 침체되었겠습니까. 관서로 하여금 침체되게 한 칼자루는 조정이 쥐고 있는데, 임금이 비록 신칙하는 명을 내리더라도 전형을 맡고 있는 신하가 매번 대충 책임을 때우고 다시는 거론하지 않았기 때문에 선묘(宣廟) 때부터 오늘까지 관서 사람으로서 통청된 사람은 문신ㆍ무신 각각 세 사람에 그쳤을 뿐입니다. 그것을 과연 통청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 서관이라는 한 도(道)는 나라의 서쪽 관문일 뿐만이 아닙니다. 혹시 긴급한 일이 생기면 그 병력을 의지할 수 있는데, 무사들이 많기로는 근일과 같은 때가 없었습니다. 비록 정유년(1717, 숙종43) 별과(別科) 때로 말하더라도, 150명의 합격자 외에 같은 해 가을 정시(庭試)에 합격한 사람이 나머지 일곱 도와 더불어 절반을 나누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육량 대전(六兩大箭)의 경우에는 200보 밖에서 쏠 수 있는 사람이 즐비하니 이는 이른바 ‘씩씩한 무사가 공후(公侯)의 간성이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들 무리 중에서 선발하여 추천하고 등용하며 충의를 면려한다면 훗날 위급할 때의 활용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아, 관서의 무사로서 관록(官祿)을 바라고 서울에서 타향살이하는 사람은 수천 수백 명 중에 한두 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해 한 해 보내면서 가산을 탕진하고 필경에는 낙망하여 통곡하며 돌아오는 자들이 한결같이 모두 이러한 흐름을 이루고 있습니다. 간혹 어렵게 한 자리를 얻어서 여러 해 동안 벼슬자리를 옮겨 다니다가 요행히 6품(品)으로 승급한 뒤에, 유능한 사람은 한 현(縣)이나 한 진(鎭)을 얻는 데 그치고 유능하지 못한 사람은 곧바로 초관(哨官)이나 권관(權管)으로 산관(散官)이 됩니다. 호호백발이 되어서 비로소 고향을 찾게 되지만 물려받은 가업은 탕진되고 처자식은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는데 농사를 지으려고 한들 근력은 이미 쇠하였고 장인의 일을 하려고 한들 평소에 배우지 못한 것입니다. 결국 일개 걸인이 되어 종신토록 부황이 들어 누렇게 뜬 채로 살아가니, 비록 관서를 평소에 정병(精兵)이 많은 곳이라고 일컫지만 이와 같으면서 윗사람을 친애하고 관장(官長)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를 바라는 것은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무사를 선천(宣薦)하는 한 가지 일에 있어서도 속으로 개탄스러운 바가 있습니다. 다른 지방의 사람으로 말하자면 비록 10대에 걸쳐 벼슬 못 한 사람의 자손이라도 조금도 방해받는 일이 없는데, 관서 사람 같은 경우는 일찍이 절도사나 부총관을 지내고 대를 이어 사마(司馬)나 재랑(齋郞)을 지낸 사람의 자손이라도 끼지를 못합니다. 또 숙묘조 때에 특별히 비망기를 내려서 서북 사람을 선천하도록 신칙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닌데 필경에는 전형을 담당한 신하가 말을 꾸며서 품계(稟啓)하고 도총부에 각 한 사람씩만 통청하고 말았으며 선천하는 일은 끝내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아, 서북 사람이 하늘에 무슨 허물이 있겠습니까. 신은 모르겠습니다만 사람 때문에 지역을 천시해서 그런 것입니까, 지역 때문에 사람을 천시해서 그런 것입니까? 서관에 대해서 말하자면 우리 선조(宣祖)께서 중흥하신 곳이고, 북도(北道)로 말하자면 우리 태조(太祖)의 풍패지향(豐沛之鄕)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안다면 어찌 지역 때문에 사람을 천시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삼가 생각건대 다른 지방 사람으로서 선천에 드는 자들이 어찌 모두 사대부이겠으며, 서북 사람으로서 무예로 발신(拔身)한 자가 어찌 모두 상민이겠습니까. 그러나 다른 지방 사람은 조종조 이래로 친인척들이 청현직에 늘어서 있기 때문에 이끌고 선발해서 세력이 대단합니다. 양계 사람들의 경우 서쪽은 소세양의 무함을 당하고 북쪽은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만나서 중간에 침체되어 떨치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문관ㆍ무관의 청현직은 저절로 중간에 끊어지게 되었고 선천하는 길도 따라서 막히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에 이르러 서북에서 벼슬하러 온 사람들은 비록 문벌이 깨끗하여 선천에 적합하더라도 이른바 본청(本廳)의 선생들이 모두 다른 지방 사람들인지라 평소에 잘 알지 못하는 자들이니 누가 기꺼이 그 집안 내력을 잘 알아서 호명하여 추천해 주겠습니까. 비록 상께서 숙묘조 때와 같이 신칙하는 하교를 하시더라도 앞에서나 뒤에서나 매번 막아 버리니, 이로 미루어 보자면 이른바 서북 사람이 괴원(槐院)에 선천되는 일은 지금 이후로 수백 수천만 년이 지나더라도 참으로 불가능할 것입니다. 반드시 상께서 별도의 처분을 하여 서북 사람 한 명을 참하관(參下官)에 선발될 수 있게 하신다면 후진을 호명하여 추천하는 길이 이로부터 열릴 것이니 어찌 훌륭하지 않겠습니까.
