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남직례가 제주와 가깝습니다.”

믿음을갖자 2022. 9. 28.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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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27 갑오(1594) 8 20(을축)

27-08-20[02] 윤근수 등을 인견하고 중국에게 양식, 군사 원조를 요청하는 일을 의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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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이 주청 상사(奏請上使) 해평 부원군 윤근수와 부사인 상호군 최입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들은 가서 주선을 잘하여 성사하고 돌아오라.”

하니, 근수가 아뢰기를,

최입의 말이, 중국에 흉년이 들어 양식을 청하기가 매우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나 힘을 다해 진청(陳請)하려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시랑이 군무(軍務) 전제(專制)하니 모름지기 사람에게 힘써 도모해야 것이다. 시랑에게 보내는 자문은 경보다 먼저 보내야 것이며, 자문을 먼저 보내더라도 경이 직접 만나서 힘써 진달해야 것이다.”

하니, 근수가 아뢰기를,

신이 비록 1~2 지연하더라도 힘껏 시랑에게 개진하려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리하라. 수병(水兵) 제주를 향해서 온다 하니, 내가 길은 알지 못한다만 어찌 바다를 건너올 수가 있겠는가. 설령 나온다 해도 산동(山東)ㆍ금(金)ㆍ복(復)ㆍ해(海)ㆍ개(蓋)를 경유하여 장홍유(張鴻儒) 나온 대로 하면 것이다.”

하니, 최입이 아뢰기를,

산동으로 해서 나올 수도 있지만 그곳이 매우 피폐해서 군사를 내보내기가 어려울 같다고 합니다.”

하고, 근수는 아뢰기를,

나오는 수병은 당연히 남직례(南直隷)ㆍ영파부(寧波府)ㆍ절강(浙江)ㆍ소주(蘇州)ㆍ항주(杭州) 등지를 경유해야 것인데, 제주도와의 거리가 얼마인지 없지만, 일찍이 《유구록(琉球錄)》을 보니 ‘순풍일 때는 복건(福建)에서 7일이면 이르고 순풍이 아닐 때는 10여 일 만에 이를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였다. 최입이 아뢰기를,

왜인이 민ㆍ광(閩廣)으로 가는 자는 대소 유구(大小琉球) 지나갑니다.”

하고, 근수는 아뢰기를,

“남직례가 제주와 가깝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적이 만약 험한 곳을 점거하고 있으면 수군으로 있겠는가?”

하니, 근수가 아뢰기를,

수군만으로는 되고 육군이 함께 협공해야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중국이 만약 참으로 격멸하고자 한다면 어찌 힘이 부족할 이치가 있겠는가.”

하니, 최입이 아뢰기를,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하남(河南) 근처에 토적(土賊) 크게 일어났다 하는데 사실인가?”

하니, 최입이 아뢰기를,

토적이 일어나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오하(吳下)에 있는 세족(世族)은 풍신수길(豊臣秀吉)과 통모하여 반역을 꾀하므로 조정에서 깊이 염려하였는데 다행히 잡았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총병이 그대로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을 반드시 시랑에게 힘껏 간청해야 한다. 다만 시랑이 총병을 머물게 있을지 모르겠다.”

하니, 근수가 아뢰기를,

총병이 아주 돌아갈지 않을지는 아직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의 말은 고양겸(顧養謙) 갈려가고 시랑이 아직 나오지 않았는데 사이를 틈타 들어가려고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돌아가면 영영 돌아가는 것이다.”

하고, 이르기를,

경들은 오늘 출발하는가?”

하니, 근수가 아뢰기를,

주문은 이미 써놓았으나 예부 자문(禮部咨文) 쓰지 못하였습니다. 쓰는 일이 끝나면 늦게라도 출발할 것입니다.”

하고, 아뢰기를,

총병의 말을 들으니 중국도 군사 동원을 싫어한다고 합니다.”

하고, 최입이 아뢰기를,

양식의 어려움이 군사보다 어려워서 군사를 허락한다 하더라도 양식이 또한 어려운 일입니다. 요동 변방에 있는 군량도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산동에 흉년이 들어 왜적을 막는데 쓰일 쌀과 콩이 3 석뿐이라 하니, 우리 나라의 전성기로 비교하여 말하면 중읍(中邑) 저장하는 것만도 못합니다. 금년에는 태상(太常)으로 구황사(救荒使) 차임했으나 곡식을 모집하기가 매우 어렵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유격(沈遊擊) 시랑(宋侍郞) 지금 어디에 있다 하던가?”

하니, 근수가 아뢰기를,

심은 북경으로 갔고, 송은 탄핵을 당했다고 합니다.”

하고, 최입이 아뢰기를,

송은 탄핵을 입었으므로 복명을 못하고 산해관 근처에 있다고 합니다. 시랑은 명망이 가볍고, 상서와 시랑은 비록 탄핵은 당했으나 평시에는 중망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손광(孫鑛) 재능과 지혜가 있는가?”

하니, 최입이 아뢰기를,

재능과 지혜가 있는지 없으며 우리 나라 일에 힘을 쓰는지의 여부도 없습니다. 다만 벼슬이 높은 문관 중에서 사람만이 화친을 주장하지 않는다 합니다.”

하고, 근수는 아뢰기를,

손광은 정덕(正德) 연간에 절사(節死) 손수(孫燧) 손자이니, 충효 가문(忠孝家門)입니다. 28세에 과거에 장원하였고, 이제 나이 48세입니다.”

하였다. 최입이 아뢰기를,

지난날에 이미 2만여 석의 양식을 주었으니 이제 비록 다소간의 식량을 주더라도 필시 배까지 마련하여 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나라 배로 이송해도 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 배를 보낼 있는가?”

하자, 최입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평안 감사에게 배의 유무(有無) 물었더니, 평상시에 다니지도 않는 길이고 관선(官船) 없어서 왕래할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변사에 의논해서 처리하라.”

하고 이르기를,

봉공(封貢) 주면 적이 돌아가겠는가?”

하니, 최입이 아뢰기를,

왜적의 뜻은 없습니다. 예로부터 한창 강성한 도적이 화친을 청한 경우는 없었으나 만약 봉공을 허락해주면 이것으로 인하여 물러갈 것도 같습니다. 인사(人事) 미루어 본다면 저들도 군사가 쇠약해졌을 것입니다. 만약 한창 강성한 기세라면 어찌 허명(虛名) 기다려서 이와 같이 오래 머물겠습니까. 다만 국가가 불행하여 만한 기회가 있었는데도 심유경(沈惟敬) 방해하였고 지금은 기다리기를 오래해도 유경이 오지 않고 있습니다.”

하였다. 근수가 아뢰기를,

총병이 비록 봉공해 주어도 왜적은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하고, 최입이 아뢰기를,

시랑이 올린 주본에 이르기를신은 무사할 것을 알기 때문에 몸으로 친히 합니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근수와 최입 등이 물러가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금 머물라.”

하고, 주찬(酒饌) 내리고 약봉지를 주며 이르기를,

우리 나라의 존망이 이번 사행에 달려 있으니 만리 길에 일을 이루고 돌아오라.”

하니, 근수가 아뢰기를,

사기(事機) 멀리서 헤아릴 수는 없으나 편의대로 적절하게 도모하겠습니다.”

하고, 드디어 나갔다.

【원전】 22 330

【분류】 왕실-국왕(國王) / 왕실-사급(賜給) / 군사-통신(通信) / 외교-() / 외교-()

[-D001] 중읍(中邑) : 

중간 고을.

[-D002] 정덕(正德) : 

() 무종(武宗) 연호.