신처럼 미천한 사람이 어찌 감히 외람되게 말을 올려서 스스로 망언을 하겠습니까. 종이에 가득히 나열한 말이 이미 지극히 외람되지만, 신은 강변(江邊) 7읍의 일에 대해 미진한 생각이 있어서 감히 다 아뢰겠습니다. 지난번 무자년(1708, 숙종34)에 판서 권성(權𢜫)이 강계 부사(江界府使)가 되었을 때 현(縣)과 도(道)를 통해 상소하여 윤허를 얻어 다음 해 기축년에 이산군(理山郡)에 도회(都會)를 정하였으니, 7읍의 문무 과거 응시생들이 기뻐 날뛰면서 천년에 한 번 만나는 때이며 만세의 영광이라고 여기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과장(科場)을 열기 하루 전에 조정의 명이 바뀌어 무예만 취하기로 하자, 이에 과거장에 나온 문사들은 낙망하여 흩어져 돌아가지 않은 자가 없었고 지금까지 소외되었다는 탄식이 입에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동안의 암행 어사들이 민심을 조사하여 별도로 문과를 설행하여 먼 지방 백성의 뜻을 위로하려고 매번 서계(書啓)하였고 번번이 분부를 받아 처리하라는 하교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해당 조에서 오히려 거행하지 않아 변방 백성의 억울함이 이 때문에 더욱 심해졌습니다.
신이 삼가 들으니 올봄에 특별한 은혜로 강도(江都 강화도)의 과거를 별도로 설행하였다고 합니다. 강도는 혹시라도 변란이 생기면 종사(宗社)가 의지하러 돌아갈 곳이기 때문에 이러한 위로의 은전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 나라의 안전을 보장하는 경중으로 논하자면 강변과 강도 중에 어디가 중하고 어디가 가볍겠습니까. 강변은 비유하자면 울타리이고, 강도는 비유하자면 대문입니다. 미리 방비하는 방도는 대문을 우선하고 울타리를 나중으로 하는 일이 없으니 피차의 경중은 확연히 매우 분명합니다. 전하께서 위로하는 은혜가 특별히 강도에만 미치고 강변에는 미치지 않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빨리 해당 조에 명을 내려서 즉시 회계(回啓)하게 하여 변방 백성을 위로하소서.
아, 신이 살고 있는 곳은 용만입니다. 무릇 용만이라는 고을은 관서의 요충이고 외적이 침입할 때 처음 지나는 길이니 혹시라도 변경에 난이 일어나 용만이 지켜 내지 못하면 관서의 온 도는 믿을 곳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 지역이 어찌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옛날의 인물로 말하더라도 그 용맹한 기절(氣節)은 그 풍토가 그러한 것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위에서 말한 장사길과 최효일이 모두 본주 사람이며, 임진왜란 때에도 의리를 떨치고 충성을 다하여 자신을 잊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이 대단히 많은데 모두 호성 공신(扈聖功臣)에 녹권(錄券)되었으니 신이 거듭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정묘년에는 성이 함락된 뒤에 김태암(金兌巖)이 의로써 오랑캐에게 항복하지 않고 창을 빼어 들고 말을 달려 오랑캐 진으로 쳐들어가 하루 주야 동안 죽인 자가 무려 수백 명이었는데, 마침내 적의 칼끝에 죽고 말아서 지금도 정려(旌閭)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병자년(1636, 인조14)에는 부윤 임경업(林慶業)이 역적 김자점(金自點)에게 저지당해서 많은 병사를 얻어 성읍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다만 사졸 약간 명과 백마산성(白馬山城)에 들어가 오랑캐 군대의 후방을 도모하다가 용천(龍川) 장사 이영선(李榮善)을 얻어 선봉으로 삼고 삼강(三江) 사이에서 오랑캐 기병을 공격하여 그 무리를 크게 패퇴시키고 우두머리 장수를 목 베었는데, 그때 으뜸가는 공을 세운 사람은 정대기(丁大器)와 한춘립(韓春立)입니다. 장차 임금이 머물고 계신 곳에 승전을 보고하려고 하였는데 한경승(韓景勝)이라는 자가 모집에 응하여 낮이면 숨고 밤이면 길을 가서 남한산성(南漢山城)에 이르렀으니, 임금께서 그 충직함을 아름답게 여겨 바로 옷을 벗어 입혀 주고 음식을 밀어 주어 먹게 하였습니다. 양궁(兩宮)께서 북쪽으로 끌려가실 때는 임의남(任義男)이라는 사람이 있어서 스스로 배종(陪從)하기를 원하여 팔장사(八壯士)와 함께 고달픈 타국 생활 중에 충성을 다 바쳤습니다.
이상의 몇 사람이 자신을 잊고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것이 어찌 모두 타고난 떳떳한 본성에만 근본한 것이겠습니까. 바로 능히 이와 같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어찌 조종조의 깊고 두터운 은택이 골수에까지 젖어 들어서 죽을힘을 다할 수 있게 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전하께서 앞 시대를 귀감으로 삼는 데 무엇을 멀게 여기겠습니까.
또 용만 사람 중에는 평상시에 전왕(前王)을 잊지 못하고 서로 더불어 개탄하는 자들이 있으니, 신은 상소의 말미에 함께 아룁니다. 본주에 위화도(威化島)가 있는데 우리 태조대왕께서 요동을 정벌하러 갈 때 군대를 머물렀던 곳이며, 여기에 익원당(翊原堂)이 있는데 우리 선조대왕께서 서울을 떠나 파천했을 때 머물렀던 곳입니다. 지금 태조대왕께서 군대를 머물렀던 때로부터 300년이 지났는데 여러 사람에게 맹세하던 단(壇)의 옛 자취가 완연하게 아직 남아 있으며, 태조봉(太祖峯)이니 호군천(犒軍川)이니 하는 이름이 여기에 남아 있고 실체도 의연하게 남아 있어 전날의 일처럼 환합니다.
익원당의 경우는 선조께서 용만에 행차하셨을 때 처음에 부(府) 안의 취승정(聚勝亭)에 납시었다가 너무 좁은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별도로 행궁(行宮)을 세우라고 명하고 친히 그 편액을 거신 곳인데 ‘중원(中原)을 도와서 호위한다.’라는 뜻입니다. 親揭其額, 蓋翊衛中原底意也。환궁하신 뒤에는 용만 사람으로서 파발마를 타고 상경한 사람이 있으면 선묘께서 바로 차비문(差備門) 밖으로 불러오도록 명하여 익원당이 별 탈이 없는지 물으셨으니, 선묘께서 그것을 그리워하는 것이 이와 같았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병자호란 때 불에 타 무너지고 그 터만 아직 남아 있을 뿐입니다. 아, 두 분 성조(聖祖)께서 지성으로 대해 주신 은택을 백성들이 누군들 추모하지 않겠습니까만 용만의 백성에게 있어서 더욱 각별한 것은 대개 자신들이 직접 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행차하셨을 때의 단이며 행궁의 옛 자취가 지금도 아직 남아 있어서 길을 가는 사람은 노래를 불러 그리워하고 지나가는 사람은 허리를 굽혀 예를 표하니, 의당 봉표(封表)를 거행하여 남아 있는 백성들이 앉으나 서나 그리워하는 마음을 붙일 수 있게 해야 하는데 그랬다는 말을 아직 들은 적이 없습니다. 이것이 어찌 한 고을 사람만 속으로 한탄하는 바이겠습니까. 또한 나라의 흠이 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아, 산 이름이 수양(首陽)이라 고죽(孤竹)의 사당을 세웠고 읍 이름이 신안(新安)이라 주자(朱子)의 사당을 지었으니, 현인을 추모하는 도리에 있어 땅 이름이 비슷한 것에 기인한 것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더구나 우리 성조의 발자취가 친히 다다른 곳이야 어떠하겠습니까.
신이 삼가 듣건대 우리나라에서 이와 같은 일을 시행한 것이 있으니, 완산(完山)의 경기전(慶基殿)과 함흥(咸興)의 준원전(濬源殿)과 송도(松都)의 추궁(楸宮)과 연서(延曙)의 비석이 어찌 성조의 빛나는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용만의 경우에만 유독 빠뜨린 것은 서관을 천시하여 내버렸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난번 병술년(1706, 숙종32)에 본주의 진사(進士) 김덕호(金德護)가 천 리 길에 감발을 하고 가서 상소를 아뢰어 윤허를 입으니 지금까지 도신(道臣)이 옛 자취를 적간(摘奸)하였는데 조정에서 변방 지역이라 이목을 번거롭게 할 수 있다고 해서 막아 버렸습니다.
아, 신은 어리석어서 조정에서 이목을 번거롭게 한다고 우려한 것이 무슨 의견인지 모르겠습니다. 그 이목 운운한 것은 청나라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설령 청나라 사람이 보더라도 우리 태조께서 무예를 떨친 덕과 우리 선묘(宣廟)께서 광명을 펼친 공렬을 과시하기에 마침 좋은 자료인 것이지 우리가 어찌 겸연쩍게 여기겠습니까. 또 논의하는 자들이 말하기를 용만은 아주 먼 변경이라 병화(兵火) 또한 두렵다고 하는데, 이것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무릇 용만은 서로(西路)의 인후(咽喉)입니다. 설령 불행한 일이 생겨 용만이 침략을 당하면 서로 역시 위태하고, 서로가 위태하면 나머지 일곱 도(道)가 홀로 편안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아직 오지도 않은 병화가 어찌 용만에만 우려가 되겠습니까.
아, 먼 서쪽 땅의 사람도 왕의 신하 아님이 없으니 곡식과 직물을 내어 윗사람을 섬기는 것도 다른 지역과 똑같고 위급할 때 윗사람을 친애하고 관장(官長)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도 다른 도와 똑같습니다. 그런데 성명(聖明)한 조정에서 침체되고 다른 지방 사람들이 깔보는 것이 더욱 심하니 어리석은 사람들은 하늘을 원망하고 사람을 탓하는 마음이 없을 수 없습니다. 거기에 더해서 전왕을 잊지 못하고 남아 있는 터에 봉표하기를 원하는 마음도 멀리 떨어진 지역이라고 해서 이룰 수가 없으니, 서쪽 지방 백성으로서 어찌 탄식하며 눈물을 흘리지 않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진념하소서.
아, 신처럼 보잘것없는 사람이 어리석은 충성심에 격동되어 저도 모르게 말이 지루하게 길어졌으니 외람된 죄를 자초하였습니다. 다만 병들어 고통스러우면 부모를 부르는 것은 사람의 심정으로 절로 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그 죄를 용서하고 그 심정을 불쌍히 여기소서.”
하니, 답하기를,
“그대의 상소를 살펴보고 응지(應旨)하는 정성을 깊이 가상하게 여긴다. 서북 사람을 별도로 녹용하는 일은 지난번에 이미 신칙하였지만 지금 그대의 상소가 이와 같으니 이조와 병조에 별도로 신칙하겠다. 서도에 과거를 설행할 때에 시지(試紙)에다 ‘강(江)’ 자를 써서 표시하는 일은 이미 비국(備局)에서 복계(覆啓)하였기에 윤허를 내렸다. 상소 말미에 논한 일은 그대의 말이 비록 옳지만 여러 조정에서 거행하지 못한 일이라 가벼이 논의할 수 없